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의 진면목은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백 번 옳은 말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워낙 깊고 오묘해서 은폐할 수 있는 부분이 많고, 특별한 갈등이나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으면 쉽게 자신을 노출하지 않는 탁월한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면면을 파악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하여, 사람의 진면목이 노출되는 것은 대부분 위기적 상황을 만날 때이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다. 평상시에 예수님이 스스로를 위장하거나 은폐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가 가장 깊이 드러난 때가 바로 위기의 때, 곧 십자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였기 때문이다.

놀라고 괴로워하신 예수님

  제자들이 떠날 것을 예고하신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에 올라가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유다는 이미 예수님 곁을 떠났지만 나머지 제자들과 겟세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더 멀찍이 가셨다. 그리고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셨다. 지금껏 한 번도 괴로움을 토로한 적이 없으셨던 분께서 심히 놀라며 괴로워하셨다. 그것도 혼자 속으로 놀라며 괴로워하신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있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괴로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제자들에게 숨기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조금 더 나아가 홀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될 수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달라고.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왜 그처럼 놀라고 괴로워하셨는지. 이미 고난에 찬 죽음을 죽어야 할 것을 아시고 세 번씩이나 예고하신 분께서, 최후의 만찬을 통해 임박한 죽음을 준비하신 분께서 왜 갑자기 놀라며 괴로워하신 것일까? 지금껏 뚜벅뚜벅 이 길을 걸어오신 분께서 왜 갑자기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일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육체적으로 받을 고난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제자들의 무지와 배신 때문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처럼 고통을 호소하며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몸부림치셨을까?
  그것은 그분이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요(빌2:6) 그 영광의 광채로서(히1:3) 죄가 없으신 분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가진 인간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놀라움과 고통을 호소해야만 했다. 인간이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니까. 성경도 말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렇다. 그분은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끼고, 발가락에 상처가 나면 절룩거리는 분이셨다. 선택 앞에서 때로는 망설이기도 하시고,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할 때에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분이셨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줄 아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을 온 몸과 인격 전체로 다 겪으신 분이셨다.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신 분이셨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으시다는 것 외에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참 인간이셨다.
  더욱이 그분은 죽음의 실재를 누구보다도 깊이 아시는 분이다. 죽음이 죄의 삯이라는 것, 죽음의 본질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시는 분이다. 죽음이 저주임을 아시는 분이다. 그러니 그 마음속에 두려움과 아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분은 정녕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번민과 고통으로 짓눌려야 했을 것이다.
  본래 알면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법이지 않은가. 불이 뜨겁다는 걸 아는 사람은 불을 무서워하지만 불이 뜨겁다는 걸 알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불을 무서워하지 않고 덤빈다. 옛말에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배웠다는 식자들이 대부분 용기와 과감성이 부족한 것도 이미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저것을 알고 나면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모르면 무섭고, 알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앎에서 오는 두려움과 고통이 더 큰 법이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죽음의 본질을 깊이 아는 분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지를 아는 분이다. 그분에게 있어서 아버지와의 단절이란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의 위기이며 어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마음에 출렁이는 고통의 무게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을 것이다.

낯선 예수님

  우리는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상황 앞에서 번민하는 예수님을 보면 매우 낯설어 한다. 예수님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인간적인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는 수치도 아니고 낮선 것도 아니다.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는 그분의 겸손과 참된 위대성을 증거하는 표징으로 작용하였지 수치로 작용하지 않았다(빌2:6-11). 예수님의 진면목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신데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동시에 인간 중의 인간이셨다. 인간됨에 정직한 분이셨다. 그분은 단 한 번도 인간됨을 벗어버리려 하거나 감추려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이 죽음을 앞두고 심히 놀라며 괴로워하신 것도 어쩌면 인간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몸부림치며 신음한 것도 어쩌면 인간이 되신 아들로서의 신분에 정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분이 인간됨을 수치로 여기고 부끄러워하셨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는데 실패했을 것이다. 인간됨을 수치로 여기면서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분은 진실로 인간이셨고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충실하셨고, 기꺼운 마음으로 인간됨을 수용하셨기에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 인간됨은 그분에게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영광이었으며 긍지였다. 인간됨을 드러내는 것이 그분에게는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한 분이시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합체를 이룬 게 아니다. 신성과 인성의 합체가 아니라 그냥 하나이신 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곧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시라는 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비한 연합을 이루었고, 인간의 영혼과 몸이 신비한 연합을 이룬 것처럼, 신으로서의 예수님과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역시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있다. 하여, 신성과 인성을 논리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는 없다. 하여, 이 시간이 비껴가게 해주시고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의지이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간구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의지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성과 인성간의 갈등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오직 예수님일 뿐이다.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한 것도 예수님이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간구한 것도 예수님일 뿐이다.

신성에 치우친 한국교회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어떻게 해왔는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집중하고 강조한 반면 인성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인성에 강조점을 두면 마치 예수님의 신성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처럼 오해받기 일쑤였고, 인본주의 신학사상에 물들기라도 한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하지만 진실은 정 반대다. 인성을 외면하는 것이 문제지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생각해보라. 만일 그분의 인성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면 어떤 결과가 뒤따르겠는가? 그분의 존재와 사역의 토대와 중요한 핵심을 놓치게 된다. 예수님의 구속주 되심은 전적으로 그분의 성육신에 기초하고 있고, 예수님의 신비 또한 성육신의 신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육신은 예수님의 존재의 중심 본질이요 복음의 영원한 토대이니까. 성육신으로부터 복음이 시작되니까. 하여, 성육신을 외면하게 되면 그분의 모든 것은 일순간에 증발해버리고 만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외면하거나 경시하면 성경과 기독교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진실이 이러한데도 한국교회는 왜 입으로는 성육신을 말하면서 인성은 외면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인성에 신앙의 눈길을 주는 것을 왜 위험시하는 것일까? 지나칠 정도로 신성을 강조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을 신화화하는 꼴이 되고 마는데 한국교회는 왜 예수님을 신화화하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한국교회가 이미 종교화의 옷을 화려하게 입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고로 종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신비적인 요소가 필요하고, 또 신비함이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현실 너머의 세계로 숨어야 하는 법이니까. 신비의 길과 현실과의 단절이라는 두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종교가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가 어려울 테니까. 하여, 거의 모든 종교가 그 길을 달려왔다. 지금의 교회도 역시 그 길을 가고 있다. 중세교회가 화려한 종교화의 길을 가다가 복음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처럼 오늘의 개혁교회 역시 종교화의 길을 가고 있다. 교회가 구원의 길을 가기보다는 종교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성시하려고만 하고 구체적인 인성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교회의 몸짓이 왠지 불안하고 수상쩍어 보이는 것은 이천 년 전의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생각나서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신성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성육신을 보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예수님의 신성에 매몰되어 예수님의 인성을 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