이 세상과 삶은 신비와 모순, 역설로 가득합니다. 물론 나름대로 질서도 있고,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신비와 모순, 역설이 가득합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아도 서로를 잘 모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나도 나를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요. 인생을 살면 살수록 신비와 모순과 역설 투성이인 세상이 보입니다. 인생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 확인됩니다. 그런데 세상보다 더한 신비와 모순과 역설이 가득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은 다 신비하고, 모순 덩어리이고, 역설로 가득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가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주인이라는 메시지, 예수가 승리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모든 성경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요한계시록은 특히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승리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은 어떤 처지에 있었습니까. 메시지의 내용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메신저인 요한은 그때 로마에 붙잡혀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승리자의 위치에 있었던 게 아니라 무력한 패배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요한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역시 모욕과 멸시와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 같이 예수가 세상의 주인이요 승리자라고 믿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면 예수는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승리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패배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60여 년 전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가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부활을 믿는 제자들의 무리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의 제자들은 로마에 대항할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예수가 로마의 정치 권력에 붙잡혀 죽었던 것처럼 제자들도 역시 예수의 부활을 믿고, 왕 중의 왕이라고 믿는 것 때문에 로마의 군홧발에 짓이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어디를 보아도 저들은 승리자의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 앞에서 요한은 예수가 승리자라는 메시지를 증거했습니다. 예수가 로마에 짓이김을 당하고 있는 눈앞의 현실을 온 몸으로 겪고 있으면서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향해 예수가 왕 중의 왕이요 진정한 승리자라고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리얼하게 상상해 보십시오. 참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은 온통 패배 투성이인데, 예수도 패배자고,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도 패배자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가 승리자라고 믿고 말한다는 게 참 웃기지 않습니까? 마치 이런 것하고 비슷합니다. 날마다 빌어먹는 거지가 자기 아버지는 재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예수는 승리자라는 메시지는, 거지가 자기 아버지는 재벌이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가당치 않은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기록해서 교회로 하여금 읽고 듣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가당치 않은 이야기를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역설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럼 모순처럼 보이는 역설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봅시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일날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나팔소리처럼 우렁차고 쩡쩡한 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으로 기록하여라. 그리고 그 기록한 것을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켰습니다. 그러자 일곱 가지가 달린 금촛대가 있고, 그 한 가운데 인자 같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분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머리와 털은 희기가 흰 양털 같고 하얀 눈 같았습니다. 눈은 불꽃 같았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긴 옷은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릴 때 입는 옷을 말하고 있습니다. 금띠는 왕실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인자 같은 이분은 제사장이자 왕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눈같이 흰 빛은 순결함을 표시하고, 불꽃 같은 눈은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인간의 마음 깊은 곳까지도 꿰뚫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놋쇠는 힘과 영원성을 상징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의 날선 검은 나누고 자르고 심판하는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인자 같은 분은 어떤 분인가 하면 제사장이자 왕입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알고 결코 쇠하지 않는 힘을 가진 전능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심판주입니다.
요한은 이분을 보자말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마치 이런 것하고 비슷합니다. 우리가 아주 강렬한 빛을 보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리게 되지요. 영광스럽고 거룩한 것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숙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데 갑자기 빛이 비취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립니다. 요한도 그랬습니다. 요한이 인자같은 이를 보자 말자 도무지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감각과 신경이 멈춰 죽은 자와 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자기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보자말자 자기는 죄로 물들었는데 그분은 거룩하시다는 것, 자기는 피조물인데 그분은 창조자시라는 것, 자기는 어둠인데 그분은 빛이시라는 것, 자기는 불의한데 그분은 공의로우시다는 것, 자기는 찰라적 존재인데 그분은 영원한 분이라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분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을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 앞에 서는 순간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는 게 당연했습니다. 요한이 본 분은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또한 어떤 분입니까? 그분이 요한에게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고. 나는 살아있는 자라고. 그리고는 놀라운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정말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분은 전에 죽었던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로마의 정치 권력과 유대의 종교 권력에 무참히 짓밟혔던 분입니다. 60여 년 전에 죽었던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살아계십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분으로 살아계십니다.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패퇴시키고 부활 생명으로 살아계십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으로서 역사의 오메가 포인트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역설입니까. 처음과 나중이신 분이 전에 죽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수의 역설이고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눈에 보이는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이 능력의 구주가 된 것도 로마의 권력을 짓밟음으로써가 아니라 십자가의 패배를 통해서였습니다. 원수를 제물로 삼음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였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힘과 승리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세상에서 약함과 고난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보여준 최상의 역설입니다. 세상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기막힌 역설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순과 역설이 바로 기독교의 진수이고 복음의 진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샅샅이 살펴보십시오. 모순과 역설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는 모순과 역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형식과 내용이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순과 역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축복에 대해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실 때 세 가지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네 후손이 번성할 것이고, 네 소유가 많아질 것이고, 네 후손들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면 기근과 흉년이 들게 하고, 이방 나라에 땅을 빼앗기게 함으로써 축복을 거두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결과로서 나타났습니다. 