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을 이용하시기 전에 먼저 <검색>을 이용해 보세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검색>을 통해서도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면 이곳을 이용해 보세요.
Articles 517
성경을 읽다보면 개인적으로 당혹감을 느끼는 일화들이 간간이 발견되는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예화도 그 중 하나입니다.
무엇때문에 당혹감을 느끼느냐 하면, 부자의 지옥행이나 나사로의 천국행이 그들의 "믿음" 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 때문이지요. 물론, 예수께서 그 당시 자신의 설교를 듣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예화를 드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 구원론과는 사실상 거리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이 비유는 누가복음 6장 20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부요한 자들은 화가 있다) 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가난한 자"를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 라고 교묘하게 변형시키고는 합니다만,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와 비교해볼때 예수께서는 정말로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고 부자들에게는 화가 있다는 선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예수의 본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모든 율법을 성실하게 잘 지켰는데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 너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일화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닌가요? 이 일화 역시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그 청년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했지만 믿음을 가졌더라면 구원받았을 것이다..라는 이상한 설명을 하는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다면 자신의 재물을 안 팔고 안 나누어 줬어도 구원받았을 것이라는 뜻인지??
이 청년이 실망해서 떠나고 난 뒤에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가는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렇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 고 하신 말씀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부자도 믿음만 가지면 천국가게 하실 수 있다" 라는 뜻으로 설교를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부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재물을 다 처분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안도감을 주는 결론을 이끌어 내던데, 이것이야말로 말씀의 본뜻을 왜곡하는 행태가 아닌가요? 언제 예수께서 부자들에게 믿기만 하면 천국간다고 하셨던가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가 남긴 서신에서도 역시 똑같은 주제가 반복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예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 이 모든 일화들을 종합해볼때 예수께서 주장하신 것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희생하고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열매를 원하셨지, 오늘날의 "4영리 전도" 같은 그런 엑기스 전도(?)를 통한 "믿음" 을 원하셨던 것은 아니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부자들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가난한 나사로가 구원받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현세에서 고통받고 괴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과연 천국에서 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이 예화에서는 나사로가 선행을 했다거나 마음이 착했다거나 혹은 하나님을 믿었다거나 이런 말이 하나도 없지요... 물론, 나사로가 이 예화의 핵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생략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다른 선포 -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 - 는 도대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의 메세지를 액면 그대로 적용해야 할까요? 기존의 보수교회에서 말하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의미한다는 식의 해석은 더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민중신학적 해석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드는것이...
다비안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PS) 이것은 또 다른 의문점인데, 부자와 나사로의 예화가 너무나 유대적인 냄새가 강하고 앞뒤 문맥과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기 때문에 혹시나 이 예화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가 이스라엘 사회에 잘 알려져 있던 이야기를 성경에 삽입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시는 분 있으시면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
무엇때문에 당혹감을 느끼느냐 하면, 부자의 지옥행이나 나사로의 천국행이 그들의 "믿음" 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 때문이지요. 물론, 예수께서 그 당시 자신의 설교를 듣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예화를 드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 구원론과는 사실상 거리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이 비유는 누가복음 6장 20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부요한 자들은 화가 있다) 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가난한 자"를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 라고 교묘하게 변형시키고는 합니다만,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와 비교해볼때 예수께서는 정말로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고 부자들에게는 화가 있다는 선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예수의 본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모든 율법을 성실하게 잘 지켰는데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 너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일화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닌가요? 이 일화 역시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그 청년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했지만 믿음을 가졌더라면 구원받았을 것이다..라는 이상한 설명을 하는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다면 자신의 재물을 안 팔고 안 나누어 줬어도 구원받았을 것이라는 뜻인지??
