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깨어있으라는 말씀이 종종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말의식을 갖고 깨어있을 것을 권고하셨고(마24:42, 25:13),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다(막14:38). 바울은 빛의 아들답게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했다(살전5:6).
그렇다면 묻자. 깨어있다는 것이 뭘까? 기도하는 것일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것일까? 끊임없이 묻고 따지는 것일까? 유행과 시류를 거스르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것들도 깨어있음의 일부일 것이다. 하지만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유행과 시류를 거스르며 사는 자들 중에도 깨어있지 못한 자들이 있는 걸 보면 깨어있다는 것은 그런 것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깨어있다는 것은 단지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고 폭이 넓다. 깨어있다는 것은 대상을 깊이 보는 것이다. 나를 깊이 보고, 내 앞의 사물을 깊이 보고, 내가 처한 상황을 깊이 보고, 내가 겪는 경험을 깊이 보고, 내 마음의 흐름을 깊이 보고, 내가 살아가는 시대적 현실을 깊이 보고 의식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는 것도 깨어있음의 일면이다. 내가 처한 상황, 내가 내리는 판단,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겪은 경험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이 바로 깨어있는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에 빠져 들어가지 않고 전후 맥락을 조망하는 것,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감정의 흐름과 근원을 파악하는 것, 여론이나 상식을 추종하기보다는 정말 그러한지를 묻는 것 등이 곧 깨어있음이다. 바꿔 말하면 나를 객관의 토대 위에 올려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엄정한 객관이란 존재하기 어렵겠지만, 최대한 객관적 토대 위에 나를 올려놓고 관찰하는 것, 예수라는 진리의 거울 앞에 나를 비추어보는 것이 깨어있기 위한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또 깨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을 넘어 나와 너의 경계선을 해체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깨어있음이란 본래 존재적이기보다는 관계적이다. 때문에 자아의 각성만으로는 충분히 깨어있다고 할 수 없다. 존재론적 각성이 불교적인 해탈을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기독교적인 구원에 이르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깨어있음이 기독교적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아의 각성을 넘어 모든 존재를 향해 열려있어야 하고, 다른 존재의 깊이로 들어가야 하며,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전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와 너, 우리와 만물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그물망을 인식하고, 그 생명의 그물망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 그리고 타인의 아픔과 처지에 참여함으로써 깨어있음은 완성된다.
진실로 그렇다. 깨어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은 것, 나와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것, 만물과의 연대성에 눈 뜨는 것, 만물과의 연대성에 감사하는 것,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 너의 상황과 처지에 동참하는 것, 서로를 살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빛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하나님의 눈으로 응시하며 사는 것이다.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 수 있을 때 깨어있음은 비로소 완성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 하나 있다. 깨어있다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깨어있는 자는 깊이 숨어 있는 삶의 어두운 실상들을 응시하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값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이다. 깨어있음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고통이 깨어있음의 증거일 수는 없지만, 모든 깨어있음에는 언제나 고통이 동반한다. 물론 이 고통은 두려움과 공포, 질병과 죄악에서 오는 고통과는 다르다. 깨어있는 자가 겪는 고통은 긍휼과 연민 그리고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고통이고, 정화와 치유를 발화하는 창조적 고통이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고통이다.
삶이란 역설이다. 깨어있음에는 반드시 이런 고통이 동반하며, 이런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자의 영혼에는 행복이 임하지 않으니까. 지고지순한 행복의 꽃은 고통이라는 눈물을 먹고 피어나니까. 뜨거운 고통, 창조적 고통, 행복한 고통의 이면을 갖지 않은 행복은 거품에 불과한 가짜 행복이니까.
우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을 살기 위함이다. 죽음을 살지 않고 생명을 사는 것, 저주를 살지 않고 구원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깨어있음의 목표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있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해 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에 나를 붙들어 매야 한다. 빛이신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 나를 깨어있게 할 수 있는 자는 내가 아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를 깨어있게 할 수 있다.
<말씀샘교회 목사>
목사님께서 도달한 세계를 이렇게 이성적인 언어로 표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깨어있음이 하나님의 창조의도 속에 있는것이기도 할 것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목사님의 설교를 읽어오고있어서이기도 한듯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요한계시록부터 차례로 읽어오면서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저같은 초보자에게도 이해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설교는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시면서
참 아름답게 이해되게 하셔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영적 환원주의로 귀결되지않으면서 깨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다는것은
쉽지않겠지만 기쁘게 걸어가야할 듯 합니다.
왜에 대한 답이 되는 글과 설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