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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께,
우선 저의 질문을 드리기 전에 질문의 배경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으로부터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소개받은 지난 7월 이후에, 저는 상당한 시간을 정목사님 책들과 다비아 사이트의 글들을 읽으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저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 또 다른 차원으로의 열림을 경험하게 하였고, 아울러서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였습니다.
저는 이전에도 크리스천의 본질은 외양적 업적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생명 즉 삶과 죽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팽배한 한국사회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는 척박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저의 막연한 답답함과 영적 갈급함이 정목사님의 일련의 글들과 설교를 통하여 목마를 때 냉수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특히 정목사님의 CD를 통한 육성설교와 판넨베르크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물론 모든 것을 동의하거나 모두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통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를 진지하게 추구함에 따른 생명의 약동과 영적 소통을 느낄 수 있었기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의 질문은 이제부터 입니다.
저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와 현재로서 참여하는 삶은, 과거로서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듭난 생명 (즉 이미 완료된 구원)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인류의 각자 인생은 모두 나름대로 다른 삶을 살지라도, 그 실존적 비극은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는 것이고, 예수님 통한 구원, 즉 거듭난 생명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때 거듭난 생명이란 달리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음, 죄 사함을 통한 구원,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 등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정 목사님께는 이러한 과거완료적 구원에 대하여 시니컬하게 표현하셨고, 일련의 저술 및 설교에서도 이러한 구원에 대하여는 침묵하시거나, 부정 또는 반대에 가까운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박옥수 목사의 설교비평에서의 구원 언급에 대하여 등) 물론 저도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사례들, 너무 흔하게 거론되는 구원의 자기확신, 영접기도, 자기신념,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자아도취, 너무 만연된 인간적인 교리적 접근, 주관적 가르침, 억지 방언 등은 아닐 것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공로로 가능하게 된 성령의 활동에 의해 주어지는 믿음의 구원 (또는 죄 사함, 거듭난 생명, 영혼구원 등)까지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혹시 정목사님께서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여 모두 부정하시다 보니, 거기에 은폐된 참 구원까지도 부정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어쩌다가 구원이 하도 많이 회자되다 보니 참 구원이라는 말을 쓰는 것부터가 이상하기는 합니다.
저의 질문은 이상과 같습니다만 사족으로 부연하여 참 구원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저의 소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원을 받는 개인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의도는 있다고 하여도,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는 신비이므로 그 본질을 언어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외양적인 행위와 업적 또는 율법적 실행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전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내면적인 의지, 결단, 신념도 아니고,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인식의 획기적인 전환도 아닐 것입니다. 결국 인간 편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혼돈과 포기와 절망의 심연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한줄기 빛으로, 또는 성령님의 생명의 숨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고독한 인간이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무기력하게 대면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주권적인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로와, 소통활동으로서의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완전한 은총이 아닐까요?
그러한 구원은 당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자기 공로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이유도 없고, 또한 사람의 관점으로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관점의 공의가 전제된 은총이기에 제 3자는 누구라도 판단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구원받은 당사자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통하여 어떤 현상으로든 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 현상의 예를 들면 영혼 깊이에서 울어나는 평안,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평화, 새 생명을 얻음으로 인한 기쁨의 충만함 등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현상이 있을 수 있고, 그 정도에 있어서도 드라마틱하거나 아니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나라 참여의 전제 조건으로서 개인적으로는 과거완료적인 구원의 계기와 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구원의 사례로서 기독교 역사적 인물로는 정목사님 책에서도 언급하신, 사도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 어거스틴의 회심, 마르틴 루터의 믿음, 요한 웨슬레의 중생 등이 잘 알려진 경우이겠지요.
다시 말씀 드리면, 제가 보기에는 목사님께서는 예수님 부활생명과 하나님나라 참여를 통한 구원을 말씀하시면서, 그 전제조건으로서의 거듭난 생명에 대하여는 거의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은 부정하시거나 반대하시는 것처럼 보였기에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제가 오해하였을 수도 있고,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평신도인 저의 질문내용이나 생각들 중에는 미숙함과 오류나 편협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듭난 생명에 대한 목사님의 의견과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우선 저의 질문을 드리기 전에 질문의 배경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으로부터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소개받은 지난 7월 이후에, 저는 상당한 시간을 정목사님 책들과 다비아 사이트의 글들을 읽으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저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 또 다른 차원으로의 열림을 경험하게 하였고, 아울러서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였습니다.
저는 이전에도 크리스천의 본질은 외양적 업적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생명 즉 삶과 죽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팽배한 한국사회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는 척박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저의 막연한 답답함과 영적 갈급함이 정목사님의 일련의 글들과 설교를 통하여 목마를 때 냉수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특히 정목사님의 CD를 통한 육성설교와 판넨베르크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물론 모든 것을 동의하거나 모두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통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를 진지하게 추구함에 따른 생명의 약동과 영적 소통을 느낄 수 있었기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의 질문은 이제부터 입니다.
