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6강. 제2장 역사적 예수(08년 2월14일)

우리는 지금 기독교가 뭐꼬? 하는 제목으로 6개월간 공부할 예정으로  지금 한 달반 정도 공부했습니다. 이름이 좀 거창하기도 하구 어떻게 보면 단순하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뭐꼬? 일종의 화두 형식으로 잡은 제목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뭐냐는 것을 알고 싶다고 하는 생각도 들어있고 과연 우리가 기독교를 얼마나 알겠냐는 뜻도 있고 그렇다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기독교를 질문할 뿐이지. 모든 대답을 다 찾아낼 수는 없다는 그 뜻이 담겨 있습니다. 질문하는 거죠? 그 질문속에 대답도 있구요. 그게 변증법칙인것 같습니다. 뭘 알아야 질문하고, 질문을 정확하게 던져야 거기서 대답을 찾을 수 있고,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대답에 가까이 간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뭐꼬?라는 이 말은 우리가 기독교를 그냥 몇 가지 정보를 알아서 내가 소유하는 그러한 대상이 아니라 내 삶 마지막까지 질문해야 될 그러한 대상으로 여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질문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근본적으로는 그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거죠.

2월 오늘이 14일 입니다. 두번째 장이죠. 첫번째 장에서는 초대교회의 토대들에 대해서 좀 이야기했습니다. 1장은 초대 기독교의 토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책상 머리앞에서 머리를 굴려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교라고 하는 구체적인 종교 그 안에서 천천히 시나브로 배태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뭐꼬? 라는 질문을 할때 유대교와의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장에서 우리가 그 이야기를 했고요 2장에서는 1장에서 한 이야기가 한 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을 했고 거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엮여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가 뭐꼬?라고 이 제목의 강의가 그 언저리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으니까 유대교와의 관계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앞으로 진도를 나가야 되고 결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잡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1장은 그런 정도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걸로 다 된 것이 아니지만.  모든 공부가 그렇습니다. 어느 한곳에 머물러서 그것과 씨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씨름하면서도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마지막까지 다 잡아 낼 수도 있는거예요. 그렇군요. 제가  하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맞는 겁니다.

유대교와의 관계, 초기 기독교에 계속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기독교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반대쪽으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다 맞물리기 때문이죠. 궁극적으로는 그렇지만 결국은 우리가 한 과목의 수업진도에 따라서 앞으로 나가는게 교육효과라는 점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유대교와의 관계는 그런 정도로 접고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도가 좀 늦은 편이예요. 제가 좀 다른 이야기가 많아서 좀 늦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뭐 끝날 것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2강을 우리가 역사적 예수라고 했죠. 본질적으로 예수가 누구나 라는 것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 역사적 인물이었거든요.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았던 그분이죠. 역사적 예수죠. 자연인입니다. 자연인 예수죠. 자연인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인가 하는게 기독교 신앙이 변증해 내야할 가장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자연인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이죠? 예수와 그리스도 차이는 제가 굳이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예수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사람, 자연인, 유대의 한 남자. 예수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일반적인 한 사람. 그게 어떻게 특별한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아 인가 하는 것이죠? 증거를 대라. 하는 요구를 우리는 듣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끊임없이 그 질문을 받았을 것이고 2천년동안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질문해야 됩니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과 똑같은 것입니다. 당연한게 아닌가? 믿음으로 당연하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 변증하는 것이 우리끼리만 할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우리끼리 믿고 사는 것이 그친다면 이러한 공부가 어쩌면 필요없을 지 모릅니다. 그냥 촌부들처럼요. 좋은 뜻으로.. 아무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믿습니다하고 생각하고 살아도 큰 문제는 아니예요.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신학이 대학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우리끼리만 비의적인 그러한 것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에 전체에 보편적으로 설득할려고 하는 그런 이유거든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서 성실하게 대답을 해야 되고 대답을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신앙적 실존에서도 엄중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냥 일반적인 종교성으로 기독교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회퍼가 이야기한 것처럼 기독교는 비종교거든요. 그 이야기는 또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만 일단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기독교는 일반적인 종교와 다르다는 것이죠. 종교는 죽음이 두려워서 라든지 외롭다든지 그런 것으로 어떤 절대자를 찾는 거잖아요. 기독교는 그런 것이 현상적으로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런 것과는 다른 겁니다. 네. 요 문제는  제가 이렇게 설명해서는 충분하지는 않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여기서 머물러있을 수 없으니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가 오겠지요.

