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재림

조회 수 10798 추천 수 0 2009.03.26 00:02:21
 

예수의 재림



대림절(Advent)이라는 단어는 도착(영:arrive, 독:Ankunft)을 뜻한다.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오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듯이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기다리면서 대림절을 보낸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대림절 기간만이 아니라 한해 전체가 바로 기다림의 시간들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목을 매고’ 사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모를 게 하나도 없다. 2천 년 전 초림하셨던 바로 그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말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돌리면 이 사실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그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바로 그 모습인가?

그 당시의 예수님은 삼십대 초반의 유대인 한 남자이셨다. 공생애 이전에는 목수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재림의 예수님이 바로 그런 한 유대인 남자라고 한다면 오늘 여자들이 반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의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이미 부활체로 변형하신 예수님에게서 그 이전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예수 세미나’에 속한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인 ‘역사적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으며, 바로 그 모습으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하신다는 뜻인가? 만약 구름을 타고 재림하신다면 지구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재림하는 쪽에 사는 일부만 그 광경을 목도할 것이다. 한국에 재림하신다면 티브이 중계를 하면 모를까 브라질에서는 그것을 직접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구름을 통한 승천을 바로 재림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구름 사건은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신화적 서술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화적’이라는 말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이런 태도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오늘 우리의 세계관도 많은 세월이 흐르면 신화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신화적인 세계관 안에서 살았지만 그들이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어떤 궁극적인 실질을 경험했고, 그런 방식으로 서술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말의 실체적 진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걸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재림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바로 그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씨앗이 땅속에서 움을 트고 땅밖으로 나와야 세계를 경험할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그것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재림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존재유비를 발견할 수 없다.

예컨대 지금의 세상에서 우리는 밥을 먹어야 사는데, 밥을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저 세상을 우리가 무슨 수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말하지 그 재림으로 실현될 생명의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에 의해서 생산되지 않는 그 생명의 세계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된다는 신앙이 곧 대림절 신앙이요, 재림 신앙이다.

재림이 일어나야만 재림의 실체를 알 수 있다면 결국 예수님의 재림은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성서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세상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누누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심판도 그중의 하나이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대심자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무엇인 참이고 거짓인지 그가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 판단은 단지 교회에 다녔나 아닌가, 더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인가 아닌가의 기준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생명의 기준으로 실행될 것이다.

진리가 온전히 드러나는 심판을 통해서 이 세상은 완성될 것이다. 세상의 완성은 곧 영생이다. 그 영생이 종말로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며 열매라 할 수 있다. 이 영생은 종말에 시작하겠지만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선취(先取)되었다. 기독교인은 영생이 온전히 실현될 종말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살아간다. 그 영생이 실현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은 오늘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지 논증해야 한다. 우리가 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지를 변증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현실이 구체화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다. 이것을 유보하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대림절이 교회력의 시작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예수님은 곧 오신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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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9.03.26 14:28:37

구원이나 부활이 사람이 생산할 차원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를 설명하거나 인지할  인식체계를 갖고 있지도 않을진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담론과 활동의 장이 될 수 있는 곳은
역시 '지금 여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소위, 근본주의적 보수성향층의 사람들에게나 
개방적 진보성향층 사람들에게나
주님의 재림앞에 우리 인식의 알량한 밑천이 쪼개지지 않을 자가 있을까요?
참과 거짓이 분별되고 생명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통치앞에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라고 누가 주장할 수 있을까요?
지금 여기서의 신앙이 우리에겐 전부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신앙의 긴장감이 필요합니다
가능하다 장담할 순 없지만
이 땅의 이데올로기와 우상에 속고싶지 않습니다
눈앞을 가리는 희뿌연 부유물들을 거둬내는 것이 나를 이끌고 갈,
주님의 재림으로부터 오는 밝은 빛을 감지하는 최선의 행위가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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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3.26 17:46:03

우선 작은 글쓰기 문제부터 짚구요.
<역시 '지금 여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라고 썼잖아요.
... 생각합니다, 해야 한국말이 되는 거지요. 음흠.