저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와 현재로서 참여하는 삶은, 과거로서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듭난 생명 (즉 이미 완료된 구원)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인류의 각자 인생은 모두 나름대로 다른 삶을 살지라도, 그 실존적 비극은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는 것이고, 예수님 통한 구원, 즉 거듭난 생명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때 거듭난 생명이란 달리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음, 죄 사함을 통한 구원,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 등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정 목사님께는 이러한 과거완료적 구원에 대하여 시니컬하게 표현하셨고, 일련의 저술 및 설교에서도 이러한 구원에 대하여는 침묵하시거나, 부정 또는 반대에 가까운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박옥수 목사의 설교비평에서의 구원 언급에 대하여 등) 물론 저도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사례들, 너무 흔하게 거론되는 구원의 자기확신, 영접기도, 자기신념,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자아도취, 너무 만연된 인간적인 교리적 접근, 주관적 가르침, 억지 방언 등은 아닐 것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공로로 가능하게 된 성령의 활동에 의해 주어지는 믿음의 구원 (또는 죄 사함, 거듭난 생명, 영혼구원 등)까지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혹시 정목사님께서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여 모두 부정하시다 보니, 거기에 은폐된 참 구원까지도 부정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어쩌다가 구원이 하도 많이 회자되다 보니 참 구원이라는 말을 쓰는 것부터가 이상하기는 합니다.
저의 질문은 이상과 같습니다만 사족으로 부연하여 참 구원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저의 소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원을 받는 개인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의도는 있다고 하여도,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는 신비이므로 그 본질을 언어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외양적인 행위와 업적 또는 율법적 실행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전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내면적인 의지, 결단, 신념도 아니고,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인식의 획기적인 전환도 아닐 것입니다. 결국 인간 편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혼돈과 포기와 절망의 심연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한줄기 빛으로, 또는 성령님의 생명의 숨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고독한 인간이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무기력하게 대면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주권적인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로와, 소통활동으로서의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완전한 은총이 아닐까요?
그러한 구원은 당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자기 공로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이유도 없고, 또한 사람의 관점으로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관점의 공의가 전제된 은총이기에 제 3자는 누구라도 판단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구원받은 당사자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통하여 어떤 현상으로든 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 현상의 예를 들면 영혼 깊이에서 울어나는 평안,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평화, 새 생명을 얻음으로 인한 기쁨의 충만함 등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현상이 있을 수 있고, 그 정도에 있어서도 드라마틱하거나 아니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나라 참여의 전제 조건으로서 개인적으로는 과거완료적인 구원의 계기와 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구원의 사례로서 기독교 역사적 인물로는 정목사님 책에서도 언급하신, 사도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 어거스틴의 회심, 마르틴 루터의 믿음, 요한 웨슬레의 중생 등이 잘 알려진 경우이겠지요.
다시 말씀 드리면, 제가 보기에는 목사님께서는 예수님 부활생명과 하나님나라 참여를 통한 구원을 말씀하시면서, 그 전제조건으로서의 거듭난 생명에 대하여는 거의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은 부정하시거나 반대하시는 것처럼 보였기에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제가 오해하였을 수도 있고,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평신도인 저의 질문내용이나 생각들 중에는 미숙함과 오류나 편협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듭난 생명에 대한 목사님의 의견과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2008.09.06 23:15:26
목사님 바로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바쁘실텐데 그렇게 빨리 답을 주신다고 하시네요. 전혀 시급한 사항이 아니니 약속에 구속받지 마시고 목사님 시간나실 때 천천히 대답해 주셔요.
peace 드림
목사님 바쁘실텐데 그렇게 빨리 답을 주신다고 하시네요. 전혀 시급한 사항이 아니니 약속에 구속받지 마시고 목사님 시간나실 때 천천히 대답해 주셔요.
peace 드림
2008.09.08 21:51:08
피스 님,
안녕하세요?
진지하고 시의적절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군요.
하나, 정 목사는 과거 완료적 구원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둘, 예수 영접을 통한 거듭남의 체험과 삶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거듭난 생명’에 대한 설명을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집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피스님의 생각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어서
다른 패턴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패러다임 쉬프트의 문제가 여기 걸려 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피스 님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일반 다비안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자질구레하게 설명하는 걸 이해해주세요.
피스 님의 기독교 이해와 저의 기독교 이해가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접근 방법에서는 크게 다르다는 겁니다.
어쩌면 근본에 대해서도 크게 다를지도 모르지요.
동일한 우주를 보면서도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듯이
동일한 기독교 신앙을 접하면서도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어제 <긍정의 힘>을 쓴 오스틴의 설교를
우연하게 기독교 티브이에서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본 겁니다.
