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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등록한 교회인데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하뿐만 아니라 영적갈증은 갈수록 깊어져만갑니다.
저한테 문제가 있을까요?
설교문 읽어보시고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의견 듣고싶습니다.
(2008-6-15)
본문: 요15:5
제목: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오늘 VIP초청 주일을 맞아 이 앞가운데를 VIP석으로 정해두었습니다. 2부예배 때 들어오며 보니까 여럿이 앉아 계시길래 VIP시구나 했는데 앞에 가서보니까 모두 아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김샛죠. 그렇지만 낙심할 건 없습니다. 우리도 한땐 누군가의 VIP였지만 지금은 이 자리에 있잖아요. 언젠가는 우리의 VIP들이 반드시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3부예배엔 낯선 분들이 많으시네요.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기까지 쉽지는 않으셨지요? 망성리기도 하셨지요? 저희들도 여러분을 많이 기다렸고 기도했었습니다. 아무튼 잘오셨습니다.
개인차가있긴 하겠지만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를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이성주의입니다. 이성이나 경험이나 상식으로 볼 때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진화론에 익숙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조론보다는 우주의 모든 것이 우연과 진화에 의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경희대 앞에서 한 청년을 태워주면서 복음을 전했을 때 자신은 빅뱅이론에 관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사실 진화론이란 과학적이지도 않고 증명되지도 않는 가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진리처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믿는 사람들이 싫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인종차별로 인해 많은 불이익과 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있을 때 처음에는 교회를 다녔지만 결국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에 빗장을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죠. 교회에서 상처받고, 교인들로 인해 상처받고 그래서 예수님도 멀리하고 교회도 멀리하죠. 여기계신 우리들 중에도 한두 번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나와있다는 건 하나님의 큰 은총입니다.
세째는 태어날 때부터 집안이 불교이거나 무속신앙의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불공을 드려서 낳았다’ ‘사주팔자가 어떻다더라’ 그래서 걸핏하면 점을 보고 굿을 합니다.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도 글쎄 며느리될 아이 사주를 봤더니 그게 아니래요. 그래서 관습상 예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교회 나오면서도 점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습관이 쉬 고쳐지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빨리 털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속신앙의 핵심은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움직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뜻을 품고 삽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고상해지고 모습이 거룩해져 갑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매사 내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내가 잘 된다고 나와 관계된 것이 잘 된다고 하면 앞뒤 제지 않고 그 길로 갑니다. 철저한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을 보면 표시가 납니다. 심술과 욕심이 가득 서려있습니다.
오래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어요. 어떤 사람이 잘되고 싶어서 점을 보러 갔대요. 점쟁이 하는 말이 조상 묘를 잘 써야 되겠다고 하더래요. 그러면서 증조할아버지 묘자리가 좋은데 그래서 이 묘자리 자식이 잘된거라 하더래요. 이 말을 듣고 그날로 증조할아버지 대신에 그곳에 자기 아버지를 이장했다는 거예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어떤이는 점쟁이가 예수 믿지 말라고 했다고 안 믿고, 며느리 사위도 예수 믿는 사람은 아예 손사래를 쳐요. 그런데 어떤 이는 점쟁이가 예수 믿으라고 했다 해서 교회 나왔다는 분도 있어요.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몇 있습니다. 그 뒤로 점집을 끊었기에 다행이긴 했지만...
넷째는 문화적인 이유로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가 서양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우리의 것을 믿어야지 왜 남의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교도 유교도 우리 것이 아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인류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동,서양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어령씨가 지난주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간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지 얼마되진 않았지만 세례도 받으시고 바쁜 중에서도 신앙생활을 잘하시나 봅니다. 이어령씨에 대해 알만한 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문명, 문화인류학, 문학을 전공하신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의 학문적 배경 때문에 하나님께 일절 관심이 없었습니다. 평생 예수 안 믿을 사람처럼 하시던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나 봅니다. ‘의외다’는 사람도 있고 ‘사람이 별 수 있나?’ 라는 분도 있나 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따님과 손주 때문이었습니다. 손주는 태어나면서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고 미국 변호사인 따님은 아이를 간호하던 중 암을 얻었고 급기야 앞을 못보게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 따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픔을 안아주셨고 가정의 문제를 모두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이어령의 마음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셨고 그 역시 눈물과 감격속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딸과 손주를 고쳐주신 후 이어령선생은 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네가 주님 안에서 평안과 새 생명을 얻었는데 나는 너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이제 같이 동행하자.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게 해주겠니?’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그가 요즘 강연에서 전하는 주제는 ‘문화와 복음’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성에서 영성으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번 목회자모임에서는 포도나무와 열매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는 교회를 포도원이라고 했습디다. 그러면서 시국이 어렵고 사회가 흔들릴수록 포도원의 포도나무가 넝쿨을 넓게 뻗쳐가야 하고 이 일에 목사님들의 절대적인 수고가 있어야 할 것 이라고 했답니다.