기독교 신앙이 그러한 우리의 나약함,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절대자를 찾는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역사적 인물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고 하는 이 사실에 있는거든요. 이러한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신앙에서도 긴급한 엄중한 질문이고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서 쉽게 피해버리고 말거든요. 그냥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포장을 하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뭘 그렇게 따지냐 믿으면 다 되는거지. 은혜로 다 넘어가야지 그것도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은혜로 모든 것을 다 해명해 나갈 수 있다면, 자기 설득이 가능하다면, 혹은 설득이 되지 않더라도 은혜라고 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의 지평이거든요. 은혜는 아주 그런 점에서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게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게 아니고요. 그런 은혜 중심주의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런 예수가 그리스도라 사실에 대해서 엄중하게 질문하는 것, 그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죠. 교회가 뭐냐? 는 것도 그렇구요 성만찬이 뭐냐? 그런것도 그렇구요. 사실은 그렇게 말하다보면, 말하기 시작하면 기독교 신앙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엄중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다 회피하고 살죠. 맨 날 그렇게 고민하고 말이지 그렇게 살수 있냐? 좀 이렇게 loose 하게 이렇게 펴놓고 편안하게 좀 소풍 나오듯이 사는 것도 좋지 않느냐? 옳습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머리를 이렇게 골치 아프게 싸매듯이 살려는 것이 아니구요. 늘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늘 노는 식으로도 살수는 없잖아요. 근본적으로 우리 바탕에 놓여 질 것을 놓고 그 다음에 그 준비가 되면 그 다음에 인제 놀 수도 있고 삶을 유희처럼 생각할 수 있고 존재를 가볍게 하는 거죠. 자기를 무겁게 하지 않고 가볍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가볍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질문들을 우리가 좀 쉽게 방기하지 말고 힘들더라도 뛰어 들어가 보자 그러한 거죠.

다시 질문 드립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적 예수라 하는 2장을 같이 생각하면서 주어지는 하나의 화두와 같은 질문, 이것입니다. 예수는 왜 그리스도인가? 그 증거를 대라.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증거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조금 그렇습니다. 증거? 성서에 있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신학 성서가 바로 그것을 증거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이미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의 증언이거든요. 그러니까 아직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서 자체가 그것이 어떠한 실증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실증적인 사실을요. 그런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경험된 예수를 기록한 것이라서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라는 사실을 빼도 박도 못하는 아주 명백한 그러한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증거가 아니란 말도 아닙니다. 이것이 무조건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죠. 믿음이 증거다. 믿음이 가능할 수 도 있읍니다만 뭘 들어야 믿을게 아닙니까. 사실이라는 것이 설득이 되어야 믿지 않겠어요. 무어가 또 증거일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뭘까요?

예... 이렇게 말씀드려야 됩니다. 요건 좀 신학적인 용어인데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유일회적인 사건이라는 사실로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건, 예수님의 출생과 그분에게 일어났던 모든 메시야적 징표들,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한번밖에 없었던 사건들 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걸 독일어로 '아인 퓌어 알레말' 이라 하던가요. 유일회적인 모든 것들을 위한, 유례적인 것이라는 것이죠.  무슨 뜻이냐고 하면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 예수가 그리스도가 하는 사실, 그거를 가르키고 있는 많은 사건과 일어난 현상들, 그런 것들은 반복된 것이 아니라 딱 한번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것이죠. 예수라는 Personality는 한번이라는 것이죠.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말씀드리는 것이에요. 신학적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이해하기만 하면 쉽습니다. 낱말 뜻으로만 알고 있으면 죽어버리고 신앙이 깊이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요. 한번뿐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이 안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곧 우리가 이 세상에 경험하는 것들로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그러한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한번밖에 없던 것인데 어떻게 그 증거를 댈 수 있겠어요.

