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어리석다.
일이 다 지나고 나서야 후회를 할 때가 많고, 일의 순서가 뒤바뀔 때가 많다.
이번 장기 이식도 그랬다.
‘왜 장기 이식까지 해가며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는가?’를 물으려면
마땅히 장기 이식을 결정하기 전에 묻고 고민했어야 한다. 그게 바른 순서다.
그런데 나는 거꾸로 했다. 장기 이식을 결정하고 난 다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암튼 순서가 뒤바뀐 고민을 하면서
나는 ‘생의 의지’는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지이기도 하다’는 논리로 장기 이식을 결정한 자신을 변명했다.
정당한 논리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마음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왠지 현학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어떤 형태를 띠든(상대방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장기 이식은 좀 다르다는 생각 또한 떨칠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가 찜찜했다.
하여, 나는 새롭게 물었다.
‘만일 오늘 당장 죽는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 하고 말이다.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쓰고 있는 글을 끝내지 못하는 것일까?
다시 한 번 펼쳐보고 싶은 목회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이 세상 모든 것과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아쉬울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쉽지 않은 게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이 가슴 한편에 시린 아픔과 달랠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을 쥐어뜯게 할 만큼 커다란 아픔이나 미련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쉽기는 하겠지만 얼마든지 깨끗하게 포기하고 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 앞에서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눈을 감기 힘들 만큼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머리를 굴리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발견되는 게 있었다. 매우 사적이고 작은 일이었다.
아내와 아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한 세상 살면서 가장 많이 보았던 얼굴.
때로 험악한 모습으로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던 얼굴.
때로 역겹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얼굴.
바로 그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과 함께 아침 밥상을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이,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며 길가에 피어난 들풀을 보고 감탄할 수 없다는 것이,
아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들이 삶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힘들어 할 때 조언해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에게 마땅히 베풀었어야 할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되고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과 더 이상 삶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직 그것만이 죽음의 손을 덥석 잡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아쉬움이요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아니, 그건 단지 생각이 아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가슴이 증언하는 진실이었다.
사실 가족과의 삶은 팔이 내 몸의 일부이듯이 내 삶의 일부분이었다.
가족과 내 삶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였다.
가족은 언제나 내 삶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내 인생에서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가족과의 삶이 내 존재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가족을 넘어 세상으로 확대된 삶,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에 기여하는 삶만이
내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았다.
가족과의 삶은 어디까지나 소소한 즐거움과 사적인 생활에 불과했다.
그랬다. 가족은 내 삶의 중심에 있었지만 변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처럼 소소한 가족과의 일상이
정작 죽음 앞에선 가장 큰 아픔과 아쉬움으로 남게 될 것이라니 너무 놀라웠다.
조금 과장한다면 화들짝 놀랐다.
사실 가족이 소중하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은 이야기 아닌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그 닳고 닳은 이야기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서서 보니 그 무게가 달랐다.
그냥 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내와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가족과의 삶만으로도 충분히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랬다. 그때까지는 가족이 주는 삶의 무게를 알았지만 안 게 아니었다.
실로 가족의 재발견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재발견은 생각지 않은 착상을 하게 했다.
간 이식 후 큰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역사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가슴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목회의 꿈을 펼치지 못하더라도,
아내 홀로 창밖의 빗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있다면,
아들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마디 조언해 줄 수 있고 처진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더 살아도 좋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4월 8일 메모 수첩에 이렇게 썼다.
“살고 싶다. 일 년이라도 더. 아니 십 년, 이십 년을 더 살고 싶다.
비록 죄악과 어둠과 비탄이 가득한 세상일지라도
나는 다른 세상이 아니라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바로 이 세상을 좀 더 경험하고 싶다.
온 몸과 온 맘으로 더 깊이 겪어내고 싶다.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약한 증표라 해도 좋다.
믿음으로 이 세상을 상대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힐난해도 좋다.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고상한 세계,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진정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과 경험의 기회를 더 많이 누리고 싶다.
더 깊이 맛보고 음미하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며 가볍게 웃음 짓고 어깨를 다독여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간 이식의 대가를 지불해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아내와 다운이의 변해가는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기쁨이요 행복이겠는가!”
처음에도 말했지만 나는 참 어리석다. 매양 뒷북을 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왜 가족에게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가족에게 힘이 된다고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내가 삶으로서 가족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쩌면 짐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 참 웃긴다.
나라는 존재 속에는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보고 생각하려는
몰염치하고 이기적인 습성이 뿌리깊이 박혀 있나 보다.
아~ 이 후안무치하고 자기중심적인 동물이여!!
이런 글이 바로 살아 숨쉰다고 하는 거군요.
가족이 저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생명의 환희를 경험할 수 있어야겠군요.
이게 말로만 되는 게 아니기에
주님의 은총을 간구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힘이 목사님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좋은 주말, 맞으소서.
정병선 목사님!
이렇게 진솔한 글을 어디서 읽을 수 있을까요?
저희 아들이 제게 어머니날 준 카드에
엄마가 늘 옆에 있어줘서 너무 고맙다는 글을 읽고 눈물 나는 거 겨우 참았어요.
목사님. 자기중심적이고 뭐.. 그런 말씀 마셔요.
목사님의 수술 결정으로 인해 가족들이 얼마나 고마와하고 있을까요.
직접 뵌 적도 없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저 또한 많이 고마운 걸요.
매일매일 강건해지시기를 빕니다.
어두운 통로을 지나면 서서히 빛이 보이기 시작을 합니다.
어두움을 경험했기에 빛의 소중함을 감사합니다.
예전에 어두운 산속에서 헤매이다가 저 멀리 산사의 불빛을 보았습니다.
산사의 보살님에게 하룻밤을 간청드려 어두운 밤을 쉽게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정목사님이 경험하신 일상의 것들에 대한 생명의 끈을 엿봅니다.
그 생명의 끈으로 연결된 가족 공동체와의 유기적인 연결속에 주님의 작은 평화가 보입니다.
사랑 속에 이어지는 소중한 발견에 감사를 배웁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들을 앞세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가슴 반쪽은 늘 불이 꺼진 채로 어둡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 날의 일은 눈물 없이는 돌이켜볼 수 없습니다. 못다준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도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요.
목사님, 사모님 혼자 남겨두지 않으신 거 정말 잘하셨어요. 함께 할 날이 아직 남아 있는 것, 은총 맞지요? 주님의 만지심으로 속히 회복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