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K1 | https://youtu.be/MibgZm7gXKM |
---|---|
LINK2 |
성경공부/ 창세기 읽기 007(창 3:8~17),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강해, 2023년 3월15일
목사님, 창세기 3장 3절에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위치가 "동산 중앙"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심지어 이브가 하나님이 그거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다는 구절이 나오니까
본문에 따라서도 아담이 바보가 아닌 이상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의 존재와 그 파워를 몰랐을 리가 없다고 봅니다.
아담이 더 나쁩니다. 걍 쿨하게 이브처럼 인정해야지 무슨 자기 부인까지 팔면서 같잖은 변명을 하고 앉았나요.ㅋㅋ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시험당하게 하시느냐"류의 내적 질문을
오늘도 수십 번씩 하고 앉았는데 강의 듣다 보니 웃음이 나네요.
그런 질문은 무용하다 하셨지만 아무튼 전 하나님도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왜...ㅋㅋ
창세기 읽기,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창세기 3장 8절부터입니다. 3장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야기입니다. 이 타락으로 인해서 실낙원이라는 현실이 발생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은 불순종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순종하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시죠? 앞 시간에 어느 정도 말씀드렸다고는 봅니다. 이것은 풀릴 수 없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완벽하게 창조하셨다면 이런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왜 불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셨냐 하는 반론이 가능한 겁니다. 더구나 뱀이 등장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왜 뱀을 만드셨을까 하는,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습니다. 뱀을 좋은 쪽으로 창조하시지 왜 간교하게 창조하셨냐는 질문도 가능해요. 간교하다는 말이 나쁜 뜻보다는 영리하다는 뜻이에요. 어쨌든 아담과 이브를 불순종의 늪에 떨어지게 유인(유혹)한 게 뱀이잖아요. 하나님께서 뱀을 만들지 마시든지 만들더라도 그렇게 유혹하지 않도록 만들었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문제가 되도록 만들어 놓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사람에게 지우나, 그런 질문은 성경 읽기에선 의미가 없어요. 근원적인 이유를 우리는 모릅니다. 현재의 인간 삶이 어떠냐 하는 것을 신화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뱀이 나와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것은 신화죠. 앞 시간에 얘기했을 거라고 보는데 뱀이 아담을 직접 유혹하진 않았어요. 여자를 유혹한 겁니다. 여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고 남자에게도 주었다고 해요. 여자에게 더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곤란합니다. 성경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바탕에 깔고 기록되었기에 여자들에 대한 관점이 오늘날과는 크게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타락 이야기의 과정이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8절,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표현이 좀 특이하죠? 이런 표현은 빼도 되는데 들어가 있네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르와흐라고 해서 영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고 하잖아요. 중요한 건 아니니까 지나갑시다.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이런 건 신화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동산을 거니시겠어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저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신화의 방법인 거죠. 신화는 종교로 발전하기 이전의 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유명하죠.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5대 강 그쪽 지역에서는 그리스 신화가 종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리스 신화가 정말 맞는 이야기인지 그렇지 않은 이야기인지를 판단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러한 신화에 대한 분석, 판단 작업이 철학입니다.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신학이고, 그게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작업은 철학이에요. 신학은 오히려 신화적인 이야기에요.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가 자기 정체성을 신학으로 잡지 않고 철학으로 잡았습니다. 신학은 신화에 대한 이야기니까 근거가 좀 약하잖아요. 철학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었어요. 그리스 문명이 그렇습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교가 시작했기 때문에 정체성을 신학보다는 철학에 뒀습니다. 교부들은 다 철학자라고 할 수 있어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때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느 계기로부터 천천히 신화에 대한 이야기에 해당했던 단어를 끌어들여서 정체성으로 삼은 거죠. 신학을 이제는 신화가 아니라 철학과 맞설 수 있는 학문으로 생각한 겁니다. 8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산에 거니신다 이런 표현이 신화죠. 