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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목사님께 질문 올립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한 밤중에 찾아와서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전에 일어났다는 걸 전제할 때
과연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사건 이전에도 얼마든지 인간에게 거듭남이 가능하다는 뜻인지요?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인간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 집니다.
반대로 불가능하다면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지요?
오메가 님,
안녕하세요?
요한복음 3:1-15절에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오지요?
성서용어를 사전풀이로만은 따라가기 힘들어요.
우리는 보통 예수 믿고 거듭나서 의로움을 얻고
성화의 삶을 살다가 영화로운 세계로 들림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단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다층적 해석이랍니다.
즉 하나의 사건을 말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구원, 생명사건이지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도 거듭남이 가능한지라는 질문은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도 구원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에요.
예수 이전의 모든 사람들은 구원에서 제외되었을까요?
아니지요?
신비한 방식으로 이전의 사람들의 구원에도
예수의 시비자가와 부활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게 어떤건지를 우리는 소상하게 알지 못해요.
오메가 님의 질문은 중요합니다.
질문으로 충분합니다.
니고데모 이야기는 제가 3월20일에 할 설교의 본문이었는데,
일본 대재앙 때문에 갑자기 본문을 바꿔었어요.
그때 준비한 초고를 아래에 올릴테니 참고하세요.
위 본문은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 본문에서 ‘거듭남’을 주제로 설교한다. 도대체 거듭난다는 게 무슨 뜻인가? 공관복음서는 니고데모 이야기를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듭난다는 개념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공관복음서는 대신 회심을 말한다. 중생과 회심은 똑같은 말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중생은 헬라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회심은 유대적인 성격이 강하다. 중생은 인간 내면의 새로운 변화를 가리킨다면, 회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게를 둔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중생과 회심을 하나로 봐도 잘못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중생이나 회심 개념을 심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예수 믿고 거듭나서 새사람 되었다는 식이다. 못된 버릇을 고치는 수준의 이야기이다. 공허한 주장이다. 그런 차원의 중생은 다른 종교와 자아 성취 프로그램들이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니고데모 이야기는 니고데모의 변화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갈등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 11절이 하나의 단서이다. 다른 구절에서는 인칭대명사가 단수로 나오는데 11절에서는 갑자기 복수로 나온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유대교를 향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선언이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니고데모가 역사적 실재 인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니고데모 이야기가 꾸민 이야기라는 뜻은 아니다. 이 전승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찾는 게 중요하다. 설교자들은 본문에서 가능한 중심 주제에 천착해야 한다. 주변적인 주제를 말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그럴 경우라 하더라도 중심 주제로부터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 즉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진술은 요한복음 공동체와 대립해 있던 유대교의 주장을 대변한다. 그들은 예수를 위대한 스승으로만 인정했다. 근거는 예수가 행하는 표적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표적에서 확인했다.(고전 1:22)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예수를 그런 스승으로 인정할 테니 당신들도 그래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런 요구를 줄기차게 받았다. 오늘도 형태만 달라진 채로 똑같은 요구와 유혹이 교회 안팎에서 제기된다. 예수를 위대한 도덕 선생, 정신적 스승, 혁명의 기수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더 천박한 요구는 예수를 심리 치료사 정도로 받드는 것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유대교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았다. 선을 분명히 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유대교의 요구는 육에서 난 것이다.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요구를 일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영육 이원론의 시각으로 보면 곤란하다. 인간에게는 영과 육이 모두 소중하다. 그리스도교는 한 번도 육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적이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삶까지도 끝까지 밀고나갔다. 육으로 난 것은 유대교의 주장, 즉 예수를 위대한 스승으로만 인정하는 것이다. 나름으로 고상한 주장이다. 선생은 학생들을 옳은 길로 인도한다. 학생들을 계몽시킨다. 인격적으로 훈화한다. 복지를 향상시킨다. 그것만으로도 선생의 역할은 크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상대적으로 가치 있는 삶으로 안내할 뿐이다. 이에 반해 영으로 난 것은 그리스도교의 예수 인식과 경험이다. 예수를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인식의 패러다임 쉬프트(사고틀 전이)를 가리킨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대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가 메시아라는 주장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 안 되는 것을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의 대상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함의 대상이었다.(고전 1:23) 메시아는 승리자여야만 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예수 사건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적인 시각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보았지만(11절) 유대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이다.
이제 설교의 결론은 무엇인가? 위의 해명이 오늘 청중들의 삶에 어떻게 부닥칠 수 있겠는가? 이건 설교자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다. 자칫하면 관념적인 교리 설명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된다. 세상 사람들이 거북스러워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운명에 동참하자. 예수의 운명에서만 우리가 구원을, 즉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 예수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설교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 현장에는 예수의 운명 운운을 막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청중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다. 늘 이유식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서 가능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청중에게나 설교자 자신에게나 다 유익하다. 청중들이 쉽게 따라가기 힘든 영적인 세계라고 하더라도 설교자 자신이 실제로 알고 설교한다면 결국은 청중들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