저는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건 복음이 아니라 종교적 처세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와 그 섭리와 그 신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감사의 삶을 살면 모든 게 잘된다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더군요.
이처럼 같은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이런 건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동일한 야훼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전했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도 그렇고,
지금도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이나
박옥수 목사의 구원론에서 볼 수 있듯이
무늬만 비슷하지 실질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피스 님의 신앙이 틀렸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틀렸다기보다는 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옳겠군요.
피스 님이 거듭남, 예수 영접, 구원의 확실성 등등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거듭남의 생명에 대해서 강조하셨어요.
그런데요,
그 거듭남이라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이게 문제인 거지요.
피스 님은 가장 중요하다고 보신 바로 그 주제가
실제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말입니다.
박옥수 목사 계통의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하지요?
아마 박옥수 목사께서 그런 제목으로 책도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말씀드리지만
조직신학에서 거듭남의 문제는 거의 취급하지 않습니다.
중생(Regeneration)이 거듭남(born again)과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양자 모두 신학에서는 중심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칭의가 중심 개념이지요.
거듭남과 칭의가 간접적으로는 연결되지만
직접적으로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칭의가 상수라고 한다면 거듭남은 변수인 거지요.
만약 칭의에 의한 결과로서의 거듭남을 말한다면
그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피스 님의 생각은 칭의와의 연관보다는
거듭남의 확신, 구원의 확신, 등등,
이런 것에 포커스를 맞춘 거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정 목사가 거듭남의 삶을 강조하지 않는 거 같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설교를 견인해가는 동력 중의 하나가 바로 칭의이거든요.
“여러분은 자기 업적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예수의 의가 여러분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설교했다면 그것은 곧 거듭남에 대해서 설교한 겁니다.
그런데 피스 님에게는 저의 설교가 완료된 구원과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완료된 구원과 종말론적 구원,
즉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논의에 더 집중하려면 거듭남, 중생에 한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피스 님에게 저의 설교가 거듭남과 거리가 먼 것처럼 들린 이유는
바로 피스 님과 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표현에 주목해 주세요.
무엇이 어떻게 틀릴까요?
이걸 말하려면 세계 교회사를,
특히 종교개혁 뒤 세대의 정통주의 이후로
유럽에서 전개된 각성신학과 경건주의, 청교도,
그리고 미국에서 전개된 부흥운동을 좀 검토해야 합니다.
그걸 다 검토하기는 힘드니까
축약적으로만 말씀드릴께요.
예수 영접, 거듭남, 사죄의 확신, 구원의 확신, 새로운 삶 등등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그런 운동에서 강조된 것들입니다.
그게 18,19세기 유럽과 조금 뒤로 미국에서 크게 부각된 이유는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화와 연관됩니다.
그러니까 개신교회가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교회의 전통과 신조 중심으로 돌아가서
영적 다이나믹을 잃어버렸다고 보고
그것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벌어진 겁니다.
그들은 교회와는 거리를 두고
개인들이 직접 성령과 소통하고, 회개하고, 깨끗하게 사는 삶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신학도 사라지고, 예전도 사라지고, 신조도 사라지고,
오직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영적 충만한만 강조된 거지요.
결국 “탕자의 비유” 유와 같은 설교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교 학부 다닐 때
빌리 그레함 목사에게서 그런 설교,
정말 신물나게 들었습니다.
이런 신앙과 영성이 미국에서 크게 성과를 냈습니다.
그런 신앙에 영향을 받은 미국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피스 님이 이런 교회사, 또는 교리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
질문하신 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저는 피스 님이 저의 설교와 신학,
그리고 다비아의 여러 글에서 영적 깨우침에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바로 이 대목에서만은 왜 동의하기 어려운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피스 님의 그런 전통에서 신앙훈련을 받았다는 걸 지적하는 거지요.
한국에서 부흥하는 교회는 거의 이런 영성 안에 있습니다.
막 나가는 교회도 그렇고,
조금 의식이 있는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 유명한 ‘사랑의 교회’도 이런 전통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뿐이지
제가 그런 걸 재단할 자격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전통에 젖은 분들의 신앙이 일정한 흐름을 이루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신앙적 패러다임이 되는 겁니다.
거듭남의 체험을 강조하고,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아주 복고적이고 낭만적인 신앙이지요.
그런 분들은 지난날 예수 영접한 바로 그 감격으로
평생 신앙생활을 하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그게 옳은 거 아니냐,
가장 중요한 거 아니냐, 하고
피스 님은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제가 지난 수년간 설교비평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접한 설교자들의
가장 큰 전통은 청교도 신앙이더군요.
한국에서는 청교도가 거의 초기 사도들과 버금갈 정도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어요.
그게 저로서는 어처구니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유럽의 18,19세기에 일시적으로 필요로 했던,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아주 일시적이었던 청교도 영성은
그렇게 건강한 게 아니랍니다.