이것은 우리 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체 물리적인 현상하구도 빗대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지구라고 하는 것이 우주에서 하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이 지구의 모든 것 일어나는 것들을, 아주 부분적으로는 어떤 규칙, 보통 자연과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법칙이라고 합니다. 열역학 1법칙, 2법칙 이런 것 있잖습니까. 불가역의 원리라든지 그런거 같습니다. 질량 불변의 법칙이라든가 물리적인 사실과 수학공식들, 원소의 관계들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법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 전체 현상, 지구 전체 안에서 일어나는 그 물리적이고 생명의 사건은 어떤 과학적 가설로도 완전하게 해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번뿐이니까요. 과학적인 규칙을 정하는 것은 실험을 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올 때 그게 과학적인 근거를 갖게 되거든요. 약품도요 어떤 학자들이 감기약이나 이런 것을 개발했다 그게 임상실험을 통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 시판하고 쓸 수 있는 것 처럼요. 화학 물리 생물학 유전공학 다 마찬가지 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어떤 규칙을 찾아낼 수 있는데요. 지구 전체에 대해서는 그것을 못 찾아냅니다.

일예로 기상예보 말입니다. 3일치까지는 인공위성으로 어느 정도 일기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좀 불규칙하죠. 게릴라성 폭우도 기상대가 내일 날씨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의외의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용하다고 3일이후 내다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1년 후의 오늘의 날씨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까요? 아무리 과학적인 엄밀한 것을 통해서도요. 불가능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변수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변수들, 우리는 소리를 듣더라도 초보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주파수 안에 있는 것만 듣거든요. 높이 올라가거나 낮은 것은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구안에서 경험 범주안에서만 가능한거죠. 너머 있거나 다른 차원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몰라요. 모르는 것들이 다 이 지구 안에서 연관되고 있거든요. 우리가 모르고 있을뿐이지요.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이 세계를 해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 시각이 너무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이 있죠. 현미경이나 망원경 같은 것을 통해서 벗어난 것을 보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는 거그던요. 아무리 현미경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더 무한하게 작아지는 세계를 볼 수 없고 아무리 망원경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무한하게 먼 세계를 볼 수 없구요. 지금 우리가 망원경으로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수천년 수억년전의 별일 가능성이 높거든요. 지금 현재는 없는 별이죠. 그게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 사실은 우주까지 갈 필요 없이 지구안에서도 사실 모릅니다. 요술 덩어리인데 부분적으로는, 일시적으로는 거의 규칙적으로 반복되어서 그것을 학자들이 파악해가고 있는 겁니다. 물리 현상도 그런데요.

예를 들어서 설명 드린 겁니다. 예수의 메시아 사건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건도, 일회적이라고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도 없고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 지구전체를 이해하려면 지구바깥에서 봐야 되듯이 차원을 달리하는 데서 봐야 하듯이 역사가 끝날때 예수 그리스도도 종말에 가서 알려지게 될 겁니다. 제가 몇 번 인용했듯이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지금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 옛날 사람인데 사물에 대한 직관력이 참 놀랍죠. 지금 물리학적인 관점으로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은 거예요. 어떻게 그것이 연관되는지 도저히 찾아낼 수 없습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이미 던져져 있기 때문에 이 세계 안에 들어와 있어서 세계 자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좀 속된 표현입니다만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정글속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증명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종말에 가서 드러내게 될 하나님의 사건이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면 기독교가 별로 확실한 종교가 아닌가 아니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증명하겠느냐 안타깝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중요한 대목을 말씀드리는 건데요. 또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봐라. 예수 믿으니까 사람이 변화된다. 그런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의미가 없다기보다 별로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만 믿어야 사람이 변화 되나요 절에 나가도 사람이 변화되고요,. 어머니 아버지의 훈계로 사람도 변화되고요. 변화는 그렇게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 봐라. 성령이 활동하는 증거 아니냐. 교회만 부흥 됩니까? 신천지도 부흥하거든요. 이단들이 더 부흥할 수 있습니다.

