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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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독교계의 '한기총 해체 운동'과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의 사죄 등과
같은 일들을 보면서
지난 1990년대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용의 눈물'이 생각납니다.
전 그 당시에는 군대생활 중이었기 때문에
그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고
요즘 케이블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대하역사드라마 '용의 눈물'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에서부터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조선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초기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죠.
전 그 드라마 제목이 왜
'용의 눈물'일까 하고 궁금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글이 있더군요.
<'용의 눈물>
높이 올라간 용은 눈물을 흘립니다.
너무나 높이 올라갔기에 이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용의 눈에 눈물만 고입니다.
‘높이 올라간 용이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한다.’는 주역에 나오는 건괘(乾卦)의 내용입니다.
주역 건괘는 용의 변화를 이용해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잠룡(潛龍)은 물속에 잠겨서 힘을 기르고 있는 용입니다.
현룡(見龍)은 세상으로 나와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용입니다.
비룡(飛龍)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저 하늘 높이 날라 가는 용입니다.
마지막 항룡(亢龍)은 끝까지 올라간 용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기에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일명 주역에 나오는 ‘항룡유회(亢龍有悔)’의 구절입니다.
용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그의 지향점이요, 목표이지만 끝까지 다 올라간 용(龍)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다음 단계는 내려오는 일 뿐입니다.
이게 어찌 용의 이야기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갑니다.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 그 자리에 가보면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닫게 되지요.
그 자리에 가기까지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을 한 것에 대하여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亢 龍 有 悔
항 용 유 회
끝까지 올라간 용이 후회를 한다.
항룡은 눈물을 흘리는데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힘 있는 자리를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결국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완장차고 무서울 것 없이 권력과 힘을 휘두르겠지만 결국 끝가지 올라간 용은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하면 그것은 허물이 될 것이다'.
어떤 일을 해서 그 일이 성공을 하면 자신은 뒤로 빠져 그 공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 노자가 늘 강조하는 겸손의 미학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가장 높이 올라간 용이 반드시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행복은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亢(오를 항), 龍(용 용), 有(있을 유), 悔(후회할 회)
이 글을 보고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권력이라는 정상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조선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은
재위기간 동안 나름대로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하기는 했으나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의 생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를 비롯해서
이성계의 오른팔이었던 당대의 천재 정치가 삼봉 정도전,
그리고 왕세자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이었던 방석과 그의 형 방간을 죽였고
또한 왕위에 오른 뒤에는 처남들도 죽이고(부인의 남동생들) 사돈까지도 죽였습니다.
드라마 맨 마지막회에는
태종의 아들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라 세종이 되고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 앉은 상황에서
나라에 가뭄이 오래 지속되자
태종이 궁궐 안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하늘을 향해 제발 자신의 모든 죄와 업보를 용서해주시고
나라에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에서 태종 이방원은
지난 날의 자신의 모든 잘못들을
낱낱이 자백하며 하늘을 향해 절규합니다.
낮부터 밤까지 그렇게 절규하다 드디어
밤에 비가 내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고 숨을 거둡니다.
천하를 호령했던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권력을 차지하고
나름대로 당대에 빛나는 업적을 세웠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용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모습도 그와 같다고 봅니다.
수많은 한국 개신교회의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목회자 후보생들이)
'용'이 되고 싶어 합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하늘 끝까지 올라가버린 용이고 또한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용의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역사는 이토록 자꾸만 반복되고 맙니다.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도 마찬가지고
전세계의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든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에 이런 현상들이 벌어집니다.
조용기 원로목사의 눈물도
결국은 사람의 눈물이기보다는
'용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내려가셨는데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왜 그렇게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안간힘을 쓰고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의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에서는
천문학적 액수의 돈봉투가 오갔다고 합니다.
그분들(?)도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용의 눈물'을 흘리시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봅니다.
이성계의 눈물은 이방원의 눈물로 이어졌고
이방원의 눈물은 대원군의 눈물로 이어졌고
대원군의 눈물은 이승만, 박정희의 눈물로 이어졌고
박정희의 눈물은 틀림 없이 전두환, 노태우의 눈물로 이어질 것이며
또한 이건희, 조용필, 서태지, 김정일, 김정은 등의 눈물로 이어질 것이며
그들의 눈물은 앞으로 한국교회 목회자들, 더 나아가 모든 교인들의
눈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죠!
저는 이렇게 소원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최소한 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서 '용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나오지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평범한 한 인간의 인간적인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로만 충만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이 짧고 간결한 옛 성현의
명문장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항용유회 - 용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서 눈물을 흘린다."
김종원 님의 글이 힘이 있네요.
조용기 목사님의 절과 눈물에 대한 보도를 보고
기분이 영 찜찜했어요.
예배 시간에(혹은 기도회 시간에) 왜 신자들에게 절을 하는지, 음.
수년전 조용기 목사님을 비롯해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몇몇 목사님들이
자신의 종아리를 치는 퍼포먼스를 펼친 적이 있었어요.
젊은이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걸 뉘우친다는 뜻인가보더군요.
마음에 없는,
있다고 하더라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행동들이 아닐는지요.
조용기 목사님이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신다면
교회당에서 절하지 말고
가족들로 하여금 교회 및 관련 기관에서 손을 떼게 하고
본인도 모든 걸 손에서 털면 될 텐데요.
이번 일로 그 교회 신자들은 목사님을 더 지지하게 되겠지요.
잠용-현용-비용-항용-落용-死용
이렇게 진행되겠군요? 높은곳에서 떨어지면 죽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