맞아요. 이세상 모든 크리스천 공동체는 하나님의 포도원이죠. 물론 교회도 포도원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모두 포도원집 사람들이고요. 물론 아직은 자신이 포도원집 아들, 딸인걸 실감하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포도원에 종종 놀러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다니러 오신 분도 계실 것이고 탐색하러 오신 분도 계시겠죠? 또한 오늘처럼 정식으로 포도원집 사람들의 초청을 받고 VIP로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아무튼 오셨으니 여러분 모두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도 만나시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만나시고 그리고 그분의 양아들 양딸인 우리들과 사귀셔서 명선포도원과 친해졌으면 합니다.
한 열흘 전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의 올케되신 분이 저를 방문했었습니다. 그 올케는 최근 위암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는데 의사들이 수술을 시작했지만 막상 가슴을 열어보고는 수술이 불가능 해서 그냥 닫아버린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측은했는지 모릅니다. 자매님은 절망속에서 시누이의 권유로 교회로 온 것입니다. 병원에 있던 며칠동안 집사님은 올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했고 자매님의 마음엔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날 저는 자매에게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말씀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몸이 죽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사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매님의 포도나무시다. 뿌리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께 모든 것 내려놓고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날 자매님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남편과 함께 시골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자매가 제 방을 나설 때 나는 그녀에게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상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께서 자매님을 위해 해주신 일을 기억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주 ‘나는 oo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외엔.
사람들은 석가모니를 진리나 인생의 길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경전인 ‘나마다경 38-8’에 이런 글이 있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何時爺蘇來 吾道無油之登也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없는 등과 같다)
이처럼 석가모니도 예수님을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오직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15:1)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참’, 이는 거짓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참’이라는 표현이 스물한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에는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차별화하셔서 포도나무이되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살아있는 참 좋은 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신 것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 말씀에는 많은 사실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포도나무요, 우리를 가지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가지인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뿌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나는 너의 뿌리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뿌리이십니다. 나의 뿌리이십니다. 내 인생의 근본이십니다.
우리가 이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뿌리없는 가지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뿌리에서 짤려진 꽃과 나무가 쓸모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장식품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시들고 말라버리고 맙니다. 아름다움과 싱싱함은 잠깐일 뿐 그건 이미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격, 재산, 명예, 학문, 건강, 부귀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출세를 못해도 괜찮아요. 공부를 못해도 괜찮아요.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어도 괜찮아요. 과거가 어쨌던 상관없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인 이것이 흔들려 버리면 그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보여도 그것은 꽃병의 꽃과 같은 인생일 뿐이죠.
그러나 인생이 뿌리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되고 그분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엄청난 자원이자 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얘기는 잘되고 못되고의 얘기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먼저 생명이 있고야 잘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쓴「잘되는 나」라는 책에 대해서 몇주전 언급한 바 있습니다. 혹 그 책을 보면서 ‘일단 잘되고 보자’ ‘인생에 있어서 잘 되는 것이 장땡이다’고 생각하고 다만 잘되는 요령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낭패를 볼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생명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잘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하나 물어봅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 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짜로 잘되는 것은 예수님과 생명에서 생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뿌리가 되고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뿌리가 되시고 나는 예수님의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우선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잘되는 길이요 세상의 모든 잘됨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시덥잖게 생각하심.