이 청년이 실망해서 떠나고 난 뒤에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가는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렇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 고 하신 말씀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부자도 믿음만 가지면 천국가게 하실 수 있다" 라는 뜻으로 설교를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부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재물을 다 처분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안도감을 주는 결론을 이끌어 내던데, 이것이야말로 말씀의 본뜻을 왜곡하는 행태가 아닌가요? 언제 예수께서 부자들에게 믿기만 하면 천국간다고 하셨던가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가 남긴 서신에서도 역시 똑같은 주제가 반복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예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 이 모든 일화들을 종합해볼때 예수께서 주장하신 것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희생하고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열매를 원하셨지, 오늘날의 "4영리 전도" 같은 그런 엑기스 전도(?)를 통한 "믿음" 을 원하셨던 것은 아니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부자들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가난한 나사로가 구원받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현세에서 고통받고 괴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과연 천국에서 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이 예화에서는 나사로가 선행을 했다거나 마음이 착했다거나 혹은 하나님을 믿었다거나 이런 말이 하나도 없지요... 물론, 나사로가 이 예화의 핵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생략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다른 선포 -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 - 는 도대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의 메세지를 액면 그대로 적용해야 할까요? 기존의 보수교회에서 말하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의미한다는 식의 해석은 더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민중신학적 해석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드는것이...
다비안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PS) 이것은 또 다른 의문점인데, 부자와 나사로의 예화가 너무나 유대적인 냄새가 강하고 앞뒤 문맥과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기 때문에 혹시나 이 예화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가 이스라엘 사회에 잘 알려져 있던 이야기를 성경에 삽입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시는 분 있으시면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
2008.03.18 13:51:09
저도 닥터케이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져본 일이 있습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는 현재의 기독교 교리적인 이야기가 전혀 없고 당시의 유대적인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는 점... 그래서 그 비유를 현대 기독교 교리와 일대일 대응으로 끼워 맞출 수가 없다는 점...
2008.03.19 20:04:13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60년대)를 살아 오면서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그래 이게 복이란 말인가?" 하고 투정을 많이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가난"이란것이 개인의 능력 차이라기 보다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조악"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난"과 "부함" 의 극심한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함"이란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하지 못한(의로운 것이 아닌)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청부론 이란 합리화도 있습니다만...) 그래서 나사로와 부자의 차이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가난"에 하늘의 복마저 없다면 ...생각만해도 섬뜩 합니다. 어느 세계인의 행복지수 조사에서 "방글라데시"가 1위였다는것이 많은 시사를 해 주는 것 같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은 "복"을 받은 삶이 아니겟지요...그리고 예수께서는 문자 그대로의 "가난"을 말씀 하셧는데 후대에 오면서 점점 순화 되어서 이른바 "영적"인 의미로 해석 되었다고 하는 이론이 설득력이 있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한자들을 위해서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자'' 로 순화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이 가난" 하면 결코 "부함"을 가질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프란시스코 처럼 말입니다. 마음이 안 가난 했으면 성프란시스코도 부함으로 살면서 교회생활을 즐겼(?)을 것입니다
2008.03.20 14:34:02
눈사랑님! 반갑습니다.
그렇군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군요.
그런데 님이 말씀하시는 그 구원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참 궁금하군요.
대체 무얼 믿어야 믿음이라고 생각하시기에 위의 비유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논리적 비약이나 확신을 끌어내실 수 있는지 하여간 대단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전의 일이니 예수가 하나님이라 불리기도 전이고,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이니 구세주인 것을 믿기도 전이고 대체 뭘 믿었기에 나사로는 구원을 얻어 천국가고 부자는 무얼 못믿어서 지옥에 갔나요?
그 부자청년은 대체 무얼 안믿어서...
하여간 그렇게 믿고 사실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맘문을 열어두고 성서의 세계를 받아들이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군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군요.
그런데 님이 말씀하시는 그 구원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참 궁금하군요.
대체 무얼 믿어야 믿음이라고 생각하시기에 위의 비유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논리적 비약이나 확신을 끌어내실 수 있는지 하여간 대단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전의 일이니 예수가 하나님이라 불리기도 전이고,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이니 구세주인 것을 믿기도 전이고 대체 뭘 믿었기에 나사로는 구원을 얻어 천국가고 부자는 무얼 못믿어서 지옥에 갔나요?
