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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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신학' 게시물 밑에 적으신 많은 분들의 리플을 읽는 동안
궁금증이 뭉게뭉게 피어나서 무식한 글 여러 자 적어봅니다 ...
신학을 모르는 입장에서 리플들을 읽어보니,
대충 주 논점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는 바인데 ..
결론 부터 말씀드리자면 용남형제님에게 한표를 던져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우선, 이런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
"배고픈자에게 빵을 주면 성자고, 배가 왜 고프게 되었나고 물으면 공산주의자다."
현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해방이 신학적 존재론(?) 에서 존재의 부름에 대한 요청이라고 하시는데,
단순하게 말해서 가난한자들을 현실적인 가난과 소외로 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부름이고,
이런 부름에 대한 응답, 즉 혁명( 내적이든, 외적이든 )이 하나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씀인가요??
용남형제님이 말했던 구속사적 역사이해가 달의 한쪽면이라고 한다는데에 일견 동의하는 반면에,
이런 혁명이 하나님의 대한 부름과 요청이라는, 달의 또 다른 면이라는 데에는 왠지 하나님을 격하 시킨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왠지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이해가 먼저 떠오른 건 제 짧은 지식었을까요??
이런 역사이해에서 변증법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이 전개되는데 ..
임마뉴엘님의 말처럼 여전히 물질로 떨어진 정치적 지도자이자 해방의 주역인 예수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인간 해방의 주역이었나요??( 정말 몰라서 ... ㅠㅜ )
제가 생각하는 것과 용남님 반대편에서 주장하시는 분들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글 중에 맑스를 언급하시면서, 맑스를 간단히 평가하는 입장으로 적으셨던데 제 눈에는 그냥 신학자의 맑스입니다.
도대체 어떤 또다른 신학적 이론이 뒷받침이 되길래, 계급과 해방을 말하면서 맑스를 마치 옆집 아저씨가 이런 말했다드라 정도로 취급하는 것일까요?? 단지, 맑스가 무신론이라는 이유로 약간은 치사하게 말을 돌려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오바인가요??
"오늘날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을,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와 대립시킴으로써 정치적 명령을, 분류된 저작에 대한 차분한 주석으로 중립화하려는 시도, 어쨌든 약화하려는 시도다. " - 마르크스의 유령들 中 -
이러한 데리다의 경고를 생각했을 때, 아예 돌려 말하는 신학자의 시도가 제 눈에는 비양심적으로까지 보입니다. ㅠ
결과적으로, 상황신학(민중신학??, 처음 들어봄..) 이라는 것이 결국 데리다가 말한 '맑스의 유령' 이 아닌가 하는것이 제 강력한 심증입니다 ...
결국, 맑스의 유령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
이 생각이 틀렸다는 답글을 듣고 싶습니다.
존재의 신비로움을 본자가 '아~ 참 신비롭네~' 와 보지못하고 전해들은자가 '신비로운 거구나~' 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가 보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신비로 채색해보려는 '신비' 아닌 '신비' 와 진짜 '신비' 와는 조금 다른 것 아닐까요?
또한 '신비가 신비라 불리면, 항상 그러한 신비가 아닐'진데, 신비 그것을 신비라 불렀다고 '그거 그렇게 말하면 안대~' 라는 식은 아닌거 아닌가요??
다시말해, 알아 들은 사람은 걍 염화미소를 보내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ps1]
글 쓰는데에 별루 자신이 없고,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부족한 지식이 있다면 채워주시고,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아 ~~ 왠지 실망감이 먼저 들까요?? ㅠㅠ
( 차성훈님의 성실한 댓글이 아니라 ... 해방신학이나 그 비슷한 것에 ... )
저는 용남형제님의 존재-신앙 과 기타 유저님들의 윤리-당위가 두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
버스 비유에서 ... 비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거등요 ...
제가 생각하는 역사는(기독 역사관에 대한 공부 전혀없이) 무위자연 같은거?? 몰아지경?? 신비?? 머 이런걸 생각했거등요 ...
그래서 안팎이없고, 하나님과 하나됨, 성령과 하나됨을 통해서 하는 모든 일은 곧 존재-신앙적인 동시에, 당위-윤리적인 것이 아닌가 했거등요 ...
