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최고의 영광이며 당위이다. 사람이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듯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예배는 창조자 앞에 선 피조물의 아름다운 본분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하고, 교회의 지체로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이유나 명분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책무다. 이뿐 아니라 교회의 지체됨과 예배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가장 현실적인 표상이다. 사실이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란 상상할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한 것도 교회의 지체됨과 하나님 예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현실은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본분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관계는 더 이상 몸과 지체의 관계가 아니라 잠시 들러 종교 의례를 행하고 돌아가는 공급자와 수요자의 관계가 되어버렸고, 그리스도인과 예배의 관계는 더 이상 영광스러운 책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옭아매는 무거운 멍에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배에서 영적 고문을 당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의 본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예배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예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온통 물질적인 축복과 긍정의 힘으로 변조된 소리,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거짓 영의 소리임을 확인하며 영혼의 통곡을 하는 자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예배를 포기하기도 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신앙을 해친다며 예배를 드리지 않는 자들이 있다. 정말 심각한 위기다. 마땅히 예배해야 할 자들이 도무지 예배할 수 없다며 예배를 거부하는 이 현실, 교회에 더 이상 몸담을 수 없다며 교회를 등지는 이 현실을 과연 어찌해야 하겠는가?
물론 모든 예배 거부자들이 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그런 자들이 아직은 소수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예배를 찾는 자보다는 예배를 때우는 자가 많고, 예배를 드리는 자보다는 예배를 감상하는 자가 많고, 예배에 참여해주는 미덕을 발휘하는 자들까지도 있다. 예배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건 순진했던 시절의 옛이야기로만 회자되고 있고, 예배를 위해 목숨을 거는 자는 자칫 바보 취급을 받거나 박물관 대접을 받기 일쑤일 만큼 예배가 상대화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진실로 그렇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피조물의 굴복이 없는 예배, 세상의 가치관을 주님의 이름으로 공인해주는 예배, 종교적 욕망을 소비하는 상품이 되어버린 예배, 눈에 보이는 것에 지배당한 예배, 견뎌내야 하는 인내의 훈련장이 되어버린 예배로 인해 예배가 조롱당하고 있다.
심지어 목사가 목회하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할 수 없어 교회를 사임한 경우도 있다. 성공과 축복의 복음만을 듣기 원하는 성도들에게 더 이상 정직하게 설교할 수 없어서 손수 개척한 교회를 사임하고, 소수의 성도들과 함께 작은 카페를 빌려 예배하는 목사도 있다(2011년 6월19일, 다비아에 올라온 기사). 거짓말 하지 않고 바르게 예배하며 살기 위해 목사가 교회를 사임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교회가 처한 기막힌 현실이다.
나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과 승리와 부와 명예와 평안이라고 하는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성도들을 진리로 해방시켜내야 할 목회자가 오히려 성공과 승리와 부와 명예와 평안의 복음을 외쳤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거짓 복음에 열광하는 자들이 많다. 하지만 공적인 예배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아직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 교회 저 교회 전전하며 예배를 찾고 있는 자들도 있지만, 거짓 복음에 고문당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며 예배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다. 거짓 복음에 항거하다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자 마지막으로 선택한 자폭이 바로 예배 거부인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겠다. 나는 지금 예배 거부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배는 어떤 이유나 명분으로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책무라는 사실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절대 진실이다. 때문에 나는 예배 거부자들의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는 진실 때문에 예배를 어찌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예배 때마다 거짓 복음을 들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아픔을 십분 이해한다. 오랜 시간 거짓 복음에 길들여진 것을 뒤늦게 후회하며, 더 이상 거짓 복음을 듣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조금 더 진지하게 예배를 찾았으면 좋겠다. 거짓 영에 사로잡히지 않은 교회를 찾고, 함께 예배할 지체를 찾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본분 앞에 조금 더 겸손하고 성실했으면 좋겠다.
물론 예배 때문에 영적인 고문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요구일 수 있다. 억울한 책임 전가라며 속이 터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개떡 같을지라도 분분을 내던지는 것이 정의나 옳음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언제까지 지도자와 교회만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배자로 거듭나고 교회의 주체로 돌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위로부터의 변혁이 어렵다고 해서 아래로부터의 변혁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나도 위로부터의 변혁은 포기했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변혁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하여, 나는 예배를 견디는 자들, 예배로 인해 고문당하는 자들이 예배를 욕하며 등지기보다는 예배를 회복하는 변혁의 주체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성공과 승리와 부와 명예와 평안의 우상을 깨뜨리는 예배 공동체 건설자들로 분연히 일어서기를 희망한다.
