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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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아라는 공간에 들어온지 대략 1년이 넘었나 싶습니다. 논쟁을 일으키거나 직접 뛰어들었던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몇 가지 논쟁과, 논쟁 같지 않은 말싸움은 안타까움 속에 지켜봤습니다. '좌파'라는 호칭에 대한 다음의 글이, 혹시 감정적인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차분하게, '좌파'라는 호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올립니다.
먼저 저 자신에 대해 살펴보면, 유럽에서 태동했던 고전적 의미의 '좌파'라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과연 사유 재산 보호를 내세우며, 개인의 사적 이윤 추구를 최고의 선으로 삼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이윤이 최고라는 주장은, 개인과 일부 족벌적 계급의 무한정한 욕심, 탐욕을 기반으로 하고, 사람과 사람의 아름다운 관계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이건 생존건이건, 돈이 아니면 다 적대시하는 우리 사회의 일부 계층 혹은 계급의 태도를 보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이런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지식의 범위에서, 이런 수준의 주장, 생각은 대체로 자유주의(liberalism)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좀 더 급진적 근원적 해결책을 내세우는 사람을 '좌파'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계시는지요?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역사적 신학적 지식이 깊지 않아 아주 명확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들은 풍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떨까요?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로 예수님을 우리 편이냐 네 편이냐로 가르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과 로마 제국이라는 이중의 폭압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선포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이곳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며, 신앙과 신학이 바로 이곳,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주신 분이 아닌가요?
말이 길어졌습니다. 다음은 오늘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칼럼입니다. 참고로 한 말씀만 드리면, 북한에서 가장 싫어했던 사람의 한 명이 바로 이종석 전 장관입니다. 왜냐구요? 이 전 장관은, '친북좌파'라는 남쪽 수구세력의 비난과는 정반대로, 북쪽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고, 그들의 논리를 잘 알기에 끌려다니지 않았고, 역으로 북쪽을 야금야금 끌고나왔기 때문입니다. -sg-
‘좌파’, 그 호명이 불편한 이유 / 이종석(4월 26일, 한겨레신문)
4·2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강남좌파’ 논란이 불거졌다. 어느 극우언론에 ‘분당우파는 강남좌파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는 요지의 칼럼이 실린 것을 계기로 여기저기서 ‘좌파’ ‘우파’ 얘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 와중에 ‘강남좌파’를 자임하는 이도 있고, 일부 진보학자들은 ‘좌파’라는 용어를 한국에서 실체화된 세력의 공식 용어처럼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나름대로 판단을 해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나는 ‘좌파’라는 말이 영 불편하다.
반공을 국시로 삼아온 우리 사회에서 상대방을 ‘좌파’로 호명하는 것은 ‘배제되어야 할 대상’ 혹은 ‘척결 대상’이라는 이미지를 동반하는 일종의 주홍글씨였다. 그러다 보니 보수인사들도 진보세력을 ‘좌파’로 몰아세우는 것을 자제했다. 분단 역사 속에서 이 용어가 골육상쟁의 비극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동안 극우세력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좌파’ ‘우파’보다는 ‘진보’ ‘보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1년간 미국에서 연구생활을 마치고 2009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보수인사들 사이에서 진보세력을 공공연히 ‘좌파’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전사회적으로 일어난 시대적 퇴행 현상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그들의 ‘좌파’ 호명은 기득권 세력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세력에게 다시는 정권을 내줄 수 없다며 반대세력을 영원한 소수자로 전락시키고 싶어서 내뱉은 강박관념의 산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학자들은 자신의 보수적 정체성을 과시하거나 혹은 기득권 세력에게 자신도 한편이라는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편승의식에서 ‘좌파’를 공공연히 입에 달고 다니는 것 같았다.