근데, 해방신학은 ... 그냥 기분상 ... 좀 ... 슬프네요 .. 우어어어어엉 ㅠㅠ
글고, 저는 맑스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요 ... 오래전에 읽었던 파리초고, 읽다 만 자본론 등 맑스 관련 서적들 더듬더듬 생각나는 한에서 적어본 것이기에 ... 그 때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많은지라 .. ㅠ
암튼, 소중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__)
먼저 퀄리아님에게 제가 댓글 단것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같아 부연설명 할께요
저도 존재-신앙과 윤리-당위를 이분화해서 바라보는 것에 찬성하지 않아요 윤리-당위를 주장한 적도 없구요 다른분들도 그부분에서 윤리-당위를 강조하고 존재-신앙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였지요
신학적인 용어와 글이 길어서 그렇지 내용은 어려운 얘기도 아니였어요 같은 얘기만 맴돌았구요
어떤 철학이나 형이상학, 전통기독교든 민중신학이든 그자체를 맹신하면 그게 바로 物신숭배겠죠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은 개개인마다 다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게 아닌가 합니다
신앙의 응답적 고백이 민중을 향하든 전통교회를 향하든 개인의 지적성찰로 향하든
모두 각자를 향하신 뜻과 과정이 있는 것이구요
저의 의견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해서 볼수 없다는 것과
영적인 문제는 현실의 삶,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선 해결될수 없다는 차원에서
현대철학자들이 막스의 이론을 왜 지금 다시 리바이벌하여 자신의 철학에 차용하는지 생각해봐야겠지 않나하는 것이였어요
역사적 예수운동이나 민중신학을 한물간 좌파적 운동으로 치부하는 것도 분명 아닌거 같구요
공산주의는 멸망했지만 자본주의가 갖는 모순도 만만치 않다는 경제학자들의 의견들이 많고
노동의 종말, 노동의 소외를 우린 이미 현실적으로 겪고 있으니까요
이런 시대에 신앙과 생존을 위해서라도 고민하고 응답을 구해봐야할 문제라 봅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로 숨는 것만이 기독교인의 몫은 아니라 생각하는 저의 견해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 카톨릭에서 개신교로의 태동을 살펴 보았을때도 느낀점이구요
신학과 신비에 대한 부분은 다른 분들이 말씀해주시길 기대합니다...^^
그런데 배고픈자에게 빵을 주면 성자고..이얘긴 누가 한건가요?
일견 타당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거 제 머리속 신앙관이 뒤죽박죽이 되네요 ..
결국, 해석의 문제로 귀결 되는 것 같습니다 ..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질문합니다. 머리가 딸려서 ㅠ
말씀 하신 대로 현실속에 고민에 대해 응답을 구했더니, 어떤이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고, 어떤이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케인지안이고 어떤 사람은 신자유주의자입니다.
각자 첨예한 논리로 대립합니다 ...
그럼, 예수님은 ...??? 어떻게 되나요??
배고픈자 .. 이건 출처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진보란 단어에 쩌들어 있는 듯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이어서 기억에 남는 듯 합니다.
아 차 ~ 이 구절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빵을 주었던 분이신가??
아니면, 너는 왜 배고프냐, 그러면 이제 니가 어떻게 해야 그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물으셨던 분인가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실천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빵을 줄것인가?? 배고픔의 근원을 없앨것인가??
빵을 주다보면 저절로 배고픔의 근원까지 없애는 실천도 곁다리로 하게 될것인가??
도 생각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어렵네요 ... ㅠ
그 다양성을 모두 담보하는 것이 실천의 영역인지가 궁금하다고 물은거였는데요 ...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빵을 일단 부풀릴 것이냐, 잘 분배할 것이냐??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실천의 영역에서는
각자가 알아서 해야할 일이 남은건가요??
그렇다면 여전히 분열과 대립의 공방전이 기독교 내 실천의 영역에서는 유효한 거네요 ..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은 한가지 사안에 각기 다른 응답이겠고,
하나님의 부름심 속에는 분열과 갈등이 전제해 있는 것이네요 ..
이것은 제가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어쨌든 그 실천을 주장하게 되면,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요 ...
의도가 있는게 아니라, 전개 시켜봤더니 이렇게 됩니다. OTL
요즘사회도 빵만이 ... 인문학적인 학습 ...
이 말씀은 ... 제가 얼마전에 김밥천국에 갔더니, 밥한그릇(천원) 시켜놓고, 기본 반찬으로 나오는 김치랑 된장국 먹는 60대 할머니한테도 유효한가요?? 엊그제 짱개를 시켜먹었는데, 짱개배달온 10대 후반의 집안이 아주아주 어려운 고등학생에게도 유효한가요??