그 부자청년은 대체 무얼 안믿어서...
하여간 그렇게 믿고 사실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맘문을 열어두고 성서의 세계를 받아들이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8.03.20 15:57:01
하나님을 향해 열어놓으신 그 맘문이 참 귀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해 주시는지요? 저의 경우에는 조용한 기도 중에 깨달음으로, 또는 다른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또는 성서를 통해서, 또는 신앙서적이나 기타서적을 통해서, 또는 자연을 통해서, 또는 사건을 통해서...
제가 구원을 믿는지 안믿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당연히 저야 구원을 믿는다고 말하지요.) 저의 질문이 무엇이냐하면 님이 말씀하시는 그 구원을 대체 무엇이라 생각하기에 위 꼭지글의 비유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어떤 구절이 보편적 진리로 작용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떤 특수한 상황 속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기록해 둔 것이기에 그 상황으로 들어가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얻는다"라는 보편적 진리를 아무상황이나 가져다 붙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위 꼭지글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를 믿고 천국갔니, 안믿어서 못갔니를 말하는게 아니라 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이 기록을 성서에 남겨 둔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바로 성서를 열린 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제가 말한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대체 무얼 안믿어서 재물을 섬기느라 구원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그것을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눈사랑님에게 물어본 것은 예수믿고 구원얻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위 꼭지글에서 말하는 비유에서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를 물어 본 것인데, 도리어 나더러 믿음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면 무엇으로 구원얻느냐고 물으신다면 저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해 주시는지요? 저의 경우에는 조용한 기도 중에 깨달음으로, 또는 다른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또는 성서를 통해서, 또는 신앙서적이나 기타서적을 통해서, 또는 자연을 통해서, 또는 사건을 통해서...
제가 구원을 믿는지 안믿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당연히 저야 구원을 믿는다고 말하지요.) 저의 질문이 무엇이냐하면 님이 말씀하시는 그 구원을 대체 무엇이라 생각하기에 위 꼭지글의 비유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어떤 구절이 보편적 진리로 작용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떤 특수한 상황 속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기록해 둔 것이기에 그 상황으로 들어가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얻는다"라는 보편적 진리를 아무상황이나 가져다 붙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위 꼭지글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를 믿고 천국갔니, 안믿어서 못갔니를 말하는게 아니라 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이 기록을 성서에 남겨 둔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바로 성서를 열린 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제가 말한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대체 무얼 안믿어서 재물을 섬기느라 구원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그것을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눈사랑님에게 물어본 것은 예수믿고 구원얻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위 꼭지글에서 말하는 비유에서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를 물어 본 것인데, 도리어 나더러 믿음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면 무엇으로 구원얻느냐고 물으신다면 저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지요.
2008.03.20 17:03:02
‘그 아이들의 부모가 믿음이 부족하다거나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말을 했던 그 눈사랑님이 맞나요? ㅋㅋ
뭘 도와달라는 거죠?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보편적 진리(?)를 알고 있고,
성경전체의 흐름(?) 속에서 한 구절을 보아야 함도 알고,
...... 이번에도 낚시질인가요? ^^;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말을 했던 그 눈사랑님이 맞나요? ㅋㅋ
뭘 도와달라는 거죠?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보편적 진리(?)를 알고 있고,
성경전체의 흐름(?) 속에서 한 구절을 보아야 함도 알고,
...... 이번에도 낚시질인가요? ^^;
2008.03.20 18:12:53
아이구,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냥 한 마디는 하고 지나가야겠네요.
눈사랑 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스타일로 말도 하고
글도 쓰고 한답니다.
위에서 늘오늘 님의 '낚시질' 운운은 그분의 스타일이에요.
물론 서로 모르는 가운데 그런 표현을 쓰면
오해하기 딱이긴 하답니다.
그런 건 늘오늘 님이 조심해야 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더라구요.
제가 보기에 눈사랑 님은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이십니다.
그건 참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다만 그 순수한 부분이 간혹 오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약간 염두에 두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그래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삶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되거든요.
