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나에게) 누군가?

조회 수 9087 추천 수 0 2009.03.21 17:52:57
 

예수는 (나에게) 누군가?


기독교 신앙의 형태가 가지가지이고, 그 내용의 스펙트럼도 극우에서 극좌까지 다양하다. 개인적인 성품으로만 보면 온순한데 신앙은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이 있고, 학문적으로 열려 있으면서도 신앙에서는 극보수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 어떤 한 가지 기준으로 신앙의 색깔을 구분할 수 있는 여려 기준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핵심은 결국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도 질문했다는 그 질문이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라 하겠다. 제자들은 엘리야, 세례 요한, 예언자 등등의 대답을 했고, 베드로가 정확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보도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편집되었기 때문에 이것의 역사성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신약성서는 어떤 점에서 미로인지 모른다. 예수는 누군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미로 말이다.

1985년부터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 크로산을 중심으로 소위 <예수 세미나> 신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지난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도 반짝하다가 요즘 다시 그런 움직임이 힘을 얻는 것 같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신약성서 기자들에 의해서 해석된 예수가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를 추적한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물론 크로산은 교회 내외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 그런 업적을 이루었다. 1991년에 출판된 “역사적 예수-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가 바로 크로산의 저서이다. 그는 예수가 천민 계급 출신이라고 언급했다. 그 당시 유대인 민중의 98%(?)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예수도 역시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를 읽었다는 보도는 초기 교회의 창작이라고 한다. 읽은 게 아니라 새롭게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만약 예수가 천민에 속했다면 회당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오늘 나는 크로산의 <예수 세미나>를 본격적으로 언급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크로산이 실증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겠다는 그 프로젝트가 과연 그럴만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의 작업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런 방식으로 예수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신약성서라는 그 문서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약성서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단서와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그런 작업은 별로 큰 의미는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이 이미 구원론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 삼일운동 사건이 있다고 하자. 그 운동은 이미 한민족에게 구원사건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운동의 객관적 사실 이전에 이미 해석된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요즘 <다빈치코드>라는 소설과 영화가 인기를 끈다고 한다. 거기서 예수는 결혼했으며 그 후손들이 있는데, 교황청이 그 후손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개입될 것이다. 그 소설을 읽지 못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충 교권 사이에서 얽히고 얽힌 이 사연의 핵심은, 물론 보기에 따라서 다른 게 핵심이라고도 말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예수의 결혼과 그 후손의 역사성이다.

이런 소설은 단지 흥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회 내부의 근본주의자들에게 볼 수 있는 대로 예수를 극단적으로 신성화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예수 세미나와 다빈치코드 유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대로 예수를 극단적으로 인간화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극단화는 모두 문제가 있다.

예수가 화장실에도 가지 않았던 것처럼 말하거나 예수도 역시 성적인 욕망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를 이해하는 데 방해 요소이거나 무의미한 것들이다. 예수는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셨다는 게 초기 기독교인들과 오늘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이다. 물론 이런 명제는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렇다. 예수라는 한 인격체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신비한 방식으로 일치했는지를 설명한 게 곧 신약성서이다. 우리는 지금 그걸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종말론적인 의미와 현실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작업이 불안하다고 해서 양극단으로 치우친다는 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굳이 기독교인일 필요는 없다. 휴머니즘에 입각해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사는 데만 신경을 쓰면 그만이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인들이 가장 어리석다는 바울의 진술은 이런 점에서 옳은 지적이다. 



[레벨:5]루이스

2012.07.09 14:00:38

인간은 동물학적 섭생과 배설을 통해 인간의 인간됨을 이루어 갑니다

인간됨의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얼마나 먹었느냐가 아닌

자신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적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그리스도가 제자들에 의해 해석되어진 부분이 있다라고 하더라도

문맹이었던, 인간조건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있던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것은 진리이죠

 

그런데 한 가지...예수님 당시 제자였던 신약을 기록한 제자들의 진술보다 이천년 이후에 나타난 제자의 말을 더 신뢰하시는 둣한 뉘앙스에는 조금...

어차피 못본 사이는 같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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