결국 인문학적 학습으로 돌아가야 대나요?? ㅠ
그러나 그답도 일시적인 거죠 정답은 시험지에나 있는거니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대립과 공방전은 늘 더 나은 실천의 차원을 담보할수 있는 능동적인 운동이겠죠 부름에 대한 각기 다른 응답들이 서로 자신의 것들만 우위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갈등과 분열이 아닌 교류와 상호보완 작용을 할수도 있구요
퀄리아님 자신의 일이나 직업적인 일에 먼저 대입하고 고민해서 실천해보세요
그럼 더 구체적이고 자신에게 맞는 실천적인 방법론을 모색할수 있을거에요
그럼 평안한 한주 되시길.. ^^
그렇군요 .. 감사합니다 ..
궁금했던 답과 입장은 전부 들은 것 같습니다.
다만 쇼킹의 쇼킹이 이어지는 밤이었네요 ㅎㅎ
댓글을 읽는 동안은 '정신현상학'이 떠오르기도 하고,
인문학적 학습은 '아바타'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 ㅎㅎ
밑에는 그냥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 더 진행한다면 .. 지루해질듯해서요 ..
다만, 요 밑에 리플은 지루해질 수 있는 리플이니 그냥 무시하셔도 돼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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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는 한에서 이런 헤겔교의(라면..) 에 대한 맑스의 주어와 술어가 뒤바꼈다는 비판이 생각나네요 ..
그리고, 실천에서 대립과 갈등은 상호 교류되는 긍정적인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를 부르는 일로 까지 확산 될 수도 있고요 ... 머 역사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ㅇㅣ 니까요 ..
그런 피의 댓가가 전제된 실천의 영역이었냐는 것도 여전히 의문이고요 ...
현실에서 실천은 꼭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
직장상사에게 .. "예수이름으로 물러가라 ~~" 도 오늘 써먹어봐야 겠네요 .. ㅎㅎ
(소심해서 속으로 ㅠ) 농입니다 ㅠ
지금 정확히 다비아 어떤 철학적 노선을 취하고 있는지 모르는 판국이어서, 왔다리 갔다리 감잡는 중인것 같네요 ..
인문학 관련해서, 아바타나 월령공주가 떠오른다는 것은 머 어차피 지금이야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해방신학이 여전히 유효한 신학이라는데에 별 문제 없겠지만 ... 이런 계몽적인 접근방식, 극단적으로 서국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사상과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
정목사님도 구원에는 여러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바타의 탈행성적(?) 자본주의에서 본 것은 이런 서구백인 남성 우월주위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영화속에서도 여전히 계몽은 이루어집니다.
동시에 자본도 침투하고요 ... 역사가 그렇지 않았나요??
기독교가 들어간 곳에 자본이 들어가고 ...
머 둘을 묶는 것이 신학적 입장에서는 불편할 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멀쩡히 '에이와' 라는 자연의 신과 잘 살고 있는 부족을 멸망시키려 한건, 계몽을 명분으로 한 자본의 착취와 수탈이었거든요 ...
머 그렇다고 자본을 이야기하려 한것은 아닌데 ,
이런 계몽적인 관점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떠올라서요 ...
이런 점에서는 말씀하신 인문학적 학습은 두려움까지 듭니다.
1. 아바타나 월령공주가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과 해방신학을 비롯한 최근 제 3세계 신학의 문제 의식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네요. 실제로 해방신학이 '주적(?)'으로 삼았던 제국주의자들의 대부분이 WASP로 대표되는 서구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들이었죠. 결국은 '돌고 도는' 건가요ㅎㅎ
아 ~~~ 다양한 모습들이 있네요 ... 역시 머찌네요 .. 다비아 ...
그렇다면, 넌엘리트인 저도 한 숟가락 올려놓을 수 있겠네요 ..
사실 제 사유의 원천은 고딩 때 열심히 해석하면서 들었던 2pac에 있습니다 ㅎㅎㅎㅎㅎ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과 실제로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과 사도행전과 로마서에 다윗의 삶과 함께 어린시절 제게는 영웅이었거든요 ..
이제껏, 이런 솔직하면서 거침없는 시인을 본적이 없고, 세상과 맞서 싸우겠다던 굳건한 의지, 하나님만이 나를 평가할 수 있다던 진정한 실존적 자세 ... ㅎㅎㅎㅎㅎ 너무 오바인가요?? ㅋㅋ
다만, '인문학적 학습' 이라는 단어가 약간은 반감이 일었던게, 저같이 '이성' , '논리' , '해석' 등등... 이런 단어만 들어도,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제게는 너무 가혹한 말이거등요 ㅠ
다비아가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하는 곳이라면, 인문학적이지 않은 건 보류하시겠다는 의미인지 여전히 궁금증이 남습니다 ... 굳이 표현하자면, 저는 해석에 반대한다랄까요??
