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은 생명의 첫째가는 의무요 책임이며 특권이다. 그러나 사람은 생존 이상의 존재다.
성경은 사람을 가리켜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떡을 먹어야 하지만 떡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했다(마4:4).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뭘 뜻할까?
기록된 말씀만을 뜻할까? 일차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록된 말씀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의지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싶다. 피조세계의 질서 속에 반영된 하나님의 뜻과 의지,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 인간의 품격으로까지 확대해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과 인간 속에 담겨 있는 보이지 않는 의지를 총칭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상관관계
사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말씀을 먹으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말씀을 먹어야 보이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풀어 말하기를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고 말했다(히11:3).
그렇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의 본질이요 바탕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보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의미와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
우리의 삶과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세계 속에 각인된 하나님의 질서와 권위,
우리 안에 빛나는 이상, 양심, 이성, 사랑, 의미, 감성,
선한 의지, 상상, 창의, 조화, 연대, 진리,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한다. 품격 있고 살맛나게 한다.
생각해보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마음이 없이 어떻게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겠는가?
사랑이 없이 어떻게 생명이 자랄 수 있겠는가?
가정과 사회를 이루며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지혜가 없이 어떻게 세계가 운행할 수 있겠는가?
무릇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존하며,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는 것들을 통해 표출된다.
보이는 것이 없으면 이 세상은 실체 없는 환상이 되고,
보이지 않은 것이 없으면 이 세상은 의미 없는 물체 덩어리가 된다. 이것이 세계의 참 질서다.
문화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통합
이처럼 세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의 삶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통합되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되면 삶은 닫힌다. 삶은 죽는다.
우리의 삶이 단순히 먹고 사는 생활(생존)의 차원을 넘어 삶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으려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통합되어야 한다.
‘문화’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화’란 한 마디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마음속에 숨어있는 생각, 감정, 깨달음, 이야기를 글로 풀어 쓴 것이 소설이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미술이고, 선율로 표현한 것이 음악이고,
몸짓으로 표현한 것이 연극이고,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 영화인데,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양한 양식으로 형상화시킨 것들이다.
또 보이는 물체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밝혀내는 것이 과학이고,
존재의 비밀이나 삶의 의미와 질서를 묻고 찾는 것이 철학이고,
하늘을 나는 꿈을 구체화하는 것이 기술이라고 할 때
과학이나 철학, 기술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고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활동을 뭉뚱그려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문화와 삶
결국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종교적 존재’요 ‘문화적 존재’라는 말을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 사람은 ‘문화적 존재’이고, ‘문화’가 곧 ‘삶’이다. 문화가 없는 건 ‘생활’일뿐 ‘삶’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김구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도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님은 나라를 잃고 가난에 허덕이던 시대에 이미 문화의 중요성을 꿰뚫어보았다.
문화가 삶의 본질이요 중심임을 발견하고 문화 강국의 꿈을 꾸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는 말은 인간과 삶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에서
사람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듣는 존재임을 환기시키고 있다.
“인간은 똑바로 설 수 있다. 그러나 고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쩌면 코끼리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말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돌고래의 떠드는 소리도 어느 정도 그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다른 동물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비 콕스는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지혜에 접할 기회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랍비 렙 제불룬의 멋진 말도 인용한다.
“오늘 우리는 산다. 그러나 내일이면 오늘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은, 모든 인생사는 하나의 긴 이야기이다.”
그렇다. 온 세상과 삶은 다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문화의 가장 원초적인 양식이고,
우리는 이야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야기를 먹고 마시며 산다.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연속극을 보는 것도 사실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 때문이고,
소설, 연극, 영화, 음악, 노래가 항상 우리 곁에 흐르고 있는 것도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사람은 진실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이야기를 먹고 사는 유일한 존재다.
문화와 행복
특히 행복한 삶은 문화적인 삶과 떨어질 수 없다.
문화는 생활의 활력소요 정화제이며 삶의 향기이다.
한 편의 좋은 영화는 우리 생활을 반추하게 하고,
한 곡조의 노래가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주기도 한다.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느끼고, 추구할 줄 아는 섬세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을 느낄 감수성이 없으면 불의나 비참에 대해 분노하거나 아파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예민한 촉수가 없으면
생존을 넘어 삶의 경지로 진입하기 어렵다.
우리가 생활을 넘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섬세한 감수성, 예민한 촉수,
전체를 볼 줄 아는 통찰력, 역사의 향방을 가늠할 줄 아는 안목, 끝없는 호기심과 열정,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다들 생활이 어렵고 팍팍한 요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떡'이다.
그러나 '떡'보다 더 절실한 것이 어쩌면 ‘문화’인지도 모른다.
'떡'은 주린 한 끼를 해결해 주지만
'문화'는 현재의 주림을 견뎌낼 용기와 내일의 희망을 주기도 하니까.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금 발견하게도 해주니까.
요즘 영화 ‘워낭소리’를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극장을 찾는 것이나,
경제 불황인 때 미국과 유럽에서 책이 많이 팔리는 것도
어쩌면 위로와 행복을 발견하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누가 ‘문화’를 ‘떡’ 다음이라 하는가?
‘떡’은 ‘문화’를 보장하지 못하나 ‘문화’는 ‘떡’을 보장한다.
‘떡’은 ‘삶’을 보장하지 못하나 ‘문화’는 ‘삶’을 보장한다.
하여, 김구 선생님처럼 나도 희망한다.
명예, 부유, 멋진 자동차, 강한 권력이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갖고 싶다.