다비아 사이트를 편안하게 생각하시구,
좋은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한 마디는 하고 지나가야겠네요.
눈사랑 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스타일로 말도 하고
글도 쓰고 한답니다.
위에서 늘오늘 님의 '낚시질' 운운은 그분의 스타일이에요.
물론 서로 모르는 가운데 그런 표현을 쓰면
오해하기 딱이긴 하답니다.
그런 건 늘오늘 님이 조심해야 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더라구요.
제가 보기에 눈사랑 님은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이십니다.
그건 참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다만 그 순수한 부분이 간혹 오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약간 염두에 두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그래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삶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되거든요.
다비아 사이트를 편안하게 생각하시구,
좋은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2008.03.20 18:17:46
닥터 케이 님,
나사로 부자 이야기는
제가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한 글에서 설명한 것인데요.
그건 실제 사건이 아니라 '비유'랍니다.
잃은 양의 비유, 포도원 주인의 비유처럼 말이지요.
비유는 비유로 읽어야지 실증으로 읽으면 곤란하지요.
유대적인 냄세가 난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두 유대인이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기독교는 유대교를 뿌리고 하고 있답니다.
좋은 봄날이군요.
나사로 부자 이야기는
제가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한 글에서 설명한 것인데요.
그건 실제 사건이 아니라 '비유'랍니다.
잃은 양의 비유, 포도원 주인의 비유처럼 말이지요.
비유는 비유로 읽어야지 실증으로 읽으면 곤란하지요.
유대적인 냄세가 난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두 유대인이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기독교는 유대교를 뿌리고 하고 있답니다.
좋은 봄날이군요.
2008.03.22 13:59:00
순수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렸을 때 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아버지의 비판적 자세 덕분(?)에 비판만을 배웠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았었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20대 초반에 교회를 그만 뒀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버릴 하나님이 없었거든요.
40대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체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뻐속 깊이 박혀있는 비판적 사고 방식때문에 힘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설교나 교회의 하는 일에 온전한 순종을 하지 아니하고 비판적 수용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지 목사님이나 교회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제 생각이 움직여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정말로 순수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순수한 믿음을 갖기 위해 기웃거리다가 이곳을 보았습니다.
비판적인 목사님의 글들도 읽었습니다.
긍정적인 비판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 소망하는 것은 긍정적인 비판과 순종을 잘 버무려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드시기에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도움 바랍니다.
어렸을 때 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아버지의 비판적 자세 덕분(?)에 비판만을 배웠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았었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20대 초반에 교회를 그만 뒀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버릴 하나님이 없었거든요.
40대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체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뻐속 깊이 박혀있는 비판적 사고 방식때문에 힘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설교나 교회의 하는 일에 온전한 순종을 하지 아니하고 비판적 수용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지 목사님이나 교회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제 생각이 움직여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정말로 순수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순수한 믿음을 갖기 위해 기웃거리다가 이곳을 보았습니다.
비판적인 목사님의 글들도 읽었습니다.
긍정적인 비판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 소망하는 것은 긍정적인 비판과 순종을 잘 버무려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드시기에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도움 바랍니다.
2008.03.21 13:21:08
성서에는 "비둘기처럼 순수하라" 고만 하지 않고 "뱀처럼 지혜로와라" 고도 하죠... 제대로 잘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지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2008.03.22 01:31:16
이미 찾아보셨을 지도 모르겠지만 참고 삼아 말씀드리면, 예수 세미나 그룹이 펴낸 "The Five Gospels"에서는 눅16:19-25 는 회색, 16:27-31은 검정색으로 결과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회색은 이 말씀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데에, 50% 이하의 세미나 구성원들만 찬성했다는 의미구요, 검정색은 25%이하의 구성원만 찬성한 결과라고 하네요. 이유로는 1)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다음 세상에서 상황이 역전되는 이야기는 고대 근동에서 흔히 알려져 있던 이야기라는 점; 2) 다른 예화에서 등장 인물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한 번도 없다는 점; 3)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누가 복음 저자의 특징 ("especially characteristic emphasis in Luke") 이라는 점; 등이 나와 있습니다.