뭐를 증거로 댈까요. 그런 것들이 다.. 거기에는 신학적인 변증, 해명들이 가능한데요. 노파심으로 말씀드린다면 기독교가 하는 진리논쟁이 의미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로 완벽하게 증명해 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 이건 기독교 신앙이 다 연관되는데 이것을 다 증명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증명해 낼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 사건중에서 부활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결정짓는 요소인데 그거는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비슷한 것, 표상이라고 할까요. 그거를 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그거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것, 무슨 애기냐?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그렇게 부활 되는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들은 자꾸만 기독교 신앙을 우리의 경험안으로 끌어들일려고 합니다. 고 안에서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생각을 투사 시키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그런 방식으로 잘 하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반론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거는 끝나지 않는 논쟁에 휘말리고 마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는 유례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이 지구 전체의 생명 현상처럼, 우주 전체가 한번 있는 거잖아요. 그런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그와 같은 것이라서 어떤 것으로 증명할 수 없다. 세계가 다 끝나봐야 이 세계가 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때 가서야 예수의 모든 사건이 그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건이 드러날 것이다.

그때 가서 그걸 어떻게 아냐?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나중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 그런 핀잔을 들을 수 있을 것이죠. 여기서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어떤 쪽에서 반론이 나오면 그때는 입을 다물어 야 하니다. 그런 방식의 논쟁은 소모적이기에 무의미합니다. 안티기독교와의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단에 빠지면 안 되겠지만, 그 어떤 것을 통해서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런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만 바른 길이다. 이것만 밝히면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사실을 인정하겠다 하면요 또 다른 똑같은 반론이 나오게 되거든요. 그렇습니다. 그러한 대답이... 오늘 중요한 거를 말씀드렸어요. 어떤 분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연하다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예수를 이해하는데 기독교,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유일회적적인 사건이었기에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해나갈 뿐이다. 변증과 증명하고는 좀 다를 겁니다.

종말에 가서 다 드러난다 한다면 할일은 아무것도 없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과학이나 생물학 이런 것들이 부분적 범주안에서 사실들을 밝혀 나가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우주 전체에 대해서는 아주 작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부분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해명, 증명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하겠죠. 그렇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이거는 부분적예요. 이런 것으로 어떤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완전히 증명해낼 수는 없습니다. 경계선이 있는 것 같애요. 가능한대로, 최대한도의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설명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 공동체로 안에 들어오느냐 아니냐는 것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고 안에 들어오게 되면 예수가 그리스도로 실존적으로 고백이 되는 거죠. 고 앞에는 선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다 준비해온 것이 아니어서 이야기하다보니 그쪽으로 가게 되는데요. 완전하게 정리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닌데요. 그 맥락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부분적이지만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증명하는 과정으로 2장 역사적 예수를 우리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네가지 작은 소단원을 이야기했습니다. 처녀 마리아. 예수님의 출생은 바로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구요. 둘째 인간 예수, 호메메루데우스 반인 반신이 아닌 총체적으로 신이며 총체적 인간. 예수에게서 인간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면 반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죠. 세번째는 출가, 네번째는 세례요한과의 관계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팔복과 제자 선택 세 항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예수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투 테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투 테우까지 붙이는데요.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그가 무엇을 선포하고 무엇을 행해야하는 것을 알아야되는데요. 자꾸 예수님의 사건이라고 하잖아요. 무엇이 일어난 어떤 것들을 알야야 하는 거죠. 하나님 나라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하더라도 신대원이나 Th.M 한학기 주제, 공부 할 수 있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할 수는 없구요.