그리고 영혼이 잘되고 난 사람에겐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사를 잘되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과 생명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을 인생의 뿌리로 알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죠?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안에 있으면 범사가 잘 됩니다. 원리상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 사용권과 기도사용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의 얘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기독교역사에도 많이 있고 우리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인도하는 확신반이 이번주면 다 끝납니다. 20주가 넘게 큰 감동속에 보낸 날들이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써낸 간증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한번 감격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삶, 그리고 확신,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용기와 담대함과 소망등등 간증문을 읽으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소유의 여부를 불문하고 이미 잘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될 사람들입니다. 대대손손 잘될 가문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잘 되려면 일단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잘 되어야 축복을 쏟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잘난체 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그리고 내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내 노력으로 뼈빠지게 해서 번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된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가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나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손안에서 겸손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참 포도나무시요 나의 뿌리시요 나는 그분의 가지입니다. 결코 이를 잊지 마십시오. 산술로 되는 것 아니다. 우리는 특면한 사람.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이 말씀에 근거하여 늘 하나님 앞에서 배짱있는 주장을 합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제 포도나무요 뿌리이신 예수님, 저는 주님의 가지입니다. 제가 이제 이 일을 하려합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설교하러 올라올 때도, 강단에 설 때까지 간구하는 제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은 저의 포도나무이시며 저는 가지입니다’ 좀 전에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저한테 문제가 있을까요?
설교문 읽어보시고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의견 듣고싶습니다.
(2008-6-15)
본문: 요15:5
제목: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오늘 VIP초청 주일을 맞아 이 앞가운데를 VIP석으로 정해두었습니다. 2부예배 때 들어오며 보니까 여럿이 앉아 계시길래 VIP시구나 했는데 앞에 가서보니까 모두 아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김샛죠. 그렇지만 낙심할 건 없습니다. 우리도 한땐 누군가의 VIP였지만 지금은 이 자리에 있잖아요. 언젠가는 우리의 VIP들이 반드시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3부예배엔 낯선 분들이 많으시네요.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기까지 쉽지는 않으셨지요? 망성리기도 하셨지요? 저희들도 여러분을 많이 기다렸고 기도했었습니다. 아무튼 잘오셨습니다.
개인차가있긴 하겠지만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를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이성주의입니다. 이성이나 경험이나 상식으로 볼 때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진화론에 익숙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조론보다는 우주의 모든 것이 우연과 진화에 의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경희대 앞에서 한 청년을 태워주면서 복음을 전했을 때 자신은 빅뱅이론에 관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사실 진화론이란 과학적이지도 않고 증명되지도 않는 가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진리처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믿는 사람들이 싫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인종차별로 인해 많은 불이익과 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있을 때 처음에는 교회를 다녔지만 결국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에 빗장을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죠. 교회에서 상처받고, 교인들로 인해 상처받고 그래서 예수님도 멀리하고 교회도 멀리하죠. 여기계신 우리들 중에도 한두 번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나와있다는 건 하나님의 큰 은총입니다.
세째는 태어날 때부터 집안이 불교이거나 무속신앙의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불공을 드려서 낳았다’ ‘사주팔자가 어떻다더라’ 그래서 걸핏하면 점을 보고 굿을 합니다.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도 글쎄 며느리될 아이 사주를 봤더니 그게 아니래요. 그래서 관습상 예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교회 나오면서도 점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습관이 쉬 고쳐지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빨리 털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속신앙의 핵심은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움직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뜻을 품고 삽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고상해지고 모습이 거룩해져 갑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매사 내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내가 잘 된다고 나와 관계된 것이 잘 된다고 하면 앞뒤 제지 않고 그 길로 갑니다. 철저한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을 보면 표시가 납니다. 심술과 욕심이 가득 서려있습니다.
오래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어요. 어떤 사람이 잘되고 싶어서 점을 보러 갔대요. 점쟁이 하는 말이 조상 묘를 잘 써야 되겠다고 하더래요. 그러면서 증조할아버지 묘자리가 좋은데 그래서 이 묘자리 자식이 잘된거라 하더래요. 이 말을 듣고 그날로 증조할아버지 대신에 그곳에 자기 아버지를 이장했다는 거예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어떤이는 점쟁이가 예수 믿지 말라고 했다고 안 믿고, 며느리 사위도 예수 믿는 사람은 아예 손사래를 쳐요. 그런데 어떤 이는 점쟁이가 예수 믿으라고 했다 해서 교회 나왔다는 분도 있어요.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몇 있습니다. 그 뒤로 점집을 끊었기에 다행이긴 했지만...
