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힘은 신학자가 필요와 마음내킴에 따라 파악하기도 하고 파악하기지 않기도 하며 이렇게 저렇게 취급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가 행복하려면 자신의 신학작업을 숙고할 때 이 힘의 속삭임을 들어야 하며 자신의 명제들이 이 힘에 의하여 결정되고 규제되며 통제받게 되어야만 한다! 신학자는 이 힘이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신학자는 자기의 사고와 언어가 이 힘에 의하여 통제되게 해야 한다. 그것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이 힘은 임마누엘의 역사 속에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와 이들 안에서, 교회공동체의 회집, 세워나감, 파송에 있어서도 주권적으로 역사했고 역사하고 있다.(68쪽)
지금 바르트는 계속해서 교회와 신학이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진정한 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소. 이 힘은 신학자에 의해서 도구로 취급될 수 없다 하오.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상으로 다룰 수 없는 것과 같소. 20m 높이로 덮치는 쓰나미를 맨손으로 막아서려는 것과 비슷하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소. 이 힘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Sein)와도 같소. 바르트의 문장은 힘이 있기도 하지만, 문학적으로도 세련되었소. 신학자가 행복하려면 이 힘의 속삭임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오. 이 힘의 속삭임이라니, 그게 무엇이오? 폭풍의 속삭임, 쓰나미의 속삭임, 존재의 속삭임을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소? 이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소. 신학 초보자들이 바르트의 글을 읽기 힘든 이유가 이런 데 있소. 신학의 세계를 시적(詩的)으로 표현하는 거요. 단순히 시적인 게 아니라 신학의 깊이를 담고 있소. 이 문단에서 부수적으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신학작업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오. 따라서 설교 행위는 행복할 수 있소.
가끔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학의 깊이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을 봅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떤 깊이를 아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앎을 전제로 한다면,
그 앎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신앙을 나눌 수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