2008.03.22 09:36:09
눈사랑님, 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생략하겠습니다.
저 이외에도 많은 글을 통해서 이미 말하였거나 씌여있으니 충분히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님의 글에 댓글을 그렇게 달았던 이유는 꼭지글과는 동떨어져서 마치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또는 타이르는 듯한 자세로 덤벼들었기에 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러시나하고 물어 본 것입니다.
님께서는 우매하고,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자신을 낮추는 듯 하시면서도 오히려 싸우자고 덤벼듭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도 다비아에서 시비거실 분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님의 글솜씨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할 것도 없습니다.(제가 워낙 솜씨가 부족한 사람이라...)
다만, 첫 댓글에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사람의 믿음을 함부로 재단하신다거나 님이 스스로 잘 모른다고 하면서 오히려 조금 알고 있다는 그것이 다 아는 것인양 가르치려드시는 것을 제가 좀 꼬아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여간 제가 답을 하긴 저도 모르는 것이 많으니 같이 답을 찾아갑시다.
주의 평안이 님에게...샬롬~
저 이외에도 많은 글을 통해서 이미 말하였거나 씌여있으니 충분히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님의 글에 댓글을 그렇게 달았던 이유는 꼭지글과는 동떨어져서 마치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또는 타이르는 듯한 자세로 덤벼들었기에 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러시나하고 물어 본 것입니다.
님께서는 우매하고,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자신을 낮추는 듯 하시면서도 오히려 싸우자고 덤벼듭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도 다비아에서 시비거실 분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님의 글솜씨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할 것도 없습니다.(제가 워낙 솜씨가 부족한 사람이라...)
다만, 첫 댓글에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사람의 믿음을 함부로 재단하신다거나 님이 스스로 잘 모른다고 하면서 오히려 조금 알고 있다는 그것이 다 아는 것인양 가르치려드시는 것을 제가 좀 꼬아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여간 제가 답을 하긴 저도 모르는 것이 많으니 같이 답을 찾아갑시다.
주의 평안이 님에게...샬롬~
2008.03.22 11:43:36
앗, 이틀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렇게 많은 댓글들이...(^^;).
눈사랑님: 답글 감사합니다. 그러나, 눈사랑님의 해석은 제가 가장 우려하는 고식적인 해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십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는 "무엇으로" 구원받았는가를 도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냥 부자는 지옥에, 거지는 천국에 갔다는게 전부거든요.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 예수님 본인의 말씀인가 아니면 전승을 그대로 인용하신건가, 그도 저도 아니면 후대에 삽입된 것인가 하는게 첫째였고, 둘째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실천하는 행동을 필요로 했던 과거의 믿음과는 동떨어진게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부자청년의 일화를 재미있게 해석해주셨는데, 결국 예수님의 요구 (네 재산 다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야말로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오늘날의 교회는 이 기준을 성경속의 부자청년에게만 적용하고 신자들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하신것과 똑같은 말을 요즘 교회에 등록하고자 하는 새신자들에게 요구하면 그들중에서 몇명이나 교인이 될까요? 아니, 지금 현재 교회내에서 믿음 좋고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에게 똑같은 요구를 하면 그 부자청년보다 나은 행동을 보여들 주실까요?? 결국, 자기희생은 없이 "믿음만으로" 구원받고 내 재산은 내가 지키고...덧붙여서 하나님께 "복받아" 있는 재산 더 불리고 덤으로 권력도 잡아보고... 이게 요즘 교회다니는 신자들의 진정한 속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용섭 목사님: 저도 이 예화가 비유일 뿐이라는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비유로 안보고 자꾸 "교리"를 도출해내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특히 주일학교) 질문을 올렸던 것이지요...