넷째는 문화적인 이유로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가 서양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우리의 것을 믿어야지 왜 남의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교도 유교도 우리 것이 아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인류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동,서양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어령씨가 지난주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간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지 얼마되진 않았지만 세례도 받으시고 바쁜 중에서도 신앙생활을 잘하시나 봅니다. 이어령씨에 대해 알만한 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문명, 문화인류학, 문학을 전공하신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의 학문적 배경 때문에 하나님께 일절 관심이 없었습니다. 평생 예수 안 믿을 사람처럼 하시던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나 봅니다. ‘의외다’는 사람도 있고 ‘사람이 별 수 있나?’ 라는 분도 있나 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따님과 손주 때문이었습니다. 손주는 태어나면서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고 미국 변호사인 따님은 아이를 간호하던 중 암을 얻었고 급기야 앞을 못보게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 따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픔을 안아주셨고 가정의 문제를 모두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이어령의 마음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셨고 그 역시 눈물과 감격속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딸과 손주를 고쳐주신 후 이어령선생은 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네가 주님 안에서 평안과 새 생명을 얻었는데 나는 너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이제 같이 동행하자.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게 해주겠니?’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그가 요즘 강연에서 전하는 주제는 ‘문화와 복음’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성에서 영성으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번 목회자모임에서는 포도나무와 열매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는 교회를 포도원이라고 했습디다. 그러면서 시국이 어렵고 사회가 흔들릴수록 포도원의 포도나무가 넝쿨을 넓게 뻗쳐가야 하고 이 일에 목사님들의 절대적인 수고가 있어야 할 것 이라고 했답니다.
맞아요. 이세상 모든 크리스천 공동체는 하나님의 포도원이죠. 물론 교회도 포도원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모두 포도원집 사람들이고요. 물론 아직은 자신이 포도원집 아들, 딸인걸 실감하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포도원에 종종 놀러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다니러 오신 분도 계실 것이고 탐색하러 오신 분도 계시겠죠? 또한 오늘처럼 정식으로 포도원집 사람들의 초청을 받고 VIP로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아무튼 오셨으니 여러분 모두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도 만나시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만나시고 그리고 그분의 양아들 양딸인 우리들과 사귀셔서 명선포도원과 친해졌으면 합니다.
한 열흘 전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의 올케되신 분이 저를 방문했었습니다. 그 올케는 최근 위암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는데 의사들이 수술을 시작했지만 막상 가슴을 열어보고는 수술이 불가능 해서 그냥 닫아버린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측은했는지 모릅니다. 자매님은 절망속에서 시누이의 권유로 교회로 온 것입니다. 병원에 있던 며칠동안 집사님은 올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했고 자매님의 마음엔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날 저는 자매에게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말씀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몸이 죽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사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매님의 포도나무시다. 뿌리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께 모든 것 내려놓고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날 자매님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남편과 함께 시골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자매가 제 방을 나설 때 나는 그녀에게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상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께서 자매님을 위해 해주신 일을 기억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주 ‘나는 oo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외엔.
사람들은 석가모니를 진리나 인생의 길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경전인 ‘나마다경 38-8’에 이런 글이 있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何時爺蘇來 吾道無油之登也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없는 등과 같다)
이처럼 석가모니도 예수님을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오직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15:1)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참’, 이는 거짓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참’이라는 표현이 스물한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에는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차별화하셔서 포도나무이되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살아있는 참 좋은 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신 것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 말씀에는 많은 사실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포도나무요, 우리를 가지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가지인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뿌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나는 너의 뿌리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뿌리이십니다. 나의 뿌리이십니다. 내 인생의 근본이십니다.
우리가 이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뿌리없는 가지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뿌리에서 짤려진 꽃과 나무가 쓸모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장식품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시들고 말라버리고 맙니다. 아름다움과 싱싱함은 잠깐일 뿐 그건 이미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격, 재산, 명예, 학문, 건강, 부귀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출세를 못해도 괜찮아요. 공부를 못해도 괜찮아요.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어도 괜찮아요. 과거가 어쨌던 상관없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인 이것이 흔들려 버리면 그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보여도 그것은 꽃병의 꽃과 같은 인생일 뿐이죠.