18년 전 나는 북한 유일체제의 비효율성과 비민주성을 역사적·이론적으로 밝히고 주체사상이 어떻게 인민을 기계적인 피동체로 만들었는가를 규명한 박사논문을 제출하였다. 이후 같은 맥락에서 숱한 논문과 책을 썼다. 그러나 극우세력에게 나는 여전히 ‘친북좌파’이며 심지어 ‘종북좌파’이다. 이유는 한 가지인 것 같다. 그들이 볼 때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남북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친북좌파’에 해당한다. 인질범의 손에서 인질을 구하기 위해 인질이 다칠 수 있는 기동타격대식 일망타진을 시도하기보다는 인질범을 설득해보자는 사람들에게 ‘친인질범파’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야만이 아직도 ‘좌파’라는 호명에서 횡행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좌파’라는 말이 대한민국에서 그 뜻이 정당하게 인식되고 통용되는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념의 시대로 상징되는 냉전이 해체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 용어는 여전히 상식과 논리에서 열등감에 빠져 있는 기득권 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압할 목적으로 국민을 현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맛좋은 먹잇감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좌파로부터 나라를 지켜달라”는 여당 후보의 색깔론이 ‘강남좌파’ ‘분당우파’ 논란의 종결자가 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의 애국심을 확신하듯이 반대의견을 지닌 자들의 조국애를 의심치 않고, ‘나와 다른 의견’과 내 의견이 공존하며 ‘다름’과의 협력적 경쟁이 우리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간다고 믿는 태도가 중요하건만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에게 이를 기대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국민은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기득권 세력이 국민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좌파’의 이미지는 사회혼란 세력이며 집권불가의 자질과 국가관을 가진 집단이다. 지금 그들이 보일 수 있는 알량한 아량은 ‘좌파’도 국가보안법을 준수하는 한 이 사회에서 영원한 소수파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정도다. 전쟁으로까지 비화한 이념갈등의 역사가 ‘좌파’라는 용어에 관한 한 아직도 국민의 이성적 판단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래서 ‘좌’와 ‘우’의 이념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소통하며 ‘좌파’라는 호명이 국민의 마음속에서 정당한 시민권을 획득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아직은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예전에 비하여 사회의 변화속도가 눈에 보이거나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상황이 '진보'라는 말을 당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의식조사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르르 '진보'라고 자임하는 비율이 상당히 크다는 점도 이를 반영하고 있는 듯 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아마도 이러한 상황이 별로 탐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수'라는 이름으로 발전적 흐름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비추어지는 모습이 마땅할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좌파'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우파'로 칭해 이러한 언어적 불리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은 기표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좌파'라는 기표에는 수 많은 기의가 담겨있습니다.
"종북주의", "혼란세력", "과격함"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명령이 잉여로 담겨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기의를 함께 공명하는 이들에게 내리는 "척결하라"는 선동적 명령입니다.
문제는 이종석 전 장관의 말처럼 불편해 한다고 이들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칭호가 '우파'에게 힘이되어 '좌파'를 위협하게 하는 요소는 '종북주의'라는 기의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종북주의'로 칭해지는 일련의 통일운동들이 인도적 차원의 교류 및 지원사업과 실재적 '종북주의'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 이러한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한 때 '주체사상파'로 불리우던 많은 이들이 대북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와의 수 많은 공동사업들을 진행하여 왔습니다.
'좌파'라는 말이 '우파'들에게 무력해지고 '좌파'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대해 명확히 설명되어야 만 합니다.
'종북주의'가, '민족주의'가, '통일운동'이 어떻게 진보적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고 그나마 '통일운동'이 애매하긴 합니다.
통일이 분단 이전으로의 복원을 의미한다면 그보다 더 이전으로의 복원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삼국시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두 가지 모두 다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오랜 과거로의 회기가 진보적이라는 희안한 논리가 성립됩니다.
당연히 말이 않되는 소립니다.
수 많은 정서상의 또는 감정적인 통일에 대한 '바램'은 수 많은 이데올로기의 추상적이며 무의식적인 발로일 뿐입니다.
명확히는 민족통합의 의미는 강력한 민족국가의 형성이라는 것과 일치합니다.
'쇼비니즘'적 '우리의 소원'입니다.
전쟁적 상황의 해소와 평화정착이라는 측면이라면 반드시 통일만이 아닌 하지만 통일을 배제하지 않는 다양한 길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좌파'라는 칭호가 진보적이며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혼재된 가치로 부터의 탈주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통속적 맑스주의'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회주의의 폐허'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야만 할 것입니다.
이 때야 말로 '좌파'라는 말이 껄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나라에 "좌파"가 있기나 합니까? 진보신당 민노당 정도면 좌파라고 하겠지만... 저만해도 이리 저리 요리 조리 봐도 좌파는 아닌 듯... 내 몫을 빼앗기는 건 정말 싫은, 단지 딴나라당을 비롯한 극우세력들의 몰상식성과 야만성이 신물나는 소시민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