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사순절 기간에 신자들은 구제와 선행에 힘을 썼다. 바로 위에서 두 번째로 언급한 금식이 식욕이라는 인간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구제와 선행은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한 생존 본능을 제어하는 신앙 태도다. 말하자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차원으로 영적인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이를 성만찬 영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형제애로 나눈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더불어 살아가려면 결국 ‘너’와 공동체를 배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제로 자신의 소유를 나눠야 한다. 신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오직 개인의 경쟁력만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기심만이 사회의 동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시대정신에서 ‘너’는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마틴 부버가 지적했듯이 이제 ‘너’는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라는 사물이 되고 말았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웃을 향해 개방적인지, 사회적인 소수자와의 연대에 진지한지 질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자신의 소유를 얼마나 포기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 없이 사순절 영성은 공허하다. 수백억 원, 수천억 원짜리 교회당 건축이 큰 고민 없이 시도되는 한국교회가 사순절 영성을 말한다는 것은 속과 겉이 이중적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사순절에 대한 세 가지 전통은 기본적으로 자기부정을 가리킨다. 고난의 영성이라 해도 좋으리라. 재를 이마에 바르는 것이나 금식과 구제는 모두 다소간 자기를 부정하며, 이로 인한 고난을 담보한다. 고난의 영성! 말은 좋다. 솔직하게 묻자.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서 여전히 유효한가, 가능한가, 적실한가? 오늘과 같은 소유와 소비와 풍요를 신처럼 떠받드는 시대에 이런 부정의 영성, 고난의 영성이 신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인가?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일반 신자만이 아니라 소명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목사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사순절 영성은 말 그대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말인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말장난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능력이다. 사순절 영성도 삶의 능력이다. 이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자.
ㅎㅎ
안녕?
매일묵상을 하면서 한자에 관심이 갔어요.
그래서 파일 첨부했어요.^^~~
정목사님
21세기는 개인 경쟁력만 극대화하는 몰입하도록 유인하는 시대라는 말에 시선이 갑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70-80년대 대학이 민주화를 실현을 위한 비판적 지성이 살아 있었는데
이 시대는 그 마저도 사라진듯 합니다.
교수들은 외국학술지에 논문 싣는데 몰입하고 학생들은 취직에서 위너로 살아 남기
위해 비판 저항 지력을 갖추는데 행동으로 나아 가지 못합니다.
서울대를 정년 퇴직한 이면우 교수가 대학을 진단 하던군요.
사회과학 교수들이 외침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아마 영어로 강의하는 요구하는 이후에 비판지성은 사라지고
살아 남는데 영혼을 상실한 듯한 같습니다.
노정부 시정 BK 정책으로 돈을 맛 본듯하여
청문회 등장하였던 교수 출신 장관 후보자이 부동산 투자로 부를 무장 하였으니
이제 정부 프로젝트에 돈을 받은 만큼 함부로 외쳤다가 목줄을 걱정 해야 할 정도로
겁을 주니 그냥 입다물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신상에 좋은 전략이라고 여기겠지요.
노정부 때 프로젝트 제법 했던 사람이 한말입니다.
한|때 노정부 때 정부를 향해 마음껏 자기 주장을 하던 김욕옥 선생도 지금은 숨죽이고 있는 것을 보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삶이 황폐화(삶의 식민지화) 되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전달하고 교육기관 역활하는 대학 언론 교회가 경쟁을 추종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아가니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목사님이 주장하는 사순절이 영성이 필요한 시긴이라는데 공감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