이 문제는 그만 두구요.
거듭남의 문제로 다시 돌아갑니다.
피스 님이 동의하든 않든,
그 문제가 신학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요,
그것은 신학만이 아니라 성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피스 님은 거듭남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그것인가요?
제 기억으로는 성서가 거듭남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실제적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성서와 신학과 기독교 역사는 거듭남이 아니라
거듭남의 증거라 할 수 있는 세례의 신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의 반복이라 할 성만찬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거듭남을 말하는 것보다는
세례와 성만찬을 말하는 게 훨씬 성서적이고, 기독교 역사적이고, 신학적이랍니다.
피스 님은 거듭난 순간과 그런 확신을 어떻게라도 확인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하셨어요.
정말 그럴까요?
그게 정말 그렇게 확실한 걸까요?
우리의 확신이라는 게 가장 현실적인 것(reality)일까요?
그런 경험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에 가깝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경험한 어느 순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사랑 자체는 아니겠지요.
고운정미운정 다 드는,
늙은이가 되어서도 서로 의지하는 부부 사이에
참된 사람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구원의 확신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그것보다는 구원의 현실(reality of 'soteria')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인간의 심리이지만
구원의 ‘현실’은 하나님의 행위이거든요.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아마 다비아 어딘가를 찾아보면
이런 주제로 쓴 글들이 숨어 있을 겁니다.
위의 제 글이 피스 님에게 도움이 될지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한국의 가장 건전하고 지성적인 평신도에게,
그러나 일종의 신앙적 편식에 기울어진 분에게
나름으로 기독교의 중심을 설명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신앙적 편식이라는 표현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이건 한국 기독교인들의 숙명입니다.
만약 그렇게라도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면
저는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신앙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겠습니다.
누구에게도 완전한 믿음은 없으니까요.
제가 글을 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정확하지 못한 표현들이 눈에 뜨이네요.
그래도 내버려두겠습니다.
특히 피스 님이 생각한 거듭난 생명과 구원의 확신 같은 개념이
바울, 어거스틴, 루터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위의 내 이야기 중에서 상당 부분을 취소하거나 고쳐야겠습니다.
제가 내 글을 그냥 내버려두는 이유는
피스 님의 그 생각이 위 신앙의 영웅들에게 일어났던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를 여기서 다시 설명하기 시작하기는 어렵겠네요.
제 글의 오류를 변명하는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반복하겠습니다.
기독교 신학과 성서와 교회 역사에서
거듭남의 삶과 구원의 확신은 핵심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피스 님이 지난 몇 달간 다비아의 글들을 읽어주시고,
저의 설교집과 판넨베르크의 설교집을 읽어주셨다니
뭐라 고마운 말씀을 드려야할지요.
앞으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피스 님이 가시는 영적인 길에
늘 동행하시기를...
2008년 9월8일(월)
진량 대구성서아데미 연구실에서.
정용섭 목사.
안녕하세요?
진지하고 시의적절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군요.
하나, 정 목사는 과거 완료적 구원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둘, 예수 영접을 통한 거듭남의 체험과 삶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거듭난 생명’에 대한 설명을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집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피스님의 생각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어서
다른 패턴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패러다임 쉬프트의 문제가 여기 걸려 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피스 님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일반 다비안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자질구레하게 설명하는 걸 이해해주세요.
피스 님의 기독교 이해와 저의 기독교 이해가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접근 방법에서는 크게 다르다는 겁니다.
어쩌면 근본에 대해서도 크게 다를지도 모르지요.
동일한 우주를 보면서도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듯이
동일한 기독교 신앙을 접하면서도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어제 <긍정의 힘>을 쓴 오스틴의 설교를
우연하게 기독교 티브이에서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본 겁니다.
저는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건 복음이 아니라 종교적 처세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와 그 섭리와 그 신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감사의 삶을 살면 모든 게 잘된다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더군요.
이처럼 같은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이런 건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동일한 야훼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전했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도 그렇고,
지금도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이나
박옥수 목사의 구원론에서 볼 수 있듯이
무늬만 비슷하지 실질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피스 님의 신앙이 틀렸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틀렸다기보다는 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옳겠군요.
피스 님이 거듭남, 예수 영접, 구원의 확실성 등등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거듭남의 생명에 대해서 강조하셨어요.
그런데요,
그 거듭남이라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이게 문제인 거지요.
피스 님은 가장 중요하다고 보신 바로 그 주제가
실제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말입니다.
박옥수 목사 계통의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하지요?
아마 박옥수 목사께서 그런 제목으로 책도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말씀드리지만
조직신학에서 거듭남의 문제는 거의 취급하지 않습니다.
중생(Regeneration)이 거듭남(born again)과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양자 모두 신학에서는 중심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칭의가 중심 개념이지요.