정말 한없이 누리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와 ‘깊은 행복’이다.
새하늘님의 열독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 대단하시네요.
제가 한 달 가까이 병원에 갇혀 지내느라 새하늘님의
열정적인 댓글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글쓴이의 오랜 침묵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
정독해나가는 그 굳굳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새하늘님같은 도반을 만나는 것이
다비아의 축복이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도 한동안 뜸할 것 같습니다.
신록의 계절을 또 다시 병원에서 보내야 하거든요.,
싱싱하게 물오르는 계절에
힘들고 어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자유하며 행복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종말론적 소망을 부여잡고서.....
가장 연약한 자에게서 강력한 힘이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가요?
가장 힘이 없고 무능해 보이는 누군가에게서 상상할 수 없는 인내와 절재와 강인함...
그리고 결코 절망하지 않는 생명력을 봅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내 밀쳐지는 삶이라해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삶이란
사실 가장 강렬한 욕망이며 욕구이며 생존 본능입니다.
신앙을 말할 때
혹은 보편적으로 믿음을 말할 때
모든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다고 믿는자는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는자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우리가 그동안 이해하는 것이...
믿는자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아야만 좋은 신앙이라고 배웁니다.
언제나 잘될 것이라고 합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것 같습니다.
산다는것...만으로도 옆에서 지켜 보기 힘겨운 이들이 너무 많아요...
내용과 처한 상황도 다양하고...
특히 육신의 질병으로 겪는 고통과 아픔들 역시
본인이 아니면 타인은 결코 알수 없는 어떠함의 고뇌들이 있지요....
누가 나를 대신하여 아파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위로가 절절한들
그 위로조차 별 도움이 못될 정도로 힘겨운 삶들을 견뎌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떡보다 더 귀한것일까요?
사람이 떡만으로는 살수 없지만
그래도 실제적으로는 떡이 없으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와 절망을 피할 수 없지요...
문화가 주는 힘과 소망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도 당장의 한끼니를 체우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문화가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서 평화나 안식함이 없을 때는 항상 불만족이겠지요.
오늘 내가 정직하게 삶속에서 떡을 준비하지 못하면...
내일 이라는 미래의 시간속에서 절망하고 고통하는것이 현실아닌지요...
믿음으로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해 본들...
당장에 굶어야 하는 그들에게도 소망이 될까요...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은 생각조차 못하고 아픈곳을 감싸 안으며
울며 기도하는 자들은 어떨까요...
사실 정목사님의 글에 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저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서
지독한 가난함과 함게 이제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나약한 저를 보면서 한숨을 쉬엇거든요...
당장에 늙어서 경제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면...
그 때에도 나는 과연
그동안 외치고 자랑했었던 그 믿음으로 지탱할 수 있을까...
믿음이란 도대체 이러한 처절한 현실마저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회의감에 몸서리를 처봅니다.
현실은 그만큼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작은 자들을 항시 위협 한답니다.
문화를 누리기에는 너무 ... 현실이 차갑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역시
과연 모두에게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보장이 될것인지는...
교회를 저는 문화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문화의 한 부분이 교회 생활이 아닌가 합니다.
말씀이 증거하고 말씀이 이루어 가는...
성경에서 증거하는 본질적인 교회와 전혀 다른 오늘날의 교회 문화들...
거기에 십자가에 죽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는 간데 없고...
복음은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며 생명이어야 합니다.
저는 문화보다는 생명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살아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단순 하지만 우리의 삶속에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함께 있는..사는 삶....
그 누림이 있어야만 병상에서도 주린 자에게도
영원한 소망이 솟아 나오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 문화 속에서는 생명의 소망보다는
여전히 보이는 문화와 힘을 소유하려는 것 뿐입니다.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허상들만 난무합니다.
오랫만에 들러서 귀한 목사님의 글을 읽고 감흥이 나서 주절 거립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다시 병원에서 재활 시간을 하시려는것 같습니다.
모쪼록 주님 주시는 위로와 말씀이 주시는 넉넉한 소망으로 병을 견디시고
이겨 내셔서 다시금 묵상 칼럼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빨리 오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제 감상에 젖어서 혹시라도 불편하게 하였다면 송구합니다.
2009/08/23.ⓒ사랑그리고편지
사랑 그리고 편지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불편이라니요????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그래요. 세상에 빵보다 더 절실한 건 없습니다.
이건 어떤 사람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의 대원칙입니다.
빵이 필요한 사람에게 문화 운운하는 것은 범죄이지요.
문화는 어디까지나 빵 이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문화적인 존재입니다.
빵이 필요하듯 문화도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아니, 사람살이 자체가 문화이지요.
그런면에서 교회는 예수의 문화이어야 하지요.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요.
그런데 교회는 예수의 문화와 가리가 멀지요.
마찬가지로 세상도 인간적인 문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다들 빵에 목매다느라 문화를 호흡하지 못하며 삽니다.
문화는 빵 이후의 문제임이 분명하지만
문화가 곧 빵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단지 육신이기만 한 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빵이 시급한 사람 앞에서 문화 운운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사랑 그리고 편지님의 고민이 어찌 님만의 고민이겠습니까?
저에게도 그것은 풀 수 없는 인생의 현실적인 장면입니다.
마음이 아프지요.....
오늘로써 정병선 목사님의 길찾기 칼럼방의 모든 글들을 정독 했네요.
제가 이렇게 마음먹고 읽는 것도 단순히 신앙의 힘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힘에 의한 기대와 설레임 속에서도 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속 쓰실 글들이 기대가 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