형식과 내용이 함께 굴러갔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달라집니다.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밀했던 밀착이 사라집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을 충만히 누리면서도 물질적인 축복을 전혀 향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물질적으로는 부유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항상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났는데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영적이고 내면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말할 때 ‘신령한 복’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예수님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다 이루었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고,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눈으로 보면 약한 것을 자랑한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절대로 복이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그런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야말로 모순과 역설의 최고봉이고, 그 모순과 역설이 바로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모순과 역설에 사람들은 걸려 넘어집니다. 유대인들은 무능력한 것이라며 넘어지고, 헬라인들은 어리석은 것이라며 넘어지고, 오늘 대한민국 사람들은 스펙을 쌓아야 하는 인생살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넘어집니다. 이해가 됩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그게 사실이니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고 무능력한 것이니까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아니, 다른 그리스도인 말고 우리 자신을 봅시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가 지신 십자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내 삶을 치고 들어오는 십자가, 내 삶의 양식으로서의 십자가는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 모순과 역설로 가득한 십자가를 삶으로 살아내는 일은 피하려 하지 않습니까? 하여, 교회도 예수의 십자가는 말하지만 우리의 삶을 치고 들어오는 십자가는 말하지 않고 축복만 말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한 개인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불렀습니다(1:6). 단지 나 한 사람을 불러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끝낸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 나라의 백성(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기는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모델하우스로 기능하도록 부름받은 매우 독특한 기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오직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계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당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소나 양을 희생제물로 드리지 않고 자신의 몸, 자신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의 몸인 교회를 희생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희생제물로 바쳐서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외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최상의 길이고 최후의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의 몸인 교회를 희생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다 제사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제사장으로 부름받았습니다(1:6).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의 몸과 생명을 희생제물로 드렸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몸과 생명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렇습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이고 존재 양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도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지금 너희를 희생제물로 사용하고 있다. 너희를 높이 들어서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희생제물로 사용하는 것이니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참아내라. 내가 너희를 제물로 사용하고 있지만 너희를 지킨다. 그리고 마침내에는 너희 모두를 나의 승리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니 현재의 고난을 회피하지 말고 견뎌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세상보다 더 큰 힘을 휘두르고, 세상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제물이 되기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은 자기 존재를 과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숨김으로써, 강함으로써가 아니라 약함으로써, 부유함으로써가 아니라 가난함으로써, 이김으로써가 아니라 짐으로써 증거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짊어져야 할 역설이고 모순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는 힘을 추구하는 권력 의지가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자아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들에게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나의 약함이 곧 주님의 약함이요, 나의 승리가 곧 주님의 승리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야 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너의 약함이 나의 강함을 드러내고, 너의 아픔이 나의 승리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신비와 역설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그리스도인)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존재의 신비를 아는 자입니다.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는 것을 압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는 것을 압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있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압니다. 이 신비, 이 역설을 알기 때문에 현실의 고난과 가난과 약함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울이 했던 고백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순과 역설처럼 보이는 그 길을 잠잠히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생과 용서, 사랑은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 일진대 오늘 보수든, 진보든 한국 사회는
자기 자아 욕구로 넘쳐 나는것 같습니다.
이런점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의 형태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좀더 작아지고, 약해지고, 나의 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십자가의 역설의 능력과 신비에 의해서 살아 가기를 소망합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 모두가 메마른 심령에 단비와도 같습니다!!!
이리 열심히 읽고 묵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영적 교제라고 하는 거겠지요??
누구도 약함과 가난함을 기뻐하고 환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을 환영하는 금욕주의가 건강치 않은 것처럼
약함과 가난을 기뻐하고 환영하는 것 또한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약함과 가난을 저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 깃든 역설의 세계를 보는 눈이 필요한데
거기까지 볼 수 있는 눈은 부족한 것 같아요.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요.
영적인 촉수가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지나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봄의 축복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존재의 모순과 역설 신비를 아는 자.
저의 신앙의 수준의 최고의 단계(참고: http://www.dabia.net/xe/?mid=free&page=7&document_srl=490661
) 로 나아가게 끔 인도하시는 두분의 정목사님, 신 목사님로 그리고 다비안들에게서 늘 큰 은혜를 받습니다.
모순과 역설의 존재, 가르침을 일상적인 삶에서 실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음을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너무 나약하면서 강하게 보이려는 자아욕구가 늘 끔틀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인지적인 요소 보다 감정요소가 더욱 지배하여 나 자신을 이끌고 가는 듯합니다.
지성, 감성을 넘어서 영성이 이끌어 가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 봅니다.
목사님 고밉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