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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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시절부터 거의 마흔이 되기까지 저의 신앙의 아이콘은 비장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숨을 다 바쳐..’ ‘형제를 위해 죽기까지..’ ‘온 몸 다해.. 온 맘 다해..’ ‘죽기까지 복음을..’
이런 말들이 저의 눈믈과 심장을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말들에 의한 주기적인 자극이 저의 신앙을 이끌어 왔지 않나 생각합니다.
선교사가 될까? 하던 시절도 있었고..
제 사춘기의 큰 추억으로 남아있는 ‘중교등부’의 부장집사가 꿈인 적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중고등부 교사를 한 10년 정도를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비장함이 필요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장함은 ‘나’라는 존재를 이끄는 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연’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심연이라기 보다는 더 성숙한 것이라고 표현해야 되나요?
며칠 전에 화장실에서 폴틸리히의 설교집을 다시 펴든 적이 있습니다…^^;;
‘심연’에 대한 설교였는데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표면’에서 실재에 가까운 ‘심연’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서 지난날의 ‘비장함’이 혹시 ‘표면’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장하던 시절에 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원론적인’ 삶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시간에 있어서 성(聖)과 속(俗)은 분명하게 나뉘어졌습니다.
교회와 선교단체와 동료 교회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또 캠퍼스 신앙선배들과의 시간은
저에게 있어서 세상의 속(俗)된 시간들을 벗어날 수 있는 해방구였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끝나갈 때의 아쉬움이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좀 더 어른이 된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심연’으로 들어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성(聖)과 속(俗)의 차이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저의 생업인 환자를 진료하는 시간들이 힘들기도 하지만(모든 사람이 다 힘들 것입니다)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지금도 인생(신앙보다는 인생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인생의 동지들을(형제자매 보다는 이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만나는 시간들이
설레임으로 기다려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전보다는 덜해졌습니다.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인생들을 만나는 시간과의 차이도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요새는 저와 생각이 다른 교회의 형제자매를 만나는 시간이 제일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조금은 가벼워 진 것 같습니다.
저의 생각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가벼움’은 통상적으로 기독교적이 아닌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동양종교나 뉴에이지 같은 것이 ‘가벼움’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겠지요.
하지만 저의 현재의 수준에서 예수의 말씀은 비장함보다는 가벼움으로 더 다가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주는 멍에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나는 새들도..’
‘맹세하지 말라..’
우리 삶의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가볍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 부모와 형제를 버려야 한다’는 말씀도 비장함보다는 가벼움으로 다가옵니다.
가벼워지지 않고는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잘 해야 한다는’ ‘남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들에서도 가벼워 졌습니다.
이런 가벼움을 ‘자유’라고 표현해야 하나요?
가벼움이 ‘성의 없음’을 극복해야 하는 숙제는 있습니다.
‘안되면 말고..’도 극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되면 말고..’가 꼭 나쁜 것 같지는 않네요..ㅋㅋ
꼭 기독교가 아닌 불교나 힌두교의 ‘선생’들에게서는 배울 수 없다는 선입견도 없어진 것 같습니다..
참람한 것은 아니겠지요?
하긴 요새는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겁이 좀 많거든요(와인을 한 잔해서 별 소리를 다 하는군요)
사도바울은 비장하고 예수는 가벼웠나요?
사도바울은 비장했지만 가벼웠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나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무거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 때의 상황이 바울을 비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비장함과 가벼움이 꼭 대조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표면에서 좀 더 심연으로 들어갔다고 생각되는 저의 삶에서는
그 차이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현재의 가벼움에서 더 심연으로 들어가면 다시 비장함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더 심연으로 들어가면 (폴틸리히가 설교에서 말한 대로)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이 나오겠지요?
우리는 현재를 뛰어 넘어 실재에 가까운 심연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만
성숙보다는 ‘앎’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생을 알수록 인생은 가벼워질까요?
지금은 마음껏 가벼움을 즐기고 싶습니다.
분명 내년에는 좀 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지금은 '가벼움'이 너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