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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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을 보고 난 느낌이 사라질세라 급히 펜을 들었다. 이창동은 이 영화를 통해서 또 하나의 화두를 불덩이의 형태로 던진 느낌이다.
이 영화는 스릴러물 같은 구성을 하고 있지만, 사회학적으로, 또한 심리철학적으로 보면 더 깊은 영화다.
이창동의 영화는 어설픈 텔링으로 자신의 판단이나 비판을 섞어 단일한 해석만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만 하는 극단적 쇼잉을 선택하여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게 한다. (밀양에서도 감독은 박찬욱이 하는 것처럼 기독교에 대한 어설픈 희화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결국 이 영화의 해석은 관람자의 몫이다. 그래서 여기에 나의 해석을 한 번 덧붙여 본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흙수저 종수와, 금수저를 넘어선 플래티늄 수저 벤이 해미라는 여자를 사이에 두고 만들어가는 사랑과 질투, 그리고 살인에 관한 영화다. 눈물을 흘려 본 기억이 없다는 벤은 사이코패스의 느낌을 주며, 영화의 여러 메타포는, 항상 그가 가지고 놀던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래왔던 것처럼, 해미에게 싫증을 느끼고 버려버린(죽여버린) 느낌을 주고, 그 느낌 때문에 종수는 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차까지 불태워버린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벤은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이 구별되지 않는, 그냥 놀면서도 너무나 부유하게 사는, 지적이고 교양 있어 보이는 한량이다. 그에 반해서 종수는 직장이 변변찮아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도 힘든데,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아버지의 옥바라지까지 해야 하는, 그냥 보기에도 불안해 보이는 청년이다. (종수의 집이 있는, 북한의 대남 방송 때문에 하루 종일 시끄러운, 파주는 종수의 한계상황적 삶의 팍팍함을 더 강화한다.) 그런 그는 자신의 삶에 갑자기 나타난 고향 친구인 나레이터 걸 해미를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벤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뭔가 이상한 삼각 관계가 형성이 되면서 일이 꼬이게 된다. 그러면서 항상 세 명이 같이 만나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난다.
이 영화에 나오는 금수저 벤은 좀 재수 없게라도 그려졌으면 좋았으련만... 너무나 친절하고, 지적이며, 교양까지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그런 벤을 해미는 흥미 있게 만나면서, 만날 때마다 항상 종수를 끌어들인다. 해미와 종수를 바라보는 벤은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그 미소의 뒤끝은, 해미는 몰라도, 최소한 종수에게는 더 큰 좌절감을 안겨준다. (왜 어떤 놈은 하는 일 없이 맨날 친구들이랑 파티나 즐기면서도 여유롭게 잘 살고, 어떤 놈은 죽자 사자 뛰어다니며 이 일 저 일을 해도 손에 몇 만원 쥐기도 힘든가? 이 영화는 벤의 여유와 종수의 불안정함은 자신들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세련된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무언의 고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종수는 마지막에 벤을 불러내서 칼로 찔러 죽이고, 그가 타던 포르쉐 차와 함께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현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 거부를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해미는 묘하다. 벤이 만나서 버리는 다른 여자들과는 뭔가 좀 다르다. 해미를 버리고 나서 - 사실 벤이 해미를 버렸다기보다는 해미가 벤에게서 홀연히 떠난 느낌을 준다 - 다시 만나는 것으로 나오는 다른 한 여성은 왠지 주인들 대하는 노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해미는 벤을 만나면서도 벤에 대한 부러움이나 분노도, 벤에 대해 종속되는 느낌도 없는 그냥 자유 영혼이다. 그레이트 헝거! 내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창동 감독이 만드는 영화의 일관된 주제 의식은 "인간" 그리고 "구원" 이다. 나는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고자 한다.
택배 배달을 하는 종수를 우연히 만난 나레이터 걸 해미는 그가 초등 동창임을 한 눈에 알아본다.
"얼굴 고쳐서 날 못 알아봤지? 니가 항상 못생겼다고 놀렸던 해미야"
해미는 종수와 저녁을 겸한 술자리를 하면서 아프리카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뜬금없이 아프리카 인들의 Great hunger를 말한다. 판토마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알듯 말듯한 선문답 같은 이야기도 한다. (해미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지만, 해미의 시선은 항상 다른 쪽을 향한다. 그래서 신비롭다.)