신화가 조금 유치하게 보인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종교로 발전하기 이전에 이 세계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했던 사람들의 종교 형태가 바로 신화에요. 창세기에는 그러한 영향이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만이 아니라 다른 데도 신화적인 표현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이상하거나 잘못된 게 아닙니다. 시대에 맞는 글쓰기였어요. 8절 후반부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이런 표현도 다 신화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겠습니까? 신이 사람처럼 형태를 취한 거죠. 그리스 신화가 다 그런 겁니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참 유명한 문장입니다. 뒤에 4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이것도 인간의 원죄와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창조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3장과 4장에 타락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구약 성경이 인간을 어떻게 봤는지가 이런 창세기 앞부분의 구성으로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악한 거죠.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이는 동물(인간)이 인간으로 표현됩니다.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시잖아요.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그 문장이 심층적입니다. 어디 있느냐. 3장에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가 있고 4장에서는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가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숨었다는 거죠. 왜 숨었는가의 이유도 있을 것이고 말이죠.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에 가인이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변명을 하네요. 3장에서도 그렇고 4장에서도 그렇고 사람은 다 변명을 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가인은 뻔한 거짓말을 했고요, 아담과 이브도 서로 변명을 하죠. 10절,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건 정직한 게 아니죠. 벗어서 두려워서 숨은 건 아니죠. 자기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숨은 것이거든요. 7절에 “그들의 눈이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부끄럽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인식의 문제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뭘 알고 싶다는 욕망에 떨어지잖아요. 그게 인간의 본질이기도 한데 인간을 파괴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7절에선 두려운 건 아니잖아요. 부끄러움을 아는 거죠. 그런데 10절에는 벗은 게 두렵다고 하는데 이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거죠. 여기서 세 가지 단어가 나오는데 벗음, 두려움, 숨음 이 각각의 단어에 많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도 계속 숨죠. 인격이라고 하는 단어가 원어로 보면 페르조나, 가면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가면이라는 것은 숨기는 거잖아요. 우리는 이중 삼중 가면을 씁니다. 진짜 내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많은 교육을 받아서 그 교육에 의해서 또 숨기도 합니다. 벗었다, 두려워한다, 숨는다. 세 단어가 각각 우리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네요. 11절,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선악을 알게 되는 나무를 먹기 전에는 벗었는지 아닌지 부끄러운지 아닌지도 의식이 안되는 거죠. 아주 어린 아이들의 의식하고 비슷합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 추궁하시네요. 신화적인 표현이에요.
12절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주 뻔뻔하죠. 아담이 대단합니다. 일단 저런 일이 있으면 자기가 책임이 있다는 얘기를 해야할 것 아니에요?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여자가 주었든 어떻게 되었든 자기가 먹었잖아요.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해명을 하든지 아니면 잘못했다고 하든지 해야하는데 인간의 본성이 자기를 방어합니다. 이건 저를 포함해서 다 그렇습니다. 정말 뻔뻔스런 표현이에요. 없는 일을 꾸며낸 것은 아니지만 사실에 숨어서 자기를 방어하는 거죠. 이런 일은 많잖아요. 결국 이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거예요. 아담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여자가 열매를 줘서 나는 생각이 없었는데 먹었다, 그 여자는 하나님이 주셨지 않느냐,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 책임이라는 거죠.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뱀을 만들지 않았으면 이러한 유혹도 없을 거고, 인간의 타락도 없고, 인간이 실낙원의 현실도 없었을 거 아니냐, 하는 논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똑같은 거예요. 솔직하게 들여다 보면 우리들의 삶의 태도와 흡사합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자도 아담과 똑같이 대답합니다. 다만 아담보다는 조금 덜 도전적이네요. 아담은 하나님 당신이 줬다 얘기를 했는데 이브는 다행스럽게도 하나님 당신이 만든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네요. 아니면 그 말이 여기 생략돼 있을까요? 단어 한두 개 넣고 빼고 이 문장들 설명하고 있지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전문적인 성서주석학자들의 주석하는 방식으로 본문을 읽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식으로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인문학적 상상력을 펼쳐가면서 본문을 자유롭게 읽어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미묘한 차이를 말씀드리고 있어요. 