빈이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제가 알고 싶었던 것들중 하나를 명쾌히 가르쳐 주셨군요.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게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
제가 위의 예화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지는 생각은 (1) 예수께서는 구원론을 설파하고자 하신게 아니라 지금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무시하는 부유한 자들에게 경고를 줌으로써 실제적인 나눔의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2) 첫번째가 아니라면 초대교회에서 제자들에 의해 동일한 목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성경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3) 1번이든 2번이든 원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는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보다 실천하는 "행동"을 우선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재산을 모두 팔아 공유하였던 사실, 자기 재산을 숨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을 맞이했던 일 등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말로만 예수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초대교회 신자로 등록(?)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점차 유대교의 일파가 아닌 "기독교"로서 체계적으로 종교화 되어 가면서 신비주의적인 구원론이 덧붙여지고 발전되면서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 "천국은 너희중에 있다" 고 하신 그 천국이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변질되어 버린것은 아닌지? 또한, 이러한 구원론의 발전의 이면에는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의 입맛에 맞게 외적인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내면의 신앙고백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초대교회와는 다르게 변조되어 버린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꼭지글 질문을 올렸던 가장 핵심적인 의문사항은 바로 마지막 (3)번 항목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답글을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눈사랑님: 답글 감사합니다. 그러나, 눈사랑님의 해석은 제가 가장 우려하는 고식적인 해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십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는 "무엇으로" 구원받았는가를 도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냥 부자는 지옥에, 거지는 천국에 갔다는게 전부거든요.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 예수님 본인의 말씀인가 아니면 전승을 그대로 인용하신건가, 그도 저도 아니면 후대에 삽입된 것인가 하는게 첫째였고, 둘째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실천하는 행동을 필요로 했던 과거의 믿음과는 동떨어진게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부자청년의 일화를 재미있게 해석해주셨는데, 결국 예수님의 요구 (네 재산 다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야말로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오늘날의 교회는 이 기준을 성경속의 부자청년에게만 적용하고 신자들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하신것과 똑같은 말을 요즘 교회에 등록하고자 하는 새신자들에게 요구하면 그들중에서 몇명이나 교인이 될까요? 아니, 지금 현재 교회내에서 믿음 좋고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에게 똑같은 요구를 하면 그 부자청년보다 나은 행동을 보여들 주실까요?? 결국, 자기희생은 없이 "믿음만으로" 구원받고 내 재산은 내가 지키고...덧붙여서 하나님께 "복받아" 있는 재산 더 불리고 덤으로 권력도 잡아보고... 이게 요즘 교회다니는 신자들의 진정한 속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용섭 목사님: 저도 이 예화가 비유일 뿐이라는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비유로 안보고 자꾸 "교리"를 도출해내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특히 주일학교) 질문을 올렸던 것이지요...
빈이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제가 알고 싶었던 것들중 하나를 명쾌히 가르쳐 주셨군요.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게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
제가 위의 예화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지는 생각은 (1) 예수께서는 구원론을 설파하고자 하신게 아니라 지금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무시하는 부유한 자들에게 경고를 줌으로써 실제적인 나눔의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2) 첫번째가 아니라면 초대교회에서 제자들에 의해 동일한 목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성경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3) 1번이든 2번이든 원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는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보다 실천하는 "행동"을 우선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재산을 모두 팔아 공유하였던 사실, 자기 재산을 숨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을 맞이했던 일 등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말로만 예수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초대교회 신자로 등록(?)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점차 유대교의 일파가 아닌 "기독교"로서 체계적으로 종교화 되어 가면서 신비주의적인 구원론이 덧붙여지고 발전되면서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 "천국은 너희중에 있다" 고 하신 그 천국이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변질되어 버린것은 아닌지? 또한, 이러한 구원론의 발전의 이면에는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의 입맛에 맞게 외적인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내면의 신앙고백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초대교회와는 다르게 변조되어 버린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꼭지글 질문을 올렸던 가장 핵심적인 의문사항은 바로 마지막 (3)번 항목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답글을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2008.03.22 11:17:04