지금 여기서는 중요하기도 하고, 중요하지 않기도 해요.
중요하다는 건 그것이 사유의 실존적 자리이라는 거구요,
중요하지 않다는 건 자칫 역사가 실종될 위험성이 있다는 거에요.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투쟁하되
역사적 맥락을 놓치면 곤란하지요.
이런 점에서 역사적 맥락에 자리하고 있는 정통 신학(fundamental theology)은
우리의 신앙과 사유의 근본토대랍니다.
시그림 님,
이거는 정말 중요한 문제니까 잘 생각해야돼요.
예컨대 사도신경을 우리가 예배 시간에 더불어 신앙고백으로 암송하잖아요.
어떤 이들은 사도신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의 신앙에 매물되면 그런 역사적 고백문들이
하찮게 보이는 거에요.
이런 현상은 주로 신앙의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는 이들에게 나타난답니다.
그런 운동이 18,19세기에 나타났어요.
가장 극단적으로는 침례교회 운동이지요.
그들은 개신교 정통주의(17세기)를 로마가톨릭과 같은 교권주의로 생각하고
신앙의 중심을 개인에게 둔 거지요.
수천년 동안의 신앙적 역사를 포기하고,
즉 신학적 영성과 신조와 교회 권위를 타파하고
오직 개인이 지금 여기서 성령과 소통하는 것에만 몰두한 거지요.
청교도운동, 각성운동, 부흥운동이 거의 이런 흐름에 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모던 신학도
이런 흔적을 보인다는 거지요.
사도신경을 무시하고,
삼위일체 신앙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몰아가고,
케리그마 자체를 부정한 경향이 있지요.
<예수 세미나> 계통도 이에 부합할 겁니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기독교 역사 자체를 불온시 합니다.
초기 교부들이 인간 예수와 신 그리스도의 문제를 두고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알지 못하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걸 외면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위에 거론된 신학과 교회 운동들의 특징은
바로 역사 실종이라는 겁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역사 망각이죠.
시그리 님이 거론한 '지금 여기서'에 집중하느라
지금 여기에 실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포함된
전체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거지요.
무슨 말인지 전달이 되나요?
이렇게 기독교 역사가 축소되고 지금 여기만 강조될 경우에
기독교 신앙은 포퓰리즘에 빠질 개연성이 높답니다.
왜 그런지는 여기서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겠군요.
독일어를 사용해서 미안한데,
'로테 파덴'이라는 숙어가 있어요.
'붉은 실'이라는 뜻이에요.
구약, 신약,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오롯히 붙잡아보려고 했던 붉은 실을 
오늘 우리도 붙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건 단절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말까지 이르는 전체 역사를 관통하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우리는 실증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서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 있답니다.
그 붉은 실의 끝자락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지금 여기서 생명현상과 투쟁하고 어울리되
이미 수천년전부터 이어온 그런 투쟁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바로 기독교 전통의 가르침에 면면이 놓여 있다른 사실에 
눈을 감지 마시오.
그 사실에 마음을 설레보시오.
평화로운 목요일 늦은 오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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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9.03.26 18:08:21

목사님, 길고 친절한 답글에 감사!
그런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말하는 '지금 여기'는 시간적인 표현이라기 보다
공간적인 표현입니다
가늠할 수 없는 피안이 아니라
살아 생활하는 차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식사시간에도 살짝 느꼈지만
혹시 염려하고 계시다면 염려놓으세요~^^

[레벨:6]에덴나라

2010.06.03 14:20:49

 

하나님도 이 세상(차안)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신것이지요. 

 

 '미래의 종말'이 사람들을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마음 먹게 할뿐만 아니라

'미래의 종말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그 행동들은

현실에 충실하고 있음을 봅니다

 

 

[레벨:8]박찬선

2009.03.26 21:50:31

목사님!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팀장님이 밥먹고 가자고 해서 졸래졸래 따라 나섰는데,
술을 따라 주시더니 금새 회식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퇴근 무렵 목사님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고 싶었는데,
한잔 두잔 들어갈 때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꽤 취한 상태에서 다시 회사에 들어와 댓글을 답니다.
제가 처해 있는 '실존'에 대한 이해를 구하며...

