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은 단지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이자 삶의 전환이다. 땅에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통해 땅을 보는 새로운 눈뜸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든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 삶의 지평에 변화가 일어나게끔 되어 있다. 공간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데까지 확장되고, 시간적으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승리를 바라보고 인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변화가 일어나게끔 되어 있다. 그리고 신앙을 통해 삶의 지평이 확장되고 삶을 바라보는 눈(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자연스레 세상의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 사물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마음, 즉 삶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 이르게 되어 있다. 세상의 바쁨, 소유와 성취를 향한 경쟁의 틈바구니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게 되어 있다.

만일 신앙이 삶의 호연지기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에 뿌리를 내린 신앙인지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삶의 호연지기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신앙은 인간적인 욕망의 투사이거나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피안으로의 도피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많을 테니까. 부활생명을 노래하는 구원의 은총이기보다는 종교적 도착(倒錯)에 불과할 가능성이 많을 테니까. 물론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인격 도야와는 근본이 다르다. 홀로 고고하기만 한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존재로서 철저하게 역사적이어야 한다.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을 위해 전심전력해야 한다. 자기 안의 죄성과도 싸워야 하지만 세상의 어둠과도 싸워야 한다. 세상의 변혁을 위한 오늘의 전투에 뛰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호연지기를 잃어서도 안 된다. 초조함과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는 것, 신앙에 집착하는 것, 결과에 연연하는 것은 삶의 지평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촉음을 아껴가며 성실하게 수고하면서도 삶의 호연지기를 잃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승리를 목도한 자들이다. 예수 안에서 이미 하나님나라에 참여한 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마땅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에서 오는 여유와 평안, 그리고 주어진 결과와 현실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함이 있어야 한다. 절대적인 세계에 몸담은 자에게서 나오는 깊은 정적이 있어야 한다. 상대적인 것에 목숨 걸지 않는 대범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 호연지기이다. 물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승리만을 믿고 무책임 · 방만 · 초월 · 게으름 · 무사안일에 눌러앉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푯대를 향하여 풋풋하게 정진해야 한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헛됨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삶의 호연지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호연지기는 하늘의 주요한 속성이고, 빼놓을 수 없는 진리의 열매이다. 절대 세계, 종말론적 하나님나라를 보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여유와 평안이 바로 호연지기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바로 이 영적 호연지기가 없다. 삶의 지평이 지나치게 좁고 조급하고 분주하다. 비교에 민감하다. 역사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몰두한다. 신앙을 심화하기보다는 강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입신양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데 주의 이름으로 입신양명을 노래하고 있다. 부귀영화에 굴복하지 않아도 되는데 부귀영화에 주눅이 들어 있다. 옆 사람이 1미터 앞서 달린다고 해서 초조해할 필요가 없는데 초조해 한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지 않는다고 해서 의기소침할 이유가 없는데 의기소침해 한다. 교회 안에 강박증 환자와 우울증 환자가 많다. 자살하는 자들이 많다. 안식과 평화가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쳐 있다. 영적 호연지기가 없다는 반증이다. 정말이다. 진리의 기둥이요 하나님나라의 지상 식민지인 교회 안에 정작 하늘의 주요한 속성이요 빼놓을 수 없는 진리의 열매인 호연지기가 없다.

교회는 세상보다 나음을 증명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름을 증명하는 곳이어야 한다. ‘자기’라는 중심성에 갇혀 있는 세상과는 결이 다른 삶의 문화가 교회 안에 살아나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신뢰와 사랑이라는 삶의 문화다. 인간적 가능성에 기초한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에 기초한 문화다. 성취보다는 받음에 주목하는 문화다. 그리고 이런 문화의 구체적인 모습을 뭉뚱그려서 나는 ‘호연지기’라 한다. 물마시고 하늘을 보는 나태와 내면으로의 이주가 아닌 도상의 존재로서의 삶의 호연지기. 나는 이런 호연지기가 한국교회 안에 회복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