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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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동강난 한기총 어디로' 수일전 모 일간지의 기사제목이다.
기사 제목대로라면, 대한민국 유수의 '한기총' 교단이 두 동강 났다.
한기총 교단 신도들께서는 그 내막을 잘 아실 것이다.
나의 모태 교단인 감리교단의 실상도 매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온전한 '교단'이 어디 있을까.
우리가 평소 '훌륭한 목사님'이라고 알고 있던 인물들이
'막장'의 모습을 보이며 난장판을 벌인다.
몇몇 추종 신도들도 서로 멱살잡이를 하며 패싸움질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교단 지도자(감독.감독회장.교단 회장) 선거에는 금품이 오가는 일,
향응 접대는 물론이고 추잡하기로 말하면 차라리 정치판이 더 낫다.
이런 괴상한 현상들이 도대체 '기독교가 뭔지'에 관해서 때로 우리를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지체 높으신 목사님들이 자신이 일어서서 주님이 보이지 않도록 앞을
가로막아버리는 바로 그런 모습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교단 문제의 근원은 신앙공동체(각 교회) 이상으로 서로 뭉치고 모여서 짓까부르려 하는 그런
발상에서부터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 언제 그렇게 모여서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시도하라고
말씀하셨나. 그래서 나는 에큐메니칼운동의 필요성 주장에 관해서 동의하고자 하는 뜻이 없기도 하다.
내게는 그 자체가 인본주의 발상의 하나로 비쳐지기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이면 언제나 이데올로기 패권 쟁투 싸움을 하게 마련,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다고 말하려 한다면 그건 어불성설이다. 분란은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
나는 교단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개별 교회를 반드시 일개 교단에 소속시키고 목사직을 교단에서 라이선스 주고 있는 지금과 같은 그런 일도
하루 속히 사라져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일 자체가 종교적 자유에 위배되는 관행이며, 그러한 발상인 것이다.
목회자인 현재의 '목사'직 종사자도 개별 교회에서 알아서 선발 옹립해야 맞다고 보며, 목사도 이제 당회장이
아닌 각 교회의 신앙지도자로써의 역할자(일종의 고문역할)가 돼야 맞다(이를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비유
해서 표현하자면 악단의 지휘자<음악감독>개념이다).
이제는 교회 존립이나 그 운영시스템도 보다 소프트해져야 할 판인데, 현실은 더 고착화돼버린 형편이다.
교회 안도 기득권이 판치는 세상이고, 개교회 상호간에도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건 세상의 모습들인데 지금 교회들도 왜 그렇게 되고 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구약 시대에도 공적으로 육성되고 활동이 허용된 제도권 내의 공인 예언가 그룹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일종의 제도권밖 예언가 그룹이 있었는데, 지금 구약에 편집된 예언 말씀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가 당시
제도권밖에 있던 인물들이라고 한다.
빗대어 보면, 지금의 목사 안수제도는 일종의 제도권내 목회자를 양산하는 사회적 시스템 같은 그런 것이다.
그에 관한 긍정적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로 인해서 기독교신앙 자체가 일종의 박제화 될 수 있다.
(소년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해 온 내가 목회자들의 순수한 노고, 특히 예전 모두가 어렵던 시절의 그분들의
각고의 노고를 모르는 건 아니나 그러한 노고에 대한 보상을 이 땅에서 찾아 누리려 한다면 잘못된 일이다)
우리가 포스트 모던 시대의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 이후 유럽지역으로부터 인도 등 아시아지역까지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복음전파의 사역을 감당해낸 서기1세기 직계사도들의 사례를 반드시
주목해야만 한다. 외롭거나 괴로울 지경에 함께 있지 않고서 그 뿔뿔이 흩어짐이 이상하지가 않은가.
알고 보면 그게 '각자의 십자가가 있는' 그런 삶의 대표적 유형이다.
사람이 모여 뭉치면 이는 '땅에 편만하라.'고 기록된 창조주 말씀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해석한 어떤
설교가의 특별한 해석 설교가 생각난다.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어떤 상식과 사뭇 다른 개념이다.
아서라! 씰데 없는 발상들 그만하고,
이제는 제발 '우선 네 이웃을 돌보라'는 예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에 각자 매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