예수님이 공생애 처음 시작하실때 선포한 말씀이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나라와 일치하고 계시다 그렇게 보시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보통 통전적이고 할까요, 총체적인, 실제적인 그러한 세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구요. 협소한 차원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 믿고 가게되는 천당, 이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무의미하다기 보다도 이런 신앙이 기독교 안에 분명히 담겨있죠. 우리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기다리고 죽음이후에 가게될. 요게.. 그게 그런 것을 天堂이라고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과 이렇게 일치시킴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적으로만 이해합니다. 대궐이나 호화맨션 같은 그런 것 쯤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축소시키는 경향이 많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도 그러한 표현들이 없지 않아 있죠. 새 예루살렘,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새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 그게 뭐냐 하는 거는 생각이 필요한데요.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새로운 세계와 예수님이 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어느 부분에서 연결이 되고 어떤 부분에서 차이가 나냐 하는 것은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연결이 되고요. 새로운 나라가 온다는 점에서는 연관이 됩니다. 새로운 세계가 오는 것이거든요. 유대인의 역사 이해라고 할 수 있는 묵시문학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서는 그 세계가 오늘과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구분됩니다. 이 세상은 무조건 악해요. 이건 무조건 타락한 겁니다. 이건 망해야 됩니다. 이원론적이죠. 그 당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라든지 그 제국들에 의해서 얼마나 그들이 고통을 받았어요? 이 땅에서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하나님이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땅과는 단절된 그러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말론, 혹은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유대교의 묵시문학처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 바탕에 깔려있지만 이세상과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 땅이 그렇게 악한 세상으로 남지 않아요. 물론 구약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아름답지만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그것이 변화됩니다. 시대에 그 무엇이 강조되는 게 있거든요. 역사적으로요. 자기들이 처해있던 삶의 자리에서 어떤 때는 창조가 중요하고 어떤 때는 타락에 관심을 가졌고요, 이런 것처럼요. 기독교 2천년 역사도 그렇습니다. 유대교가 창조론으로는 굉장히 적극적이기는 한데 그들은 죽음이후의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었습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나중에 묵시문학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삶이 비약한다고 할까요. 그렇게 간다고 하는 생각들이 자리를 잡게 된 거죠. 성서의, 구약성서 말이죠. 유대교의 깊은 사상들이 다  있지만 그것으로 다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도 늘 변화가 있고요 우여곡절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이 묵시 문학이 큰 영향을 끼쳤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그대로 흡수하지 않구요. 이 땅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그렇게 애기해도 됩니다. 예수님이 땅에 있는 삶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았거든요. 세리와 어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도 땅에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생각하신, 예수님이 선포하신, 예수님의 행위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 나라가 과연 이 땅의 나라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이런 것은 더 공부가 더 필요할 겁니다. 신학석사 논문으로 가능할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연구해봐야 되겠지요.

요한계시록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공간적인 차원에서의 천당, 새 예루살렘이 이해할 수 있을만한 그런 것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것에 근거해서 목회 현실에서 보면, 목회적인 마인드죠. 충성하면 그 나라에 가서 좋은 집에 들어가고 황금면류관 쓴다 이렇게까지. 상급에 차이 있다. 개털모자라고 속설까지 나오는 이러한 정돕니다. 그 동기만은 제가 그렇게 부정하고 싶지만은 않아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필요하기도 하죠. 그렇게 믿고 살아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더 이상 생각이 안되는 분들, 어떻게 더 깊이 생각하라 억지로 되지 않거든요. 글쎄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도자들, 지성적인 기독교인이라든지, 역사를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이 나 혼자 예수믿고 구원받고 천당 가서 잘 산다 그런데 머물지 않고 역사 전체에서 건강해지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한 개인이 시민으로서도 자기 호구지책 으로만 삼지 않고 같이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지성인 지도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좁은 의미에 머물지 말고 더 큰, 크다기보다 심층적인 그런 쪽으로 끌고나가야 되는 거죠.