댓글을 달고 싶었습니다.
최근 구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몸으로 하는 신학에 대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하는 신학이라고 말을 했었잖아요.
제가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실존의 자리가 때론 역사 실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
중요하기도 하고 중요하지도 않기도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습니다. 빵이래도 좋습니다. 그것을 먹어야 하루를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밥을 입에 넣는 사람도 있습니다.
방법이 어찌되었든 밥이 몸속에 들어가야 그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실존이겠지요.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부인하고(망각하고) 살아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실존의 문제는, 중요하다 아니다라는 가치 판단으로 평가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직시하느냐 부인하느냐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실존에 매달리는 신앙과 정통 신학은 비교 대상도 아니고,
진자의 좌우측은 더더욱 아니고, 단지 각각 차지하는 역할이 다른 것 같습니다.
즉, 정통 신학을 따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차치의 문제로 두고서라도
누구나가 실존의 프리즘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기본 토대로 두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역사 실종을 우려하는 목사님의 우려가 공감이 되지만 그것을 실존 신앙을 
강조하는 자라면 누구나가 당면하는 위험으로 인식하시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너무 
긴밀하게 보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사람은, 
아니 사람얘기하지 말고, 저는, 박찬선은
지금 2009년 3월 26일 9시 43분 1초, 2초, 3초를 계속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순간이 너무나 찰나여서 계속 과거로 돌릴 수 밖에 없는데
어느 한 초를 잡았다고 생각을 하고 단순 비교를 해 본다면 이 순간 동시에
1988년 3월 26일 9시 43분 1초, 2초, 3초에 속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저의 시간적 한계입니다.

또한 현재 경기도 파주시 금촌2동 781-1에 있는 저는,
동시에 어디 다른 곳에 있을 수는 없겠지요. 이것의 저의 공간적 한계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실존의 가장 간단한 이해이지요.
여기(공간)라는, 그리고 지금(시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실존.

비단 이것뿐 아니라 인간의 실존은 훨씬 광범위하고 다양하겠지요.
제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신앙 생활을 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요?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모른채 내가 현재의 나의 실존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경험되는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의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 더 쓰고 싶은데 쓸말이 생각이 안나네요. 집에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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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3.26 23:25:02

우하하하...
역시 박찬선이야!
술 취해서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제 자리를 찾아간단 말이야.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모른채 내가 현재의 나의 실존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경험되는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의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 더 쓰고 싶은데 쓸말이 생각이 안나네요. 집에 가야겠어요^^>
자네가 이미 답을 다 말했네.
지금 여기서의 실존적 경험과 하나님의 계시를 일치시킬 수 없다는 말이군.
그게 정답이니 더 이상 내 설명이 필요 없겠네.
그래도 한 마디 하면,
몸의 신학은 추상으로 떨어질 개연성이 높다네.
말해보게나.
몸이 무언가?
몸의 실체를 알 수 있나?
몸과 영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아시겠나?
우리 몸이 단순히 단백질 덩어리인가?
나는 나의 몸을 잘 모른다네.
몸을 모르는데 어찌 몸의 신학을 할 수 있겠나.
지금 내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들에게
충실하겠다는 뜻이라면 그건 틀릴 게 하나도 없다네.
나도 그런 즐거움을 아니까.
지금 이렇게 중력을 느끼는 내 몸이 얼마나 놀라운 피조물인지
우리가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나.
그러나 우리 몸은 그렇게 믿을 게 못된다네.
간사하지.
곧 흙이 되고 말겠지.
내가 영육이원론의 시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자네가 이미 잘 알고 있을 거네.
하나님의 숨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성서의 진술을
흘려듣지 말게나.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이라네.
기독교 예배는 바로 그 사실에 집중하는 우리의 태도라네.
예배는 우리의 몸을 최소화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에 영혼의 귀를 기울이는 거라네.
자, 오늘 푹자고,
내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일어나시게나.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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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9.03.26 23:34:38

후후후.. 목사님께 선물달라  떼 쓰질 않나,
회사 직원 일러 바치질 않나, 찬선님은 확실히 떼쟁이 군요. 하하.

[레벨:12]라크리매

2009.03.26 23:43:26

찬선씨의 결말과 목사님의 글사이 공감지대가 형성된건가요?
내일이 기다려지네요...^^
전 두분의 의견이 다르게 읽혀졌는데..