거듭남과 칭의가 간접적으로는 연결되지만
직접적으로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칭의가 상수라고 한다면 거듭남은 변수인 거지요.
만약 칭의에 의한 결과로서의 거듭남을 말한다면
그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피스 님의 생각은 칭의와의 연관보다는
거듭남의 확신, 구원의 확신, 등등,
이런 것에 포커스를 맞춘 거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정 목사가 거듭남의 삶을 강조하지 않는 거 같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설교를 견인해가는 동력 중의 하나가 바로 칭의이거든요.
“여러분은 자기 업적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예수의 의가 여러분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설교했다면 그것은 곧 거듭남에 대해서 설교한 겁니다.
그런데 피스 님에게는 저의 설교가 완료된 구원과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완료된 구원과 종말론적 구원,
즉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논의에 더 집중하려면 거듭남, 중생에 한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피스 님에게 저의 설교가 거듭남과 거리가 먼 것처럼 들린 이유는
바로 피스 님과 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표현에 주목해 주세요.
무엇이 어떻게 틀릴까요?
이걸 말하려면 세계 교회사를,
특히 종교개혁 뒤 세대의 정통주의 이후로
유럽에서 전개된 각성신학과 경건주의, 청교도,
그리고 미국에서 전개된 부흥운동을 좀 검토해야 합니다.
그걸 다 검토하기는 힘드니까
축약적으로만 말씀드릴께요.
예수 영접, 거듭남, 사죄의 확신, 구원의 확신, 새로운 삶 등등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그런 운동에서 강조된 것들입니다.
그게 18,19세기 유럽과 조금 뒤로 미국에서 크게 부각된 이유는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화와 연관됩니다.
그러니까 개신교회가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교회의 전통과 신조 중심으로 돌아가서
영적 다이나믹을 잃어버렸다고 보고
그것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벌어진 겁니다.
그들은 교회와는 거리를 두고
개인들이 직접 성령과 소통하고, 회개하고, 깨끗하게 사는 삶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신학도 사라지고, 예전도 사라지고, 신조도 사라지고,
오직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영적 충만한만 강조된 거지요.
결국 “탕자의 비유” 유와 같은 설교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교 학부 다닐 때
빌리 그레함 목사에게서 그런 설교,
정말 신물나게 들었습니다.
이런 신앙과 영성이 미국에서 크게 성과를 냈습니다.
그런 신앙에 영향을 받은 미국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피스 님이 이런 교회사, 또는 교리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
질문하신 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저는 피스 님이 저의 설교와 신학,
그리고 다비아의 여러 글에서 영적 깨우침에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바로 이 대목에서만은 왜 동의하기 어려운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피스 님의 그런 전통에서 신앙훈련을 받았다는 걸 지적하는 거지요.
한국에서 부흥하는 교회는 거의 이런 영성 안에 있습니다.
막 나가는 교회도 그렇고,
조금 의식이 있는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 유명한 ‘사랑의 교회’도 이런 전통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뿐이지
제가 그런 걸 재단할 자격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전통에 젖은 분들의 신앙이 일정한 흐름을 이루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신앙적 패러다임이 되는 겁니다.
거듭남의 체험을 강조하고,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아주 복고적이고 낭만적인 신앙이지요.
그런 분들은 지난날 예수 영접한 바로 그 감격으로
평생 신앙생활을 하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그게 옳은 거 아니냐,
가장 중요한 거 아니냐, 하고
피스 님은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제가 지난 수년간 설교비평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접한 설교자들의
가장 큰 전통은 청교도 신앙이더군요.
한국에서는 청교도가 거의 초기 사도들과 버금갈 정도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어요.
그게 저로서는 어처구니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유럽의 18,19세기에 일시적으로 필요로 했던,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아주 일시적이었던 청교도 영성은
그렇게 건강한 게 아니랍니다.
이 문제는 그만 두구요.
거듭남의 문제로 다시 돌아갑니다.
피스 님이 동의하든 않든,
그 문제가 신학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요,
그것은 신학만이 아니라 성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피스 님은 거듭남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그것인가요?
제 기억으로는 성서가 거듭남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실제적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성서와 신학과 기독교 역사는 거듭남이 아니라
거듭남의 증거라 할 수 있는 세례의 신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의 반복이라 할 성만찬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거듭남을 말하는 것보다는
세례와 성만찬을 말하는 게 훨씬 성서적이고, 기독교 역사적이고, 신학적이랍니다.
피스 님은 거듭난 순간과 그런 확신을 어떻게라도 확인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하셨어요.
정말 그럴까요?
그게 정말 그렇게 확실한 걸까요?
우리의 확신이라는 게 가장 현실적인 것(reality)일까요?
그런 경험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에 가깝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경험한 어느 순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사랑 자체는 아니겠지요.