그러면 천당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 나눈다고 대충 연결시켜서 본다면요. 그런데 여기서 제가 그게 뭐냐 몇 가지로 설명하려고 했는데요. 아 여기. 끝부분에. 하나님의 나라 천당 어떻게 말해도 좋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똑같이 사용되니까. 개념으로 이해하라고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죠.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입니다. 소유와 존재가 뭐냐. 여러 번 나온 이야기인데요. 경우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의미가 달라집니다. 요 부분에서 이야기하면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소유라고 하면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의미합니다.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것. 많잖아요. 이 땅에 있는 것은 거의가 소유입니다.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연필로 제가 이렇게 쓰는 것, 소유하는 거잖아요. 내 손으로 다루는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내가 처리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론적이라고 하는 거죠. 두 가지 개념을 아마 우리가 마지막 끝날 때까지 여러 번 이야기할 거구요. 이것은 신학만이 아니라 철학하고도 연관되는 문제고 인문학과 연관되는 문제들인데 이런 것들이 넓어지는 것이 공부입니다. 특별한 것은 아네요. 특별하지 않다기보다도 어떤 기독교 신앙의 정보들, 이런 것들을 많은 아는 것은 두 번째이고 개념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야만 우리가 어떤 학자의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고 그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내 생각이 깊어져요. 그거는 성령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걸 경험해 보셨어요. 그러니까 창조적인 학문, 예술, 신학도 그렇고, 신앙도 그렇고. 창조적으로 됩니다. 나우웬이든지 이러한 영성가들을 비롯해서 제가 전공한 판넨베르크라든지, 오토만, 융엘이라든지 이러한 학자들이 그 이전에 많은 위대한 신학자가 있었는데도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존재론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세계가. 궁극적인 존재론의 세계는 하나님이니까요. 그거는 인제 닫히지가 않죠. 우리가 이용해서 써먹는 것이 아니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스스로 운행하는 어떤 힘입니다. 그것을 빨리 여러분들이 포착하셔야 합니다. 그거는 아마 입으로는 여러 번 이야기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하고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 거기에 다 연관되는 것인데.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런 용어로 이야기하는데 존재, 근원적인 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 천당 천국 우리 소유개념으로 생각해서 집이 있어야 되고 먹을 게 많아야 되고 좋은 우리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복지시설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초라한 건가요. 그런 거로 만족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동의하시죠.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참된 평화 참된 기쁨 희락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게 계속 반복되면 아주 또 지루한 거예요. 우리는 자꾸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 땅에서 경험하면서도. 그건 소유화 된거든요. 아무리 귀한 것도  소유해버리면 그냥 일종의 매너리즘이라 할까요. 그냥 거기에 떨어져버립니다. 귀한 보석도 들고서 귀부인들이 보석 끼고 목거리차고 좋아하지만 남이 봐주니까 우쭐한거든요. 혼자 거울보고 히죽 히죽 웃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좀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지요.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소유와 도구의 대상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면 이건 좀 웃기는 거죠.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먼거죠. 그런 것으로 스스로 영적인 만족이 안 되니까 자꾸만 강조하게 되는 거죠. 강화 시키는 거죠.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메일로 받으셨을 거로 보고 기독교를 말한다라고 책을 가지신 분들은 다 읽으셨겠지만 설명을 했습니다.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을 때 소리가 존재론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거예요. 우리가 시디를 샀다고 그래서 우리가 음악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들을 귀와 음악과 존재론 적으로 일치된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죠.

첫째는 하나님 나라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는 체제나 질서가 아니라 변화와 운동이다. 예수님의 비유도 다 변화와 운동입니다. 사실은 변화와 운동이라는 말로도 다 담아 내기가 쉽지 않죠. 다만 그 성격을 이야기 할 뿐입니다. 어떤 시스템, 프로그램 그런거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그것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딱 우리가 움켜 쥘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절대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가 조직할 수도 있고 해체할 수도 있고 이건 도구가 됩니다. 교황이 있고 체제 시스템 그리고 그안에 있는 온갖 이벤트와 프로그램으로 교회는 가능합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보이는 교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나라와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존재론적인 하나님의 통치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다 생각하시면 좋죠. 손가락 자체가 달은 아니니까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가르키도록 해야 하는데 자꾸만 교회가 자꾸 날봐라 나를 봐라 이런 식으로 하니까 참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뭔지 전혀 모르는데서 나오는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좋은 뜻으로 세계 복음화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소유의 대상일걸요. 교회 확장일걸요. 교회 확장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궁극적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확장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그거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인데 그거는 우리가 담아낼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인데 우리 교회가 작아진다고 해서 교인수가 적어진다고 그 나라가 축소되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자유속으로 좀 들어가 보십시오. 전혀 새로운 세계의 희망,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 앞에 펼쳐질 것이고 거기서 진리의 영인 성령과의 소통이 더 깊어 질것이고,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뒤로도 죽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이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Identify. 그 이야기는 모든 것들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도구니까 그 도구를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마저도 허물어 내가 삼일만에 더 다른 해석학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일단 그건 접어두고요 예루살렘 성전도, 안식일마저도 그렇구요.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에 사로잡힌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로잡힌 정도가 아니죠. 하나님 나라와 하나가 된거죠. 그래서 그에게서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날 사건들이 일어난 것이죠. 그걸 말하기 위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귀신이 나갔다던지 병이 고쳐졌다든지 이러한, 죄의 용서 선포라든지 이런 것들을 말한 겁니다. 그러한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를 통해서 일어났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다. 그걸 말한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처음에 질문한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질문과 연관된 것이죠. 성서기자,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들을 끌여들였습니다. 끌여 들였다기보다 그 관점으로 예수의 공생애 동안 일어난 일들을 재해석한 것이죠.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됩니다. 아까 제가 경계선을 이야기했는데요. 그게 아주 미묘합니다. 바깥에 있으면 똑같은 현상으로 그게 그렇지 하고 넘어가게 되지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죠. 그러면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계속 모르고 있다고 들어와야만 아느냐? 그러면 어떤 사람은 들어오고 어떤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는가? 개인 개인이 다르기 때문에 끊어서 말하기 힘듭니다. 그걸 제가 주욱 이야기를 말씀 드린거구요.