해석틀을 제공해주는 메타학문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어떤 틀이든 그 틀속에 끼이고 싶지 않다는게 ...
머든 언어로 표현되는 게 참 불만이거등요 ... 가만 냅두면 자연스럽게 무위 자연적으로다가, 자연스럽게 ... 언어를 쓰는 게 인위적이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언어, 당위 아닌 당위, 윤리 아닌 윤리 .. 이런게 있지 않을까요?? ㅎㅎ
심하게 이야기하면, 도대체 왜 저렇게 까지 찾아 헤맬까??
도망치면 .. 끝까지 추적해서 .. "너는 이래 ~~~ " 라고 족쇄를 채우는 느낌일까요?? ㅎㅎ
이런 모습에서, 진정 내가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
복잡하고 수많은 철학자와 신학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번 내 목소리로 내가 말해볼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인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 한 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 목소리로 내 말을 해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이게 "신 앞에 선 단독자"일지 몰겠지만요 ... 그런 의미에서, 마약에 쩌든 10대와 음악으로 대성한 20대 초반을 보냈던, 전설로 기억되는 전혀 인문학적이지 않은 무식한 2pac이 감히 '하나님 만이 나를 평가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 머 마끼아 벨리에 심취했던 2pac을 반론으로 들지는 않겠죠.. ^^)
다비아는 인문학적으로 성경 읽기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던가요?ㅎㅎ
노숙자에게 빵만이 아닌 인문학적인 학습을 하는 것과 아바타속의 백인 우월주의문화의 계몽주의적 접근을 비교하는 것이 이해는 갑니다만.. 모든 해석엔 긍정과 부정의 자신에 견해가 첨가될수 밖에 없겠죠
그런데 재미난건 그런 스토리의 영화로 백인들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우린 원시인들 얘기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단 그들만의 얘기가 아닌 우리역사에서도 찾아볼수 있는 문제점이기도 한데요
이런 문제점을 직시해도 이미 우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서 살수는 없겠죠
헤겔의 사유와 막스가 무관하지 않고 독일 근대 신학도 헤겔과 무관하지 않다 봅니다
기독교 모꼬 1장에도 "마르크스시즘은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 라는 목사님의 견해가 나오구요
물론 독일 신학도 제겐 신학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신학(그리스도교 신학)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하나님과 예수님이 다르니 어쩌니는 넘어갑시다ㅡ,.ㅡ;) 문제는 그렇다면 '어떤 예수인가?'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죠.
당연히, '성서'가 말하는 예수여야 겠죠.(그리스도교의 특징상) 그렇다면, '어떤 성서'? -> 신약? -> 복음서 -> 어떤 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 or 그 밖의 복음서?) 이런 식으로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을 거같습니다.
또, 어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想이 과연 '어떤 예수'인가? 라는 질문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겠죠.(역사적 예수 연구는 이런 문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겠구요.) 과연 특정한 복음서에서 그리는 예수가 '한 인물'인가 하는 문제도 있겠구요.(성서를 읽으시면 공감하시겠지만, 한 사람이 이말저말-서로 모순되어보이는 듯한 말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도...마찬가지구요.)
결국 각자가 대립하는 첨예한 논리의 대답을 찾는 과정 하나 하나가 다 '신학'이고, 그 대립의 과정 자체가 '응답'이겠지요. 문제는 그 대립 가운데 어떤 입장에 서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또한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겠구요.(제 개인적으론 이 지점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윤리의 당위('_';)를 말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결론 짓자면, 퀼리아님께서 느끼시는 '뒤죽박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뒤죽박죽 가운데 고민하던 사람들이 벌써 2000년이란 세월을 쌓아 올린 전통이니까요. 그런 전통 가운데 계신 겁니다...랄까요?;
뱀다리. 빵과 '문제의 근원 제거'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사실 성서에서 그리는 예수 본인은, 분명 '빵없음-' 문제의 근원에 대한 지적은 했고, 또한 그 근원을 제거하고 해결하는 일(예를 들면, 축귀나 여러 기적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듯합니다)에 힘쓴 것은 분명이지만, 그 자체를 '완료'하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이건 대속론같은 맥락이 아니라, 말 그대로 빵이라는 현실적 문제의 맥락입니다.) 다만, 그의 가르침과 정신을 이어나가는 이들이 하고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 바로 빵과 함께 그 근원을 제거해야하는 것이겠지요. 전, 그것을 선교(Missio)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와 오늘 그리스도교의 연속성을 찾을 수 있을테지요. 뭐, 선교적 차원의 연대라고 할까요.) 결국엔, 빵-문제의 근원 제거 모두,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해야할 일일테고, 적어도 제가 뿌리 내리고 있는 복음주의 전통에서는 '통전적 선교'라는 원칙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약간 오바한 것같긴합니다;)
못하셨다기 보다는, '연기', 혹은 '계승'시키셨다? 가 정확하지 않을까 싶네요.