고운정미운정 다 드는,
늙은이가 되어서도 서로 의지하는 부부 사이에
참된 사람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구원의 확신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그것보다는 구원의 현실(reality of 'soteria')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인간의 심리이지만
구원의 ‘현실’은 하나님의 행위이거든요.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아마 다비아 어딘가를 찾아보면
이런 주제로 쓴 글들이 숨어 있을 겁니다.
위의 제 글이 피스 님에게 도움이 될지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한국의 가장 건전하고 지성적인 평신도에게,
그러나 일종의 신앙적 편식에 기울어진 분에게
나름으로 기독교의 중심을 설명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신앙적 편식이라는 표현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이건 한국 기독교인들의 숙명입니다.
만약 그렇게라도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면
저는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신앙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겠습니다.
누구에게도 완전한 믿음은 없으니까요.
제가 글을 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정확하지 못한 표현들이 눈에 뜨이네요.
그래도 내버려두겠습니다.
특히 피스 님이 생각한 거듭난 생명과 구원의 확신 같은 개념이
바울, 어거스틴, 루터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위의 내 이야기 중에서 상당 부분을 취소하거나 고쳐야겠습니다.
제가 내 글을 그냥 내버려두는 이유는
피스 님의 그 생각이 위 신앙의 영웅들에게 일어났던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를 여기서 다시 설명하기 시작하기는 어렵겠네요.
제 글의 오류를 변명하는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반복하겠습니다.
기독교 신학과 성서와 교회 역사에서
거듭남의 삶과 구원의 확신은 핵심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피스 님이 지난 몇 달간 다비아의 글들을 읽어주시고,
저의 설교집과 판넨베르크의 설교집을 읽어주셨다니
뭐라 고마운 말씀을 드려야할지요.
앞으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피스 님이 가시는 영적인 길에
늘 동행하시기를...
2008년 9월8일(월)
진량 대구성서아데미 연구실에서.
정용섭 목사.
2008.09.09 21:41:57
저는 신앙에 대해 궁금한것이 있으면 , 누구에게나 문을 두드려 보는 성격입니다.
얼마전에는 총신대 신학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했습니다.
이 분이 정 목사님을 알고 계시더군요..
제가 정목사님의 글들이 평신도인 저로서는 여태껏 알아왔던 구원론이나, 기독교 신앙관 과는
조금 다른면이 있다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분이 집회에 곧 들어가야 한다면서 간단히 몇마디 해 주더군요.
[정용섭 목사님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른분 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결국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여기서 부터 벌써 모든것이 다르게 되는것이다.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는 말을 하더군요..
또 한분은 여러 신학자들의 글을 연구하는 또 다른 선생님이신데(이 분과는 컴으로 대화 했습니다)
이분은 정용섭 목사님을 잘 모르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구 성서 아카데미를 소개 시켜 드렸습니다.
이 분도 제가 처음에 거론한 교수님과 비숫한 말을 하더군요..
[ 성경을 어떻게 받아 들이며 어떻게 이해 하느냐가 서로 다르다고 하더군요,
성경을 이해하고, 신앙하는 관점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제가 대화한 두 신학자의 공통된 의견이 있다면,
[정 목사님은 성경을 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많이 다르다. 이것이 다르면 그 차이는 엄청 크다고 할수 있다,
그중에 한 분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천길 차이가 나게 된다고 하더군요^^ ]
아 물론 이 두분은 개혁주의 신학자 이니 당연히 정 목사님과는 신학적 기반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저는 정 목사님께도 다비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솔직히 예전에는 정 목사님이 기존에 제가 알고 있던 것들과는 많이 다르게 가르쳐서 고민도 많이하고
많이 따지기도 했는데요.. 그럼으로서 또 많은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전 앞으로도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이곳 다비아에서 배울려고 합니다.
이러면서 신앙도 좀더 성숙 되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얼마전에는 총신대 신학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했습니다.
이 분이 정 목사님을 알고 계시더군요..
제가 정목사님의 글들이 평신도인 저로서는 여태껏 알아왔던 구원론이나, 기독교 신앙관 과는
조금 다른면이 있다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분이 집회에 곧 들어가야 한다면서 간단히 몇마디 해 주더군요.
[정용섭 목사님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른분 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결국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여기서 부터 벌써 모든것이 다르게 되는것이다.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는 말을 하더군요..
또 한분은 여러 신학자들의 글을 연구하는 또 다른 선생님이신데(이 분과는 컴으로 대화 했습니다)
이분은 정용섭 목사님을 잘 모르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구 성서 아카데미를 소개 시켜 드렸습니다.
이 분도 제가 처음에 거론한 교수님과 비숫한 말을 하더군요..