하나님 나라를 팔복하고 연관해서 좀 여기에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 하나 하나가 다, 요즘 제가  마가복음 다비아에서 사이트에 마가복음 매일 묵상을 하고 있으니 그 이야기는 거기서 나왔을 거라고 전제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대표적인 팔복을 잠간 짚으면요. 이 팔복이 첫번에서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되어있고 마지막 여덟번째도 천국이 주제예요. 첫 번, 마지막번 다 하나님나라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제가 판넨베르크말을 제가 인용했습니다. “예수가 복을 선포한 이들은 예수를 믿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볼 수 없는 이를 가르킨다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팔복에서 예수님이 ‘나를 믿어야 어떻게 된다고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가난한 사람들,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사람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걸 수 없는 사람들, 알겠죠? 어떤 사람들인지를? 노숙자를 가리킬까요? 제 3세계 민중들 가리킬까요? 누구를 가리킬까요.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걸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부를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잖아요. 하나님에게만. 여기 참여한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가난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팔복의 결론은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의 정치와 유대의 종교가 제시하는 가치를 향한 반동의 ac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정치와 유대종교가 제시하는 것들이 뭔지는 다 아시죠. 로마정치는 Pax Romana(http://en.wikipedia.org/wiki/Pax_Romana)거든요. 로마의 평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그러한 정치적인 어떤 목적을 실현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요. 복지만이 살 길이다는 그러한 생각들.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 혹은 유대교 종교 이건 업적주의거든요. 사실은 로마와 유대교가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형식만 다르지 내용은 같습니다. 이런 것에 반동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것, 그쪽으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리는 것, 이것이 메타노이야죠 회심입니다. 전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거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로 어떻게 회심하냐? 막연하다. 그러니까 무조건 회심한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뭔지 알아야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Turn하잖아요. 그렇고 모르면서 아 내가 옛날에 잘못한 것 회개합니다. 그거는 예수 믿지 않아도 다 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예수 믿지 않아도 할 말한 일들에 모든 무게를 두는 게 아니다는 고건 일단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설교를 비평할 때 ‘도덕적인 설교를 하지 말아라.’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 아는것들, 도대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에서, 특별히 케리그마에 천착해야 될 주일 공동예배 설교에서 대학교 교양강좌 교수들이 할 만한 이야기들, 주례사 할 만한 것들을 뭐하러 하는가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겠지요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구요. 구약에서는 어떤지? 신약도 교회사 쪽에서, 어거스틴과 루터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20세기 초 스위스에서 있었던 종교 사회주의, 하나님나라를 거기에서는 핵심으로 잡았던거든요. 그 종교사회주의와 또 볼세비키 혁명이 말하는 그러한 평등한 세계, 그리고 오늘의 이 신자유주의라고 할까요 자본주의가 말하는 그러한 미래,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 좀 많이 해봐야 하겠지요.

제자 선택이 마지막 항목이었는데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선포한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게 별거냐? 별거는 아닐 수도 있고 별거 일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질문하면 예수님이 과연 제자들을 선택했겠느냐 하는 질문도 가능합니다. 물론 복음서에 제자 선택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딱 열두명을 그렇게 중요한 인물들로 예수님이 중요하게 생각했겠느냐 질문이 많은데 그건 타당한 질문이구요. 복음서는 제가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그러한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한 텍스트, 진술들,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실증적인 사실로 그냥 적용 시키면 조금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는 이야기를 자꾸만 하고 있군요.

