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보편적 가치



4: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 8,9절은 1절에서 이어지는 구절이라고 합니다(바르트,  프리트리히, 하우푸트, 틸만, 빈센트 외). 제가 볼 때도 그래야만 그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4장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일반적 권면과 감사와 인사로 짜여져 있지만, 이 세 구절만은 3장에 기록된 대로 손할례당으로 일컬어지는 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에 포함됩니다. 제가 독일어 성경을 기초로 해서 세 구절(1,8,9)을 다시 번역해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나의 기쁨이며 나의 영광입니다. 주님 안에서 이렇게 굳건히 서십시오.

8. 더욱이 형제들이여,

변함 없이 참되며,

경건하고, 정의로우며,

순결하며, 사랑 받을만하며, 칭찬 받을만하며,

그 어떤 덕이 있거나, 어떤 명예가 있든지

이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9. 내게서 배운 대로, 내게서 받은 대로

내게서 듣고, 본대로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세 구절에서 각각 어떤 명령어가 등장합니다. 1절, 굳건히 서시오. 8절, 깊이 생각하시오. 9절, 그대로 행하시오. 그가 이렇게 명령조로 말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설교자들의 위험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장에서 격렬한 논쟁을 전개한 후에 시적인 운율을 통해서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서, 그를 생각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절에는 일종의 덕목에 관한 목록이 나옵니다. 흔히들 8절은 철학적 도덕을 인정한 것이며, 9절은 기독교적인 도덕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지 8절에 거론된 이 덕목들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기독론적인 덕목들과 비교할 때 약간 유별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분명히 스토아 도덕철학이 말하는 것들과 유사합니다(디벨리우스). 여섯 개의 형용사와 두 개의 명사로 된 이 덕목들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참된, 경건한, 정의로운, 순결한, 사랑 받을만한, 칭찬 받을만한, 덕, 명예. 아마 이런 덕들은 로마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스토아적인 덕목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것들이 새로운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도덕철학적인 명제들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라는 명령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 말미에서 이러한 스토아적인 덕목들을 거론했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바울의 주장이 자칫해서 무율법주의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윤리와 도덕까지 폐기시키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보편적인 윤리와 가치들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론과 이 세상의 보편적 가치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한다는 생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행위와 사유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이 짐을 싸들고 광야로 나가든지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해 버려야 한다고 하나님이 원하실 리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보편적인 가치에 치중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초월성이 간과된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그리고 종말에 우리에게 재림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 일반이 되거나 윤리 공동체로 떨어질 것입니다.



리챠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기독교 신앙과 세상의 문화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섯 유형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가 서로 대립적이라는 주장입니다. 중세기의 수도원이라든지 소종파 운동에서 이 세상의 문화는 철저하게 배격되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가치만 추구되었습니다.

둘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주장으로서 첫 유형과 정반대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인간 문화사의 위대한 영웅으로 나타납니다. 19세기의 유럽 문화 개신교주의가 대표적입니다.

셋째 유형은 그리스도의 문화적 성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연속적인 것만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부분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종합적 사상이 이를 대표합니다.

넷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이중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일종의 역설적 관계를 말하는데, 마틴 루터의 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유형은 일종의 개변주의자(conversionist)의 입장으로서 첫째와 넷째 유형에 서서 문화의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배타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그것의 변화를 역동적으로 일으키려고 합니다. 어거스틴과 칼빈이 이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물론 기독교 사상을 위에서 언급한 이 다섯 유형에 모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기독교 사상이 이 세상 문화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왔는지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준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어쨌든지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늘을 희망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이 땅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지평에서 인간의 생명이 완성될 날을 기다리면 살아갑니다. 즉 기독교 신앙은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합니다. 이런 토대에서 인간의 행위를 규정해 나갑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보편적인 윤리는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어떤 가치 질서들을 세워나갑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옳게 생각하고 믿는다면 세상의 덕목들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과 그 한계를 적발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오히려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 세상의 선한 질서에 의해서 수모를 받게 됩니다. 예컨대 누가 보더라도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 교파분리는 이 세상의 가치들보다 훨씬 경박하고 위선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사건에 우리가 충실하기만 하다면 세상에서 분명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영광 보다 앞서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의와 사랑과 인내와 자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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