기독교가 피지배 계급의 종교에서 지배 계급의 종교가 되면서 비극이 시작된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의 부조리에 뜻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뜻을 두고 영의 말씀을 쫓아 살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을 그들의 심정으로 보듬어 주고 사랑해 주는 종교였으나 기득권의 종교가 되면서 가진자들의 소셜 네트웨크가 되어 버리고 현실에서 복을 구하고 그 복을 빌어 주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 수요자 (신도)는 복을 요구하고 공급자 (목회자)는 돈(헌금)을 받고 복과 면제부를 줍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스스로의 자만과 자랑을 위한 쓰고 남은 조그만 물질적 베품은 있을지언정 그들과 영적 교류는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대신 자랑하기 위한 예배를 드립니다.
장로등 교회의 직분은 목숨을 걸고 성도를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대신 돈과 비열한 방법으로라도 사고 싶은 사회적 지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자나 예배를 주관하는 자 모두 마음이 콩 밭에 가 있는것 같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신도로써 예배를 드렸다는 자기 만족감과 주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액땜으로, 복을 빌기 위한 구복으로 또는 같은 교회의 사회적 지위의 사람과 사귀어 이익을 취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배를 주관하는 목회자로써 자신은 의연하다 하면서 교회에서 주는 돈과 혜택에 전혀 관심이 없고 다른 목회자와 비교해 보지 않으신 분이 계실까요? 신도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언제나 한결같이 주님의 말씀만 전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아니면 양을 인도한다는 목자의 심정을 핑계삼아 한 사람이라도 더 고객을 끌어 오려는 상업주의적 생각을 하신적이 있으신가요?
목회자나 교인 누구하나 기독교인으로써 지금의 교회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자신부터 주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도록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렇습니다. 폴님, 모두가 콩밭에 가있습니다.
콩밭에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 지나친 걸까요?
폴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배를 주관하는 목회자로써 자신은 의연하다 하면서
교회에서 주는 돈과 혜택에 전혀 관심이 없고 다른 목회자와 비교해 보지 않으신 분이 계실까요?
신도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언제나 한결같이 주님의 말씀만 전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아니면 양을 인도한다는 목자의 심정을 핑계삼아
한 사람이라도 더 고객을 끌어 오려는 상업주의적 생각을 하신적이 있으신가요?"
이 모두가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설교했는데 5만원 주면 기분이 유쾌하지 않아요.
하여, 저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예배자로의 회복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지요.
안녕하세요? 목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부산에 사는 한 대학생 청년입니다.
살짝 은사주의쪽에 있다가 은사주의 쪽 교회가 신학을 무시해버리고 결국 율법주의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쪽에서 조금씩 발을 빼고 있는 청년이죠..(물론 지금까지 경험헀던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고향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하다보니 섬길 교회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 다녔습니다... 율법주의가 아니면 세속주의에 물들어있는 복음메시지에 그냥 그러려니 참고 견디고 있다가... 도저히 이 곳에서는 저의 모습을 감출 수 밖에 없고.. 이 곳에서는 다른 지체들을 형식적으로만 대할 것 같아서...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그 이후 이곳저곳 물색하다가 교회 찾기를 어느새 포기해버리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아래로부터의 변혁은 어떤 것인가요? 그런 변혁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요? 몇번씩 마음이 맞는 지체와 그냥 주일마다 모여서 공동체형식으로 예배드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좀 아닌것 같아서..(너무 교만한 마음인 것 같아서..)그냥 그렇게 저렇게 살고있습니다... 가끔씩 좋아하시는 분 설교문 읽거나 들으면서요... 목사님께서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목자 다위님, 우선 반갑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는군요.
좋은 현상입니다.
고민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의 세계로 진입하기가 어렵다는 면에서
신앙으로 고민한다는 것은 정말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고민이 결국 파국으로 끝나는 건 비극이겠지요.
고민은 창조적인 결실로 드러나고 성숙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겁니다.
제가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말씀드린 건
마음이 통하는 몇몇 분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교회다움 회복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주체적으로 교회 문제를 사고하고 참여하면 좋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방법론이 아니라 태도의 변화라고 해야겠지요.
냉소적 비판도 아니고, 소비자적 태도도 아닌
주체적 참여를 말하는 겁니다.
물론 온전한 목사도 없고, 온전한 교회도 없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각자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는 용기,
행동하는 용기, 교회를 알아가는 용기,
새로운 교회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용기를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물론 이런 말들조차도 추상적이네요...
목자 다윗님의 질문처럼
어떤 형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가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풀어가야 하는
고민해야 하는
지혜롭게 싸워야 하는
교회를 세워가야 하는
현실적인 고민인데요....
일정한 방법론을 제가 제시하기보다는
함께 고민하며 풀어나가자는 제언입니다.
형제님의 미래를 기대합니다.
성공, 승리, 부, 명예, 평안보다 근본주의, 성서문자주의를 바탕으로 구습에 빠진 예배가 더 치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고(무조건 믿고 기도해라!) 율법적 신앙으로 내리닫는(십일조! 주일성수!) 예배에 생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