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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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바위’ 까마귀쪽나무의 제주 방언이라고 하는 군요.
왠지 이름이 예쁘기도 하고 정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바위가 해군기지 건설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해군기지에 대한 반대의 싸움이 되었든지 아니면 자연의 보존에 대한 투쟁이든지 간에 생명을 향한 것은 변함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싸움을 바라보면서 어려움을 겪는 것들 또한 있습니다.
자연이 보존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보존의 논리가 모든 곳에 적용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변을 분명히 내리지 못하는 상황 또한 존재하기도 합니다.
극단적으로 모든 자연을 하나라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개발행위에 대한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에 대하여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면 어떤 기준에 따라 훼손될 자연이 선택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겨지게 됩니다.
인간이 정해놓은 보존에 대한 가치를 기준으로 자연이 보호되어지고 훼손 되어지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모든 자연은 보호되어야 할 가치를 스스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내재성을 이루며 자존하는 것들입니다.
인간 또한 그러한 자연의 부분을 이룹니다.
인간의 삶 어느 하나도 자연의 모든 것으로부터 신세를 지고 있으며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구럼비바위의 틈새에 있는 유기적 생물들뿐만 아니라 바위자체가 가지는 무기적 생명에 대해서도 눈을 떠야 합니다.
물, 공기, 흙 등이 없다면 우리들이 유기물 이라고 하는 것들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것들은 서로가 떨어져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스스로들을 재생산하기 위하여 서로 열려있으며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유기적 생명체와 무기적 생명체를 가르는 경계는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연을 가공하고자 합니다.
어떤 합목적성도 없는 자연과 그것의 변화에 목적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때로 개발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군사기지의 안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연에 대해 폐를 끼치고 삽니다.
숨을 쉬는 것과 자원의 채굴을 통하여 돈을 버는 것, 자연을 변형시켜 권력을 유지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자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러한 폐를 더욱 많이 끼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훼손해온 자연에 대한 파괴를 중단하라고 하면 오히려 욕을 하고 비난을 해댑니다.
이것은 납득하기 힘든 뻔뻔함입니다.
자신들이 끼치고 있는 폐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끼치는 폐가 정당한 듯 행동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본은 ‘미래의 지불 가능성’이며 국가는 ‘존재의 정당함에 대한 강요’를 통해서입니다.
이러한 ‘잡담’은 보존되어야 할 자연을 은폐시켜 버립니다.
자연에 대한 파괴는 ‘세계-내-존재’로써 인간에 대한 공격이며 ‘자연과 신’에 대한 훼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시키는 ‘타자’에 대한 말살행위입니다.
구럼비바위에 대한 파괴를 중단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공격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