그러나 인생이 뿌리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되고 그분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엄청난 자원이자 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얘기는 잘되고 못되고의 얘기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먼저 생명이 있고야 잘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쓴「잘되는 나」라는 책에 대해서 몇주전 언급한 바 있습니다. 혹 그 책을 보면서 ‘일단 잘되고 보자’ ‘인생에 있어서 잘 되는 것이 장땡이다’고 생각하고 다만 잘되는 요령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낭패를 볼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생명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잘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하나 물어봅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 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짜로 잘되는 것은 예수님과 생명에서 생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뿌리가 되고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뿌리가 되시고 나는 예수님의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우선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잘되는 길이요 세상의 모든 잘됨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시덥잖게 생각하심.
그리고 영혼이 잘되고 난 사람에겐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사를 잘되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과 생명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을 인생의 뿌리로 알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죠?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안에 있으면 범사가 잘 됩니다. 원리상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 사용권과 기도사용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의 얘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기독교역사에도 많이 있고 우리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인도하는 확신반이 이번주면 다 끝납니다. 20주가 넘게 큰 감동속에 보낸 날들이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써낸 간증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한번 감격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삶, 그리고 확신,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용기와 담대함과 소망등등 간증문을 읽으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소유의 여부를 불문하고 이미 잘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될 사람들입니다. 대대손손 잘될 가문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잘 되려면 일단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잘 되어야 축복을 쏟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잘난체 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그리고 내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내 노력으로 뼈빠지게 해서 번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된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가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나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손안에서 겸손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참 포도나무시요 나의 뿌리시요 나는 그분의 가지입니다. 결코 이를 잊지 마십시오. 산술로 되는 것 아니다. 우리는 특면한 사람.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이 말씀에 근거하여 늘 하나님 앞에서 배짱있는 주장을 합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제 포도나무요 뿌리이신 예수님, 저는 주님의 가지입니다. 제가 이제 이 일을 하려합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설교하러 올라올 때도, 강단에 설 때까지 간구하는 제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은 저의 포도나무이시며 저는 가지입니다’ 좀 전에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2008.06.17 00:55:56
"불교의 경전인 ‘나마다경 38-8’에 이런 글이 있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何時爺蘇來 吾道無油之登也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없는 등과 같다)
이처럼 석가모니도 예수님을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본적이 있다고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실소를 금하기 어렵네요.
불경마저 목사님이 직접 제작하시는건지??
거짓말로 점철된 실용정부의 신종전염병인지
설교에 관해 말하기엔 아는것이 없지만 윗부분은
사실도 아니고 날조하여 오랜시간 써먹고 있기에
다소 거칠게 반응하게 되었네요.
선포자님이 이곳에서 많이 보시고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맘 편히 잘 하시길 바랍니다~^^
何時爺蘇來 吾道無油之登也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없는 등과 같다)
이처럼 석가모니도 예수님을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본적이 있다고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실소를 금하기 어렵네요.
불경마저 목사님이 직접 제작하시는건지??
거짓말로 점철된 실용정부의 신종전염병인지
설교에 관해 말하기엔 아는것이 없지만 윗부분은
사실도 아니고 날조하여 오랜시간 써먹고 있기에
다소 거칠게 반응하게 되었네요.
선포자님이 이곳에서 많이 보시고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맘 편히 잘 하시길 바랍니다~^^
2008.06.17 08:42:29
"나마다경" 운운 이야기는 신앙계 99년 7월호에서 순복음교회 김동일 장로라는 사람이 주장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반론글이 인터넷에 있길래 여기에 올려봅니다 (불교계 인사가 쓴 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발췌]
김동일이라는 자의 주장에 의하면
'荷蒔爺蘇(야소)來하면 吾道油無之燈也라'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나의 깨닳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다. 라고 기술 하면서 (팔만대장경 라마다경 38:8에 석가모니 가라사대) 順天者는存하고 逆天者는 亡이니라 하늘에 뜻을 순응하는 자는 살고, 하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죽는다...라고 출처를 분명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孟子曰, 順天者는 存하고 逆天者는 亡이니라. 라는 구절은 맹자의 가르침으로서 명심보감에서도 출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출처가 팔만대장경이라?