분명 예수는 공생애 3년만에 붙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당했죠. 이걸로 역사적 예수의 인생은 끝난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무덤동굴 속 시체가 아닌, '부활'하여 '승천'하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죠. 구속사적 해석에 의하면, 십자가 사건이 인생의 끝이지만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이중적 의미인 것처럼, 부활 이후 예수의 삶은 역사적 인물 개인의 인생만이 아닌,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연대되고, 계승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지금도 그 문제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근원의 제거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진 않았죠. '완전한' 근원의 제거는 예수의 '다시 오심' 때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다만, 부활을 통히 "이미" 시작된 '그분의 나라'는 그 때를 향해 계속 내달리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시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미 완결된 시나리오'이잠, 우리의 관점에서는 아직도 미완된 시나리오 속을 달리고 있는 것이죠. 대충 이런 맥락입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셨는지요...?
1. 그리고 제가 알기론, 본회퍼의 '버스 비유'는 명백하게 '미친 버스기사 = 히틀러 등 나치스', '손 놓고 있는 "목사"= 당시 나치스에 찬동한 제 3제국 국가교회'라는 대상을 명시한, '의도있는 비유'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비유는 신학 논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본회퍼(와 고백교회 전통)의 '행동'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백적 차원을 1차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2. 뭐, 해방신학이 역사적 맥락에 깊이 천착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맥락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약점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겠죠.(그리고 21세기 초입의 '우리'는 '그들'의 치열한 상황을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0. 저도 잘 모릅니다^^;;;(도망갈 문부터ㅎ)
1. 다만, 일단 상황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범위가 넓습니다.(마치 복음주의란 개념처럼) 하나의 전통'만'을 꼭집어 말하는 것이 아닌 개념입니다. 그래서 상황신학=민중신학이라던지 해방신학이라던지 하나의 기독교 전통 만을 꼭 집어 지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개념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하는게 우선이긴 했죠.
2. (제가 아는 바) [남미] 해방신학 전통에서는 "혁명( 내적이든, 외적이든 )이 하나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씀인가요??" 이라는 공리가 성립합니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교리적인 차원의 이해라기 보다는 19-20세기 해방신학이 태동하기 까지의 역사적 맥락과 문제의식을 고려해야 합니다. ; 다만 민중신학의 경우는 좀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하나님 부름 자체를 역전시켜 해석하기도 하더군요. 뭐, 그거야 해석의 문제고;;;
3. (역시 제가 아는 바) 구약성서에서 '해방'이라는 모티브는 사실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편입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가장 중요한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 내러티브의 자체가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인간 해방의 주역이었나요?? Yes!"로 귀결되지요. (그 해방의 주체께서 창조의 주체시며, 만물의 주권자라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하나님 고백이 예수 이후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귀결된다는 해석이 가장 널리 알려진 구속사적 해석의 기본 골자이기도 합니다.)
4. 사실 뭐, 어떤 분도 지적하셨듯이 지금까지의 맥락은 단지 존재vs윤리, 당위vs신앙 이런 식으로 대립시킬 문제는 아닌듯 했는데 어느 지점부터 이렇게 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윤리를 말하는 이들이 존재론을 몰이해했다고 보긴 어렵지요. 그건 어디까지나 '전제'로, 밑바닥에 깔고 하는 수순이니까요. 뱀다리로, 제 경우는 그 전제는 모든 논의는 해석의 문제라는 신앙고백(ㅡ,.ㅡ)입니다. 성서도 해석, 신학도 해석, 인간도 해석의 역사라는 것이죠.
5. 뭐, 염화미소도 좋지만, 이심전심이 쉽지 않다면 보다 소통을 위한 노력에 힘써야 했지,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해방신학이나 맑시즘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바가 멸치똥이라, 보다 '고수'들의 가르침을 기대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