[ 성경을 어떻게 받아 들이며 어떻게 이해 하느냐가 서로 다르다고 하더군요,
성경을 이해하고, 신앙하는 관점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제가 대화한 두 신학자의 공통된 의견이 있다면,
[정 목사님은 성경을 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많이 다르다. 이것이 다르면 그 차이는 엄청 크다고 할수 있다,
그중에 한 분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천길 차이가 나게 된다고 하더군요^^ ]
아 물론 이 두분은 개혁주의 신학자 이니 당연히 정 목사님과는 신학적 기반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저는 정 목사님께도 다비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솔직히 예전에는 정 목사님이 기존에 제가 알고 있던 것들과는 많이 다르게 가르쳐서 고민도 많이하고
많이 따지기도 했는데요.. 그럼으로서 또 많은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전 앞으로도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이곳 다비아에서 배울려고 합니다.
이러면서 신앙도 좀더 성숙 되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2008.09.11 08:26:42
총신대의 신학적 경향 자체가 다른 신학대와는 좀 다르죠. 큰 시각에서 볼때는 오히려 총신대가 소수의 그룹에 속하는 듯...
정목사님의 깊이있는 답변은 확실히 그 격이 다르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목사님의 깊이있는 답변은 확실히 그 격이 다르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8.09.11 16:17:57
한국은 세계 교회 가운데서 장로교가 가장 지배적인 나라 아닐까 합니다.
영국만 해도 장로교는 이름을 찾기도 어렵지요.
그 중에서도 총신의 신학은 참 특징이 있습니다^^.
강한 자부심과 객관적 사실은 언제나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요.
한국 신학이 영국 성공회처럼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영국만 해도 장로교는 이름을 찾기도 어렵지요.
그 중에서도 총신의 신학은 참 특징이 있습니다^^.
강한 자부심과 객관적 사실은 언제나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요.
한국 신학이 영국 성공회처럼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2008.09.12 00:43:07
목사님, 성실하신 답변에 감사 드립니다.
저의 질문에 충분히 대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저의 생각들이 틀리지 않고, 다르다고 표현해 주셔서 재삼 감사 드립니다.
원래는 여기까지 답 글로 마치려다가, 저의 질문의 배경을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고, 목사님 답변에 대한 저의 소견을 부연해서 말씀 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저의 글 중에 편협한 사고나, 적절치 못한 표현이 있다고 하여도 제가 이해하는 방식에 근거한 것이므로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첫째, 저의 질문의도는 적어도 구원의 문제,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 만은 목사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였고,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질문은 현재와 미래에 참여하는 구원을 설교하신다면 그 구원의 시작은 어디인가요? (또 다른 표현으로는 어느 한 크리스천이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제부터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정도의 가벼운 내용이었습니다. 사실상 목사님 설교말씀에 대부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에, 굳이 확인까지 할 필요도 없었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의미가 크다고 여겨지는 크리스천의 시작점으로서의 과거구원에 대하여 목사님의 제 생각과 다른 몇몇 부정적이거나 가벼운 표현들이 저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다르지 않다는 의견을 확실히 받아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무거운 주제인 거듭난 생명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즉 저의 얄팍한 속셈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까지도 부정하시겠습니까? 라고 여쭈어 보면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한 것이지요. 지금 생각하니 목사님 말씀대로 참으로 순진하고 낭만적인 착각이었습니다.
둘째, 목사님께서 답변으로 주신 구원은 변수고 칭의가 상수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이미 처음 질문에서도 구원을 여러 다른 말들로 표현하였는데, 어느 것이 든 칭의는 반드시 그 핵심내용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것이 너무 기본적이고 당연하였기에 그것을 간과하고 말았네요. 제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배경을 설명하려니 어쩔 수 없이 여간 해서 밝히지 않는 저의 신앙이력을 간략히 소개 드립니다. 저는 상당히 오래 전 1970년대 중반 대학시절에 이미 방언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영향을 받아 방언도 해보았고, 사영리 방식으로 전하는 대학생 선교단체로부터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도 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무엇이 기독교의 진수이고 구원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묻기도 하며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구원의 핵심은 죄인 된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는 것을 믿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그 이후 더 절실하게 찾고 씨름하였던 것은 칭의에 대하여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의 믿음을 어떻게 갖느냐 이었지요. 또한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논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실체적인 삶을 통하여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칭의가 상수라는 목사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그냥 손쉽게 내린 결론이라고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크리스천의 현재적인 삶에서는 세례와 성만찬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가 과거구원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도 동의합니다. 다만 이미 구원을 통하여 생명현상이 시작되었다는 전제하에서이지요. 그렇다면 과거 구원에만 매달리기 보다는 성장하고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당연한 생명의 특성이기 때문이지요. 이때 세례와 성만찬의 의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의식 자체는 본질적 의미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전제도 따라야 하겠지요.