또한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 위의 주장은 엉터리임이 금방 드러난다.
1. 爺蘇(야소)라는 말이 언제 나왔는가?
2. 팔만대장경에 라마다경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추궁을 하자 김동일은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스리랑카에 있는 경전이라고 둘러댔다.
여기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 그것도 거짓말임이 금방 드러난다.
3. 언제부터 스리랑카가 한자문화 국가였던가?
김동일이 제시한 (라마다경 38:8 )이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불자들이 불경을 성경처럼 몇장 몇절로 보는 일은 없다. 이것은 김동일이라는 자가 불교의 특성도 모르고 불경도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장로라는 자가 목청껏 떠드는 저질스런 설교를 아무런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일반 신도들의 수준은 과연 어떨지 쉽게 짐작이 간다.
성경을 보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았다는 십계에 거짓증거 하지말라고 하였다.
김동일이란 자는 자신의 종교를 높이기 위해서 거짓증거를 하고 있으며,
일반 신도들은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모르고 은혜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으며,
신도들은 그것을 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거짓증거를 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한 잘못의 궁극적 책임은 목회자들에 있는 것이다.
김동일 장로는 처음에는 출처가 팔만대장경이라고 했다.그러다 거짓임이 밝혀지니까 스리랑카라고 했다. 스리랑카가 한자문화권인가? 하는 추궁에 대하여 라마다경은 있는데 내용이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변명에만 급급하고 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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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김동일이라는 자의 주장에 의하면
'荷蒔爺蘇(야소)來하면 吾道油無之燈也라'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나의 깨닳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다. 라고 기술 하면서 (팔만대장경 라마다경 38:8에 석가모니 가라사대) 順天者는存하고 逆天者는 亡이니라 하늘에 뜻을 순응하는 자는 살고, 하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죽는다...라고 출처를 분명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孟子曰, 順天者는 存하고 逆天者는 亡이니라. 라는 구절은 맹자의 가르침으로서 명심보감에서도 출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출처가 팔만대장경이라?
또한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 위의 주장은 엉터리임이 금방 드러난다.
1. 爺蘇(야소)라는 말이 언제 나왔는가?
2. 팔만대장경에 라마다경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추궁을 하자 김동일은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스리랑카에 있는 경전이라고 둘러댔다.
여기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 그것도 거짓말임이 금방 드러난다.
3. 언제부터 스리랑카가 한자문화 국가였던가?
김동일이 제시한 (라마다경 38:8 )이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불자들이 불경을 성경처럼 몇장 몇절로 보는 일은 없다. 이것은 김동일이라는 자가 불교의 특성도 모르고 불경도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장로라는 자가 목청껏 떠드는 저질스런 설교를 아무런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일반 신도들의 수준은 과연 어떨지 쉽게 짐작이 간다.
성경을 보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았다는 십계에 거짓증거 하지말라고 하였다.
김동일이란 자는 자신의 종교를 높이기 위해서 거짓증거를 하고 있으며,
일반 신도들은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모르고 은혜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으며,
신도들은 그것을 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거짓증거를 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한 잘못의 궁극적 책임은 목회자들에 있는 것이다.
김동일 장로는 처음에는 출처가 팔만대장경이라고 했다.그러다 거짓임이 밝혀지니까 스리랑카라고 했다. 스리랑카가 한자문화권인가? 하는 추궁에 대하여 라마다경은 있는데 내용이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변명에만 급급하고 있다....... (후략)
2008.06.17 14:12:22
전체적으로 썩 잘된 설교라 생각합니다 윗분들이 지적한 쌔빨간 거짓말을 제외하면,글도 상당히 논리적이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접할 때 특히 두려움이 생깁니다 90%의 진실과 10%의 거짓..차라리 막말하는 빤스목사가 그리워질 지경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취할 바는 취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2008.06.18 16:24:02
설교듣는동안 성서의 세계로 전혀 들어가질 못해 많이 힘들었답니다(매주마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 또 고민해봅니다.
다비안들께서는 주일마다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험하시나요? 경험하셨으면 좋겠네요...