그러나 제자들이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중요한 게 어쨌든 그들이 큰 역할을 했든 아니던 열둘만 아니라 거기에 포함한 여러 사람들, 제1세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를 추종한 1세대 사람들을 사도라고 합니다. 열두명이든 70명이든 300명이든 학자들에 따라 다르겠죠. 그 1세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사도들이거든요. 사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를 압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잘못알고 오해했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오해하는 거죠. 그러니까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그거는 사도들을 통해서 옵니다. 사도성입니다. 그것은 니케야,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나온 교회의 본질 네가지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 사도를 통한 신앙, 간접적인 신앙을 우리가 갖고 있는 거죠. 사도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했느냐가 옳다 그르다는 것을 두 번째 치고 그게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말에 귀를 기울이여야지요. 사도들이 아니고 다른 문서들에 관심을 갖는것, 그것은 변죽을 울리는 것이죠.

어떤 면에서는. 제가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미국에 있는 예수 세미나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제1문서들에 대해서보다도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왜 그럴까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예수를 오해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뭔가를 그 사람들이 쓴 문서 안에서 찾아야지요. 성서가 제일 테스트지요. 그리고 교회 공동체안에서 나온 그런 신학적 도큐먼트 그러한 것들이 예수를 바르게 아는데 아주 중요한 문헌들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이거든요. 사도신경에 대해서 제가 썼는데요.(http://dabia.net/bbs/view.php?id=theo&no=86) 사도신경. 사도 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많았습니다. 여러 군데 신앙고백이 많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여러 신앙고백이 전승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도(마 16:16) 베드로 개인의 신앙고백이라기보다 그 당시 초대교회 전체의 신앙고백에 가깝습니다. 로마교회의 세례문답, 니케아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4세기 로마교회의 고백문에는 예수가 이렇게 이렇게 돌아가시고 지옥에 내려갔다고 하는 문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후서인가요?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음부행이 빠졌습니다. 미국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이게 있을거예요. 지옥에 내려갔다고 하는 표현이 만인 구원론의 근거가 됩니다. 예수 믿지 않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지옥에 설령 갔다고 하더라도 다시 거기서 예수를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그렇다면 만인 구원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면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한 형벌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거는 모순이죠. 사실은.  그렇다면 예수 믿을 필요없겠네 라고 말한다면 이건 또 코메디입니다. 이미 진리를 알았다면 어떻게 거기서 벗어 날 수 있겠어요.

다음주에는 제3장으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군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여러분들이 미리 책도 좀 읽고 생각도 좀 해보시고. 다음 목요일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주일 밤에는 질문 있으면 온라인에 넣어 주시구요. 지금당장 질문이 있네요. 말씀해 보세요.

질문: 샘터교회에서 니케야 신조를 택한 이유가 뭐냐?

아닙니다. 평소에는 사도신경을 합니다. 다만 매달 첫주일 한번씩 하는 성찬예식이 있을 경우에 니케야신조를 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이게다 중요하거든요. 내용도 비슷하구요. 공동예배서가 그런 것을 권면 하더라구요. 여기에 설명을 하고 있더라구요. 내가 보기에도 두개다 중요한데. 사도신경은 우리가 전 세계 교회가 같이 하기에 기본으로 하는거구요. 한달에 한번 정도는 니케야 신조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공동예배서 제시해 주는 것이죠. 개신교를 비롯해서 예전적인 리터지컬한 에배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것은요 지금 드리는 예배가 거기에 모인 그 사람들만의 예배가 아니라 2천년동안 내려온 전체 기독교 예배와 연관된다는 의미입니다. 단절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 유기적으로 연관된다는 차원에서 사도신경, 니케야, 예전 방식.이런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샘터교회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만 드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 성자들과 성도들과의 교제. 성자와 성도들 똑같은 단어거든요. 하나님 나라에 가있다고 생각하는 거룩한 성도들과 이 시간 공동의 예배를 드린다는 차원에서 예전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