결론적으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현실참여로서의 구원에는 제가 원래부터 동의하였고요. 크리스천 삶의 시작점으로서의 구원에 대하여도 본질적으로 저와 거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크리스천으로서 삶에서 저는 확실한 시작이 중요하고, 목사님은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이 정도는 서로 용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그냥 감사 드린다고 끝맺을걸, 이렇게 부연설명을 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마음도 듭니다만 어차피 작성한 글이니 그냥 올립니다.
저의 질문에 충분히 대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저의 생각들이 틀리지 않고, 다르다고 표현해 주셔서 재삼 감사 드립니다.
원래는 여기까지 답 글로 마치려다가, 저의 질문의 배경을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고, 목사님 답변에 대한 저의 소견을 부연해서 말씀 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저의 글 중에 편협한 사고나, 적절치 못한 표현이 있다고 하여도 제가 이해하는 방식에 근거한 것이므로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첫째, 저의 질문의도는 적어도 구원의 문제,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 만은 목사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였고,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질문은 현재와 미래에 참여하는 구원을 설교하신다면 그 구원의 시작은 어디인가요? (또 다른 표현으로는 어느 한 크리스천이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제부터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정도의 가벼운 내용이었습니다. 사실상 목사님 설교말씀에 대부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에, 굳이 확인까지 할 필요도 없었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의미가 크다고 여겨지는 크리스천의 시작점으로서의 과거구원에 대하여 목사님의 제 생각과 다른 몇몇 부정적이거나 가벼운 표현들이 저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다르지 않다는 의견을 확실히 받아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무거운 주제인 거듭난 생명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즉 저의 얄팍한 속셈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까지도 부정하시겠습니까? 라고 여쭈어 보면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한 것이지요. 지금 생각하니 목사님 말씀대로 참으로 순진하고 낭만적인 착각이었습니다.
둘째, 목사님께서 답변으로 주신 구원은 변수고 칭의가 상수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이미 처음 질문에서도 구원을 여러 다른 말들로 표현하였는데, 어느 것이 든 칭의는 반드시 그 핵심내용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것이 너무 기본적이고 당연하였기에 그것을 간과하고 말았네요. 제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배경을 설명하려니 어쩔 수 없이 여간 해서 밝히지 않는 저의 신앙이력을 간략히 소개 드립니다. 저는 상당히 오래 전 1970년대 중반 대학시절에 이미 방언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영향을 받아 방언도 해보았고, 사영리 방식으로 전하는 대학생 선교단체로부터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도 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무엇이 기독교의 진수이고 구원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묻기도 하며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구원의 핵심은 죄인 된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는 것을 믿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그 이후 더 절실하게 찾고 씨름하였던 것은 칭의에 대하여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의 믿음을 어떻게 갖느냐 이었지요. 또한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논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실체적인 삶을 통하여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칭의가 상수라는 목사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그냥 손쉽게 내린 결론이라고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크리스천의 현재적인 삶에서는 세례와 성만찬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가 과거구원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도 동의합니다. 다만 이미 구원을 통하여 생명현상이 시작되었다는 전제하에서이지요. 그렇다면 과거 구원에만 매달리기 보다는 성장하고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당연한 생명의 특성이기 때문이지요. 이때 세례와 성만찬의 의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의식 자체는 본질적 의미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전제도 따라야 하겠지요.
결론적으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현실참여로서의 구원에는 제가 원래부터 동의하였고요. 크리스천 삶의 시작점으로서의 구원에 대하여도 본질적으로 저와 거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크리스천으로서 삶에서 저는 확실한 시작이 중요하고, 목사님은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이 정도는 서로 용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그냥 감사 드린다고 끝맺을걸, 이렇게 부연설명을 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마음도 듭니다만 어차피 작성한 글이니 그냥 올립니다.
2008.09.12 14:59:42
예, 피스 님,
아주 작은 차이를 우리가 아주 크게 생각해서
의견을 조금 나눈 거군요.
간혹 이런 대화도 필요하답니다.
그 작은 차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차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겠지요.
저도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실질로 믿고 고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그게 한국교회에서 자칫 심리적인 자기확신으로 떨어지고 있어서
제가 조금 그런 점에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지요.
좋은 추석 쉬세요.
우리 생명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주인이신 주님의 은혜가.
아주 작은 차이를 우리가 아주 크게 생각해서
의견을 조금 나눈 거군요.
간혹 이런 대화도 필요하답니다.
그 작은 차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차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겠지요.
저도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실질로 믿고 고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그게 한국교회에서 자칫 심리적인 자기확신으로 떨어지고 있어서
제가 조금 그런 점에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지요.
좋은 추석 쉬세요.
우리 생명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주인이신 주님의 은혜가.
안녕하세요.
요한복음의 니고데모와 같은 질문을 주셨군요.
오늘은 제가 설교를 준비하느라, 이 질문에 대답할 틈이 없습니다.
내일이나, 또는 모래,
늦어도 9일 아침에는 대답을 받아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