어찌해야 할지.... 고민 또 고민해봅니다.
다비안들께서는 주일마다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험하시나요? 경험하셨으면 좋겠네요...
2008.06.18 18:07:24
설교자가 강단에서 30,40여분 동안 시종일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완벽하게 설교 할수 있을까요?
그건 인간인 이상 불가능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설교는 초신자 집회를 대상으로 목사님이 설교문을 작성 하신것 같군요..
그 점을 생각하시고 본다면 그리 잘못된 설교는 아닌것 같습니다.
위에 어느분 말씀대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더 많은것 같습니다
목사는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알아 듣는 나 자신이 잘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이 또한
신앙생활에 시험이 오더군요..
목사님들의 설교 한 토막 이라도 감동을 받는다면 그게 하나님을 경험하는것 아닐런지요..
또한 목사님들의 설교 한 토막 이라도 흠을 찾을려 하다 보면 이 땅 어느 교회를 다닌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설교하는 목회자를 만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일날 찬양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주일날 보는 교우들의 해맑은 모습속에서는 생명이 경험 되더군요^^
아무쪼록 선포자님의 고뇌하는 심령속에 주님의 생명의 생수가 강같이
흘러 넘쳐 나기를 기원 합니다! 힘내세요!
그건 인간인 이상 불가능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설교는 초신자 집회를 대상으로 목사님이 설교문을 작성 하신것 같군요..
그 점을 생각하시고 본다면 그리 잘못된 설교는 아닌것 같습니다.
위에 어느분 말씀대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더 많은것 같습니다
목사는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알아 듣는 나 자신이 잘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이 또한
신앙생활에 시험이 오더군요..
목사님들의 설교 한 토막 이라도 감동을 받는다면 그게 하나님을 경험하는것 아닐런지요..
또한 목사님들의 설교 한 토막 이라도 흠을 찾을려 하다 보면 이 땅 어느 교회를 다닌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설교하는 목회자를 만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일날 찬양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주일날 보는 교우들의 해맑은 모습속에서는 생명이 경험 되더군요^^
아무쪼록 선포자님의 고뇌하는 심령속에 주님의 생명의 생수가 강같이
흘러 넘쳐 나기를 기원 합니다! 힘내세요!
2008.06.18 18:35:10
저별과 달님의 말씀과 제 생각이 같네요.
전 이 설교를 읽고 인용을 잘못한 것 빼고는 좋은 설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네요.
이렇게 말하는 저는 이 설교를 하신 목사님의 설교를 이러쿵 저러쿵 할만한 사람이 못되기에
이 댓글도 정말 조심스럽게 답니다.
저별과 달님께서 다 말씀해놓으셔서 전 이것으로 끝.^^
전 이 설교를 읽고 인용을 잘못한 것 빼고는 좋은 설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네요.
이렇게 말하는 저는 이 설교를 하신 목사님의 설교를 이러쿵 저러쿵 할만한 사람이 못되기에
이 댓글도 정말 조심스럽게 답니다.
저별과 달님께서 다 말씀해놓으셔서 전 이것으로 끝.^^
2008.06.19 10:41:52
저별과 달님! 근데 이상하죠? 그 어느때보다도 진리에 대해 저의 마음의 문은 활짝 열려있는 듯 한데...
요즘 같은 본문을 다른 분들은 어떻게 설교하셨는지.. 또 성서해석에대해서... 영성에 대해서 ....
연구하며 고민하느라 많이 힘든 반면 아주 작은 빛이 보일듯 말듯 하네요...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분들이 있다는게 힘이 됩니다!
요즘 같은 본문을 다른 분들은 어떻게 설교하셨는지.. 또 성서해석에대해서... 영성에 대해서 ....
연구하며 고민하느라 많이 힘든 반면 아주 작은 빛이 보일듯 말듯 하네요...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분들이 있다는게 힘이 됩니다!
2008.06.19 14:55:11
선포자님 말씀처럼 다른 분들은 어떻게 설교하고 해석하시는지 연구하시는게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빛을 찾으실거라는것 공감하구요.. 가능하면 국내외 저명한(?) 신학 교수님들 저서를 다양하게 읽어 보시는것 추천해드립니다..
