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영적인 삶을 향하여



4: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이곳 23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 때 사용한 예전적인 표현방식입니다. 이것은 빌레몬 25절과 완전히 일치하며, 갈라디아서 6:18과도 역시 거의 일치하고, 고후13:13에서는 훨씬 확장된 표현 방식으로 발전합니다. 빌1:2에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말이 들어갔는데, 여기서는 그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표현 방식은 서로 교환될 수 있기도 합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 공동체의 실존을 강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바울은 빌립보서의 끝인사를 이렇게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초대 기독교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주인이며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문장에 기독교의 모든 신앙적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영)에 함께 한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심령(Geist)이라는 단어의 뜻을 먼저 명확히 해야만 합니다. 요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바로 거룩한 영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며, 성령도 영이시고, 예수님도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신다는 면에서 현재 영으로 존재하신다고 볼 때 우리의 신앙적 인식과 경험의 자리는 바로 영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이 영은 무엇일까요? 육체와 반대되는 어떤 종교적인 느낌이나 인식을 말할까요? 예술적인 감각이나 지성적인 영감을 말할까요? 인간이 죽은 다음에 존재하게 된다는 그런 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또한 우리의 영과 하나님은 똑같은 것일까요? 혹은 동양 사상에서 말하는 기(氣)나 도(道)인가요? 우리는 그 영의 실체를 우리의 인식 체계 안에서 규정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 하나님이 완전히 계시될 종말에나 가능하겠지요. 다만 우리는 생명을 창조하고 유지시켜나가는 어떤 힘을 통해서 영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 볼 수는 있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이 우리로 하여금 영이신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비록 매순간 죽음을 향해서 파괴될 운명 안에서 살아가지만 어떤 존재로 변화될 것인지 아주 확실하게 약속해 줍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과 축복만이 무상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생명의 기쁨 안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가 영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영적인 가치에 한국 교회의 실존을 걸어두겠다는 각오니까 그만큼 교회의 본질에 다가간 셈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도 교회 부흥이 안되니까 또 하나의 방법론으로서(know how) 이 영성을 들먹이는 게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노파심이 정말 경망된 생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또는 앞으로 바람직한 영성 훈련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라도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이 영성이 어떻게 이해되고 각인되어 있는지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현장에서는 일견 두 가지 관점에서 이 영성 문제가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순전히 주술적인 의미에서 어떤 신비한 실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독심술이랄까, 투시랄까, 마술이랄까, 혹은 남의 운명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예언과 같은 그 어떤 능력을 가리켜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능력이 보이는 사람을 영력이 크다고 말합니다. 이런 거야말로 기독교의 영과는 아무 상관없는 여러 종류의 인간의 주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특이한 현상에 불과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의 깊은 죄의식과 연관된 것으로서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기쁨이나 자유의 그 어떤 정신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성 훈련을 하는 곳에서는 기독교인의 죄의식이 매우 심각하게 강조됩니다. 죄의식이 깊을수록 영의 경험도 깊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죄에 물든 실존으로 인식하고 그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이것은 기독교적인 면에서 볼 때도 매우 귀중한 신앙적 체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런 죄의식을 그 본질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이런 문제는 니체나 프로이트나 마르크스에 의해서 충분히 분석된 바 있습니다. 니체는 무신론을 통해서 인간의 죄의식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해방이라고 보았으며, 프로이트는 종교를 죄의식의 집단 노이로제라고 보았습니다. 어쨌든지 교회가 신자들을 죄의식 빠져서 늘 불안하게 살게 한다면 그것은 창조와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성서의 선포에서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나 잠재의식에 있는 죄의식을 각성시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으니 땅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에 부합해서 살아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인은 교회에 나와 앉았다 하면 눈물을 짜고, 심지어는 집단적인 히스테리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젊었을 때 보았던 부흥회는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것으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겠죠. 무지하게 슬픈 영화를 보면서 손수건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듯이 말입니다.

영성은 그게 아니라 생명의 영에 사로잡힘으로써 확대되고 충만해집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심리적인 자기 발산이나 자기 고백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고 지금도 그 창조를 유지하고 미래에 그것을 완성하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통치하도록 나를 그분의 힘에 맡김으로써 우리의 영도 충만해집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죄책감이 아니라 생명감에 사로잡히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영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축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 밖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extra nos, in Christo)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성에 근거해서 기독교인은 영적으로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4장에 불과했지만 우주론적인 넓이와 깊이를 가진 빌립보서를 공부했습니다. 굳이 결론을 따로 되짚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전체 타이틀을 "땅과 하늘"이라고 뽑았기 때문에 이런 구도에서 한 마디만 붙인다면 이렇습니다. 이 땅에 두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봅시다. 땅이 역사라고 한다면 하늘은 그것의 초월입니다. 땅이 현재라고 한다면 하늘은 미래입니다. 땅이 예수의 십자가라면, 하늘은 예수의 부활입니다.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지향하고, 하늘을 지향하지만 땅에 충실한 이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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