근데 목사님 전 몸을 안다기보단 느낀다로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감각질이상의 센서가 이미 우리 몸안에 있는 것을 경험해서요
six sense....그럼 평안한 밤 되세요

추신:인간의 몸도 믿을게 못되지만 인간의 이성도 믿을게 못되던데
         철학적 방법으로 신학을 풀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요  (27일 아침에...)
profile

[레벨:29]유니스

2009.03.26 15:57:03

이 단상을 읽으면서 계속 야곱의 사다리가 생각이 납니다.
육체의 일상에서 자꾸만 망각하고,
그 맥락이 소멸되는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
이 단상으로 다시 추스려봅니다.

육에서 영으로,
일생에서 영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땅에서 하늘로...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다리 말입니다.
요즘 목사님의 단상을 계속 홈피에 퍼가는군요...ㅎ
늘 마시던 물의 맛을 새롭게 알아갑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3.26 17:58:40

늘 마시던 물의 맛을 새롭게 알아간다니,
유니스 님은 지금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 중심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야돼요.
한국교회에서는 수구보수, 교권, 문자주의를
정통이라고 착각들 하거든요.
정통은 말 그대로
2천년 기독교 신앙의 중심축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주로 신조(creed)에 나타납니다.
사도신경도 신조구요,
니케아, 콘스탄티노풀 신조도 그렇구요.
장로교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웨스트민스트 신조아
아우그스부르트 신조도 그렇습니다.
그런 신조의 초기 모습은 
신약성서에 많이 들어있지요.
이런 신조는 신앙의 역사를 담고 있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역사의 한 시점을 살고 있지요.
전체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순간이 해석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경험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비슷하게 될 겁니다.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늘 마시던 물의 맛을 새롭게 알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부럽습니다.
유니스 님에게 홈피가 있어요?
여기 공개해보세요.
 
profile

[레벨:23]모래알

2009.03.26 20:26:47

정 목사님!
제가 어릴 적부터 섬기던 장로교 교회들에서는 교회력에 대해서 별로 많이 가르치지 않았어요.
한인교회들이 너무나(!!) 많은 뉴욕에서 이십 년 넘게 살면서 여전히 장로교 보수(^^) 교회를 섬기다 보니
다비아에 들어와서 읽는 많은 글들에 처음엔 어리둥절 했었답니다.
그래서 유니스 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물 맛"에 대해 조금은 알 거 같아요.

위에 말씀하신 장로교의 금과옥조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장로교 아닌 교파에서는
어떻게 설명되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참.  제가 다비아에 가입하게된 연유를 말씀드린다면.. 
우선은 설교비평이었구요. 
그 다음은 포토갤러리가 회원들에게만 열리기 때문이었어요.
박영선 목사님 설교비평에 대한 열띤 덧글 들을 읽다가
테니스 시합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1.  그 시합 결과가 몹시(*^^*) 궁금했지요.
      박 목사님 처음 한국에 들어오셨을 때 저희 교회에서 몇 번 설교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때 정말 시원한 물 한바가지 얻어 마신 기분이었거든요.  거의 30 년 다 되가는 그 옛날입니다. ㅎㅎ
2.  지금처럼 글 밑에 목사님 사진이 덧붙어 있지 않은지라 정용섭 목사님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분인지 궁금했지요.   
     왜냐?  글쎄요. ㅎㅎ       

가입 후 처음 읽기 시작했던 글들이 신학단상이었어요. 
사랑채 그런 거 있는지도 몰랐는데 어느 날 어느 분이 안채에서만 논다고 태클을 걸어오셨죠.
그 분도 지금은 안채에 방 하나 얻으셨는데.. ㅎㅎ

조금 분위기를 깨뜨려 죄송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아침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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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3.26 23:30:09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해서는
그냥 제목만 알지 내용은 잘 몰라요.
그러나 정통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겠죠.
다비아에 들어온 사연이 있었군요.
박영선 목사님니라....
세상 인연이라는 건 기기묘묘하네요.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엮여져서 살아가는데,
그냥 혼자만 잘난척 할 때가 많으니, 우습지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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