2008.07.08 22:18:56
선포자님,
글을 읽어 보니...
이런 설교에 은혜를 받는 다는 것이 기적이겠네요.
설교하신 목사님의 이야기 전반에 걸쳐서 세상에서 주장하는 똑 같은 기복주의 신앙을 이야기하네요.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셨다하지만
설교하신 목사님은 '농부이신 아버지, 제 포도나무요 뿌리이신 예수님, 저는 주님의 가지'라고 이해를
하시고서 설교를 하고 계시는 군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글을 읽어 보니...
이런 설교에 은혜를 받는 다는 것이 기적이겠네요.
설교하신 목사님의 이야기 전반에 걸쳐서 세상에서 주장하는 똑 같은 기복주의 신앙을 이야기하네요.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셨다하지만
설교하신 목사님은 '농부이신 아버지, 제 포도나무요 뿌리이신 예수님, 저는 주님의 가지'라고 이해를
하시고서 설교를 하고 계시는 군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2008.08.17 18:46:52
위에 글들을 읽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어느덧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은 분명히 기름 부은 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이렇쿵 저렇쿵 난도질하며 내 입에 맞는 말씀을 찾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 중, 이것은 기복적이고, 이것은 좋은 말씀이다 라고 구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엘리야는 폭풍가운데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민감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우리는 과연 엘리야 같은 민감한 영성을 가지고 있나요?
선포자를 탓하기에 앞서 어떤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 삶을 온전히 돌이키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는 폭풍가운데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민감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우리는 과연 엘리야 같은 민감한 영성을 가지고 있나요?
선포자를 탓하기에 앞서 어떤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 삶을 온전히 돌이키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08.08.17 20:45:56
무익한종 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아셔야 할 것은 목사로 세움 받은 사람들도
성경을 다 알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체계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제한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 앞에서 마치 다 알고 깨우친 사람처럼 설교하고
가르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설교비평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저 같은 목사들이 좀 더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인정하면서 선동가로 속빈 설교를 하지 않게
돕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설교를 마치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인양 강요하는 분들 중에는
유독 사이비 이단 교주들이 참 많더군요. 설교신성화를 통한 세뇌작업을
하려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설교자는 누구보다 검증이 되어야 하고 탓이 되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저 같은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가 흠없고 완벽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아멘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이 손쉽게 곡해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 지금 설교하러 가기 직전에 이 댓글 쓰고 있습니다.
오늘 제 설교가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잘 드러낼 수 있었으면 하는데
준비한 원고를 보니 오늘도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삼환 목사님께서 8.14일 특별한 설교를 하셨다지요?
조용기 목사님도 요즘 이명박 대통령을 아주 기쁘시게 하는 설교를 자주 하시고요.
설교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전혀 딴소리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함께 샛길로 빠지지 쉽습니다.
글을 빨리 쓰려니....그리고 설교를 하러가는 길이라 그러지
댓글이 꼭 설교처럼 되버렸군요. 용서해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아셔야 할 것은 목사로 세움 받은 사람들도
성경을 다 알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체계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제한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 앞에서 마치 다 알고 깨우친 사람처럼 설교하고
가르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설교비평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저 같은 목사들이 좀 더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인정하면서 선동가로 속빈 설교를 하지 않게
돕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설교를 마치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인양 강요하는 분들 중에는
유독 사이비 이단 교주들이 참 많더군요. 설교신성화를 통한 세뇌작업을
하려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설교자는 누구보다 검증이 되어야 하고 탓이 되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저 같은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가 흠없고 완벽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아멘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이 손쉽게 곡해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 지금 설교하러 가기 직전에 이 댓글 쓰고 있습니다.
오늘 제 설교가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잘 드러낼 수 있었으면 하는데
준비한 원고를 보니 오늘도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삼환 목사님께서 8.14일 특별한 설교를 하셨다지요?
조용기 목사님도 요즘 이명박 대통령을 아주 기쁘시게 하는 설교를 자주 하시고요.
설교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전혀 딴소리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함께 샛길로 빠지지 쉽습니다.
글을 빨리 쓰려니....그리고 설교를 하러가는 길이라 그러지
댓글이 꼭 설교처럼 되버렸군요. 용서해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