아담은 대답할 때 하나님이 주셨다고 노골적인 단서를 붙였지만 이브는 아주 단순하게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담이 더 비겁하네요. 더 난폭하고 더 불신앙적입니다.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뱀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으시네요. 너 왜 이브를 유혹해서 내 말을 불순종하게 만들었냐고 묻지 않으셨어요. 그냥 책임을 묻습니다. “네가 모든 가축들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이것은 별로 바람직한 표현은 아닙니다. 뱀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 듯한 문장이에요. 다른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가 뱀에게 어디 있겠습니까. 뱀은 정말 특이한 동물이에요. 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거에요. 반려견처럼 뱀을 데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간혹 해외토픽 같은 데서 나오기도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 그런 일들은 거의 드뭅니다. 왜 인간이 뱀을 특별히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어요. 뱀만 싫어하지는 않죠. 개나 고양이같이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동물들 말고는 사람이 다른 동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악어를 좋아하겠어요? 곤충들을 좋아하겠어요? 뱀은 좀 더 특이하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특징들이 있긴 합니다.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구약 성경 어디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신화에 얽힌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저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정확하게 연구를 하지 않았어요. 뱀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억울하게. 하필 뱀을 유혹자를 대표하는 짐승으로 성경이 말하네요.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니리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도 그 시대상이 작용한 표현입니다. 아기를 낳는 것까지는 모든 동물들의 자연 현상 즉 암컷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남편을 원하고 남편이 너를 다스린다 표현했는데 지금 저런 얘기했다가는 큰일 나죠. 다른 표현으로 뭐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섬긴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서로가 서로를 섬길 것이다, 라고 하는 게 낫겠지요.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들은 인정받기 힘들었죠. 그런 시대가 다 지나간 게 다행입니다.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실텐데 그냥 아담의 말을 듣고 속아주는 거죠. 네 말대로 아내의 말을 들어서 네가 열매를 먹었다고 하자 하시는 겁니다. 이 말을 하다 보니 앞으로 잠깐 돌아가야겠네요. 아담이 뱀에게 유혹을 받지 않은 걸로 나오는데요, 뱀이 여자에게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보암직도 하고 여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유혹을 받아서 먹게 된 장본인으로 나옵니다. 아담은 여기에 연루가 되지 않은 것으로 일단 본문은 그렇게 나오네요. 본문을 그대로 따른다면 남편은 억울하네요. 자기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여자가 줘서 뭘 모르고 그냥 먹었을 뿐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게 돼버렸단 말이죠. 12절에 아담이 거칠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게 전혀 자기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확신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책임을 여자에게 미루고 있어요. 제가 이 본문을 수없이 읽었는데 이런 대목은 제가 덜 예민하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아담도 유혹을 받았겠지 그렇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본문은 아담은 전혀 연관이 안되네요. 이건 말이 안되는 거예요. 그 얘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자, 아담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만약에 본문 앞부분에서 나와있듯이 전혀 이 문제에 연관되지 않았다면 여기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벌은 억울한 거죠. 아담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가(사랑하는 아내가) 먹을 걸 줘서 그냥 먹은 것 뿐이니까 아담에게는 이런 징벌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데 내립니다. 이걸 놓고 연역해보면 아담도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은 데 대한 책임이 있는 겁니다. 유혹도 똑같이 받은 겁니다. 그렇게 봐야해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는 그 판단이 이브만이 아니라 아담에게 똑같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그런 거죠. 17절 후반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이 짊어질 숙명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더 길게 봐야 하니까 다음 시간으로 넘어가서 그 문제를 보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유트브를 하지 않는데 혹시 녹취하여 올려 주실 분이 없으십니까?
올려 주시면 후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