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환상을 사실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미래로 투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을 땅으로 끌어내려 사유화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경험적 이성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생명과 죽음, 죽음 이후의 세계, 삶의 본분과 의미, 영적인 권세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기독교의 믿음은 인간의 지각으로 포착되지 않는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이 지시하는 세계와 잇닿아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현실을 넘어선 현실, 눈앞의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될 종말론적 현실을 보는 것, 비록 그 현실이 지각되지 않을지라도 그 현실을 비현실로 내던지지 않고 그 현실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환상으로의 도피나 비현실적인 허구가 아니라 논리를 넘어선 논리, 과학을 넘어선 과학, 역사를 넘어선 역사, 현실을 넘어선 현실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은 신비요 은총이다.
그런데 믿음이 신비와 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운명처럼 끌어안아야 하는 약점이 있다. 믿음을 우리 맘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 이성으로 다 포착할 수 없다는 것, 또 이성으로 다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우매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많다는 것 등은 피하기 어려운 약점이다. 사실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삶과 죽음의 궁극적 진실을 알고자 하는 구도(求道)의 일면이 있음과 동시에 우상을 섬기는 일면 또한 피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기독교 세계도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들이 수없이 작동하고 있다. 합리를 표방한 비합리, 포기할 수 없는 탐욕과 허약한 자존심,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 현실을 도피하려는 유약함, 책임을 떠넘기려는 유치함, 무조건 믿으려 드는 맹목성 등 이런저런 약점들이 믿음의 세계를 미혹하며 비틀고 있다.
신념과 믿음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믿음과 신념은 본래 그 뿌리와 속성이 전혀 다르다. 신념이 인간의 차원이라면 믿음은 신(神)의 차원이다. 신념이 자기 중심적이라면 믿음은 관계 중심적이다. 신념이 강화하려 든다면 믿음은 심화하려 든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믿음과 신념을 구별하지 않는다. 믿음과 신념이 뒤섞여 있을 뿐 아니라 믿음이 신념의 차원에서 잘못 운위되고 있다. 이런 잘못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구체화하려는 고질적인 오류와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신의 차원에 속한 믿음을 인간의 차원인 신념으로 전위시켜 놓아야 인간의 의지대로 믿음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뭐든 체계화하고 다루고 싶어 한다. 비슷한 정황이나 사건을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된다 싶으면 재빨리 ‘A는 B’라고 체계화한다. 조금 다른 면이 있다 할지라도 약간만 연결된다 싶으면 ‘A는 B’라고 하는 인식의 틀에다가 끼워 맞추려든다. 이런 체계화 작업을 통해 사람은 기존의 인식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공고화된 인식은 또한 신념으로 작동하면서 삶 전체를 지배한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도 많지만 모름 앞에 서는 걸 매우 두려워하기도 한다. 모름은 체계화가 안 된 것이고, 체계화가 안 된 것은 다룰 수가 없기 때문에 낯섦과 모름 앞에 서면 호기심과 함께 두려움이 작동한다. 하여,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기존의 앎을 고집하려 한다. 다양한 경험을 최대한 기존의 인식 체계에 끼워 맞추려 한다. 자신의 인식체계를 반복해서 확인하려 하고, 더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으려 한다. 왜 그럴까? 왜 사람이 반복되는 검증과 확인을 통해 자신의 인식체계를 강화하려 할까? 인식체계의 성을 높이 쌓아야만 삶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삶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런 속성이 믿음에도 손길을 뻗친다. 믿음은 본래 신에 속한 것이고 관계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뜻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체계화하고 다루고 싶어 하는 인간은 믿음도 다루고 싶어 한다. 하여, 믿음을 신념으로 치환하는 잘못을 쉬 범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대부분 믿음을 위해 믿음을 강화하려 들지 않는가. 본시 믿음은 강화와는 거리가 먼 것인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신념처럼 강화하려 들고 있다.
강화의 첩경은 반복이다.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강화로 가는 지름길이다. 하여, 그리스도인과 교회 모두 끝없는 반복을 계속한다. 교육은 반복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각종 예배와 기도회, 성경 공부와 소그룹모임을 통해 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다 반복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의문과 질문은 금기시된다. 의문과 질문은 강화의 길을 가로막는 최악의 걸림돌이기 때문에 의문과 질문은 불신의 죄악으로 정죄되고 내몰린다. 그뿐 아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은 본래 하나님의 차원에 속한 것이고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믿음을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믿음을 잘 다루면 하늘까지도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반복 교육과 훈련을 통해 믿음을 강화하라고 말한다.
정직하게 말하자. 이런 믿음은 위로부터 주어진 은총이 아니다. 신비도 아니다. 이런 믿음은 하늘을 다루고자 하는 욕망의 분출일 뿐이다. 사실 믿음은 관계 회복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이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 하늘과 땅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인간과 만물의 관계를 잇는 사다리, 말씀을 매개로 한 소통의 사다리이다. 이뿐 아니라 믿음은 깊이의 차원을 보는 창이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진실의 깊이, 십자가로 드러난 사랑의 깊이, 삶과 죽음의 깊이를 보는 창이다. 때문에 믿음은 심화되어야지 강화되어서는 안 된다. 믿음을 강화하려드는 것은 사실 믿음을 해치는 것이다. 믿음은 매우 독특해서 믿음을 강화하면 할수록 믿음이 천박해지고 겉돌기만 할 뿐 믿음 고유의 세계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믿음은 심화될 때라야 비로소 믿음 고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다시 말한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은혜와 신비에 속한 것이며 또한 영혼의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강화한다는 것은 애당초 말이 안 되는 난센스다. 영혼을 육체 다루듯 할 수 없고, 이성을 컴퓨터 다루듯 할 수 없듯이 믿음 또한 신념 다루듯 할 수 없다. 신앙은 신앙의 본성(심화라고 하는 본성)에 맞게 접근해야 한다. 신앙 교육이 강화를 넘어 심화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