눈사랑님 같은 의견 개진도 자유로이 할 수있는 다비아 문화가 형성 되었으면 합니다.누구나 다 배워가는 과정이고 한국 같은 보수적인 풍토에서는 ...그리고 문자로 하는 토론에는 특별히 예의에 신경써야 할 것 같습니다
2008.03.22 14:08:38
우선 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성경책 외에 신학과 관련된 책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포함하여 겨우 대여섯권 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식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으실 것입니다. 제가 적은 내용들은 성경 읽고 신앙의 선배들과 목사님들로 부터 듣고 배운 것에서 형성된 것들입니다. 제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를 떠나 많은 신앙의 선배님들의 생각을 듣고 배우고 싶은 것이 이 곳에 가입한 동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엄청난 잘못을 한 사람처럼 느껴지네요. 이유인즉 제가 댓글을 단 것을 읽어보니 글투가 잘못된 것을 느낍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배우려는 자가 가르치는 것처럼 느껴지게 썼다는 것은 저의 의도야 어찌되었건 누구나 기분 나쁘게 느꼈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적은 글을 지우겠습니다. 제가 왠지 이방인 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또한 저의 잘못된 글때문임을 자각하고 조심하겠습니다.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결코 싸우자고 달려든 적 없습니다. 왜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곳에 들어올 때 제가 잘났다고 자랑하러 들어온 것이 아닌데요. 그렇게 느끼시게 한 것도 제 잘못입니다. 전 쌈도 잘 못합니다. 덤빌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제 마음을 변명해야 할 것 같아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느끼고 알고 있는 것을 적는다는 것이 마치 무식한 선생처럼 해버려서 많은 분들의 마음을 어지럽혀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2008.03.22 14:51:47
제가 보기에 눈사랑 님의 글에는
남을 가르치려는 흔적이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전하는 글과
계몽을 직접 목적으로 하는 글과는 분명히 다른 거지요.
눈사랑 님은 전자에 속합니다.
눈사랑 님,
걱정하지 마세요.
다비아에 가끔 잘난척하는 사이비 논객들이 드나들은 전력이 있어서
몇몇 분들이 염려한 것 뿐이랍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왕 올린 글은 그대로 두는 게 좋답니다.
그것도 모두 자기자신의 실제 모습이거든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사는 게 최선이에요.
남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그게 오해인지 아닌지는 불문하고,
그것 마저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거지요.
그리고 가능하면 다비아에 있는 꼭지글들을 시간이 나는대로
천천히 읽어보세요.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들도 있을 겁니다.
눈사랑 님은 기독교 신앙이 단지 맹목적인 믿음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신학적 '사유'와 더불어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상대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걸 당장 해결할 생각을 마시고,
천천히 진도를 나가보세요.
편안한 마음으로요.
남을 가르치려는 흔적이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전하는 글과
계몽을 직접 목적으로 하는 글과는 분명히 다른 거지요.
눈사랑 님은 전자에 속합니다.
눈사랑 님,
걱정하지 마세요.
다비아에 가끔 잘난척하는 사이비 논객들이 드나들은 전력이 있어서
몇몇 분들이 염려한 것 뿐이랍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왕 올린 글은 그대로 두는 게 좋답니다.
그것도 모두 자기자신의 실제 모습이거든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사는 게 최선이에요.
남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그게 오해인지 아닌지는 불문하고,
그것 마저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거지요.
그리고 가능하면 다비아에 있는 꼭지글들을 시간이 나는대로
천천히 읽어보세요.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들도 있을 겁니다.
눈사랑 님은 기독교 신앙이 단지 맹목적인 믿음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신학적 '사유'와 더불어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상대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걸 당장 해결할 생각을 마시고,
천천히 진도를 나가보세요.
편안한 마음으로요.
2008.03.22 15:53:03
눈사랑님이 글을 지우실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눈사랑님의 의견이야말로 현재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교인들의 가장 보편적인 생각을 요약해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좋은 토론의 근거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군요... 토론이라는게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깔아뭉개고자 하는게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자신도 배우고 다른 사람도 발전하게 만들고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사랑님도 필요없이 주눅들지 마시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하세요. 틀리면 틀린대로, 맞으면 맞는대로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발전하는게 있지 않겠습니까?