"판토마임의 기본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없다는 생각을 잊는 거야. 그러면 내 손에 있는 이 오렌지를 진짜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여행 다녀오는 동안 해미의 고양이에게 밥 주는 것을 부탁받는 겸 찾아간 해미의 방에서 종수는 그녀와 가슴 떨리는 뜨거운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종수는 그 느낌을 잊지 못하고 고양이 밥을 주러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그녀의 사진, 그리고 남산 타워에서 반사되어 들어오는 짧은 햇빛을 통해 그녀를 느끼며 자위행위를 한다.
공항으로 귀국 마중을 나갔을 때, 그녀는 종수에게 아프리카 여행애서 만난 벤을 소개한다. 벤은 포르쉐를 소유한 강남의 부자집 아들이다.
같이 만난 자리에서 해미는 아프리카의 저녁노을을 추억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중의적인데 해미의 힘든 삶에서, 또한 그레이트 헝거에서 나오는 눈물이다. 육체적 배고픔인 리틀 헝거가 아닌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배고픔인 그레이트 헝거...
시궁창 같은 삶을 사는 종수에 비해서, 벤은 너무나 여유 있고 부유하다. 그러면서 하는 것이라고는 포르쉐를 운전하고 어디로 놀러 간다든가,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즐기는 것이전부다.
둘은 벤의 파티에 초대되고, 해미는 거기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의 그레이트 헝거에 대한 의식과 춤을 보여주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종수는 벤의 친구들이 해미를 보고 깔깔 웃는 모습이 못내 불편하다.
파주에 있는 종수의 집을 찾아온 벤과 해미... 벤이 권한 대마초를 같이 피면서 그녀는 붉게 타들어가는 노을을 보면서 웃옷을 벗고 젖가슴이 드러난 채로 그레이트 헝거를 갈구하는 춤을 춘다. 그 춤을 보는 벤은 재밌다는 듯이 깔깔 거리며 웃고 종수는 그 모습이 또 못내 불편하다.
돌아가는 길에 종수는 해미에게 한 마디를 하고 그 한마디 이후에 해미와 종수는 연락이 끊어진다: "니가 창녀야? 아무데서나 옷을 벗게..."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는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놀림감이 되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해미는 실상 종수 속에 있는 여신, 아니마(영혼)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편 종수는 그 아니마의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벤에 대한 종수의 증오는 점점 커지면서도, 그는 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벤은 종수에게 "왜 그렇게 진지해요? 그냥 가슴 속에 베이스를 느껴요" 라고 이야기 한다. 벤은 삶의 극단적 피상성을 보여준다. 그 피상성은 의미를 희화화해서 삼켜버리고는 무의미함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해미는 그 이후로 사라진다. 그리고 벤은 다른 어린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마치 주인을 대하는 하녀와 같다. 결국 그녀도 버려질(죽여질) 것이다. 2달에 한 번씩 낡은 비닐 하우스를 몰래 불태우며 쾌감을 느낀다는 벤의 이야기는 메타포였던 것이다.
종수 주변의 비닐하우스를 곧 불태울 거라는 예고를 받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봐도 동네에 불태워진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벤은 종수에게 이미 불태웠다고,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라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하면서 낄낄거리며 웃는다. 종수에게 벤은 해미를, 아니마의 목소리를, 삶의 의미를 불태워 없애버린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다.
다시 찾아간, 이상스러우리만큼 정돈된 해미의 방에서 종수가 해미와 관계를 가지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것은 환상이다. 나는 이 것을 종수가 자신의 아니마와 만나서 하나가 되는 그림으로 본다. 또한 거기에서 종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해미를 데리고 왔으니 같이 만나자고 벤을 불러 낸 자리에서, 벤이 해미가 어디 있냐고 묻자 "해미는 이제 없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벤을 칼로 찔러 죽이고, 거의 포르쉐 차에다 자신의 옷을 다 벗어 넣고는 벤의 시신과 함께 다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알몸이 된 종수는 터벅터벅 자신의 차로 돌아와서는 떨리는 마음으로 운전대에 앉게 된다.
엽기적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이창동은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불태워버린 종수의 해방과 구원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글은 다 써 가는데 정작 중요한 두 가지 메타포를 놓친 것만 같다. 우물과 고양이... 종수가 해미를 구해주었다는 그 우물, 그리고 해미가 종수에게 먹이 주는 것을 부탁했던 고양이...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한 것들... 그래서 어린왕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했던 것일까?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없다는 생각을 잊는 것... 이 것은 혜미가 던진 화두이자 우리 속 아니마의 목소리이며 구원의 길이 아닐까?
위 글을 읽으니 '버닝'을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치는군요.
실제 영화보다 첫날처럼 님의 감상문이 더 재미있고 더 깊은 거 아닌가요?
흥미 진진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