눈사랑님의 의견이야말로 현재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교인들의 가장 보편적인 생각을 요약해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좋은 토론의 근거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군요... 토론이라는게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깔아뭉개고자 하는게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자신도 배우고 다른 사람도 발전하게 만들고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사랑님도 필요없이 주눅들지 마시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하세요. 틀리면 틀린대로, 맞으면 맞는대로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발전하는게 있지 않겠습니까?
2008.03.22 20:02:51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을 잊어버린 듯 합니다.
눈사랑님!
너무 저자세로 돌아서지 마세요.
정목사님이 보신 시각이 아마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리 주눅 들 필요도 없고,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님께서 위 댓글 정도의 내공이면 이미 충분합니다.
님의 생각을 깔아뭉갤 의도도 없고,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라고 불리우는 것을 무시할 의도도 전혀 없습니다.
님께서 글쓰기가 서툴러서 그렇다고 하셨지만, 정목사님은 저 같은 사람이 잘못봤다고 하니 아마 그럴 것입니다.
다만 한마디 덧붙인다면 자신의 지금의 생각을 말할 수는 있지만 의문을 가지고 계시는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꼭지글에 올라 있습니다.
정목사님 말씀대로 차분히 한 꼭지 한 꼭지 읽어보시는 것이 많은 유익을 가져 올 것입니다.
모쪼록 너무 상처받지 마시고, 주님안에서 평안하십시오.
샬롬!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을 잊어버린 듯 합니다.
눈사랑님!
너무 저자세로 돌아서지 마세요.
정목사님이 보신 시각이 아마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리 주눅 들 필요도 없고,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님께서 위 댓글 정도의 내공이면 이미 충분합니다.
님의 생각을 깔아뭉갤 의도도 없고,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라고 불리우는 것을 무시할 의도도 전혀 없습니다.
님께서 글쓰기가 서툴러서 그렇다고 하셨지만, 정목사님은 저 같은 사람이 잘못봤다고 하니 아마 그럴 것입니다.
다만 한마디 덧붙인다면 자신의 지금의 생각을 말할 수는 있지만 의문을 가지고 계시는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꼭지글에 올라 있습니다.
정목사님 말씀대로 차분히 한 꼭지 한 꼭지 읽어보시는 것이 많은 유익을 가져 올 것입니다.
모쪼록 너무 상처받지 마시고, 주님안에서 평안하십시오.
샬롬!
2008.03.22 21:40:28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아래에 좀 더 첨가하겠습니다.
"문학작품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비유를 역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여러 면에서 실제 인생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이야기를 생생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세부적인 내용을 예수께서 추가하셨을 것이다.
예수의 비유 중 잘못 해석된 것 중 하나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다(눅 16:19-31).
이 이야기는 사후세계를 매우 실제적으로 자세히 묘사해 주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 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고 둘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는데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식의 묘사는 유대와 이집트의 유명한 민화에도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잘 알려진 내용을 가져와서는 이를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적용하여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부자들에게 경고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27절-31절은 민화에 나오지 않는다)
누가가 이 단락을 ‘비유’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비유가 아니라는 주장은 양식비평에 의해 결정적으로 반박된다. 복음서 야야기 중 일반적으로 비유로 분류되는 것의 절반 정도에 비유라는 명칭이 붙어 있지 않지만 비유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단락과 동일한 형식과 구조 때문에 비유로 분류된다.
누가복음 ‘16:19-31’의 경우 도입부분에 중요한 단서가 제시되고 있다.
이 비유는 ‘한 부자’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이전에 탕자비유(15:11-32)와 불의한 청지기 비유(16:1-13)를 시작하실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형식이며, 요즘 사람들이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로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이 문구를 옛날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여기듯이, 예수의 청중들도 비유의 시작부분에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p60,61) 크레이그 L. 블롬버그, 솔로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