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지 2주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떤 글도 쓸 수 없었습니다.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아들과 딸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 입을 뗄 수 없었고, 너무도 찬란한 자식들을 잃고 통곡하는 부모의 애끓는 탄식 앞에서 침묵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사실 어느 누가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무색하지 않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그 어떤 분노의 말도 다 참담한 눈앞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한없이 허허로울 뿐이었습니다. 솔직히 어떤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 마음을 찌르는 수치요 고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암담합니다. 많은 시신이 인양되긴 했어도 아직 100명 이상이 바다 밑에 갇혀 있는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안전 불감증에 공모한 우리 사회의 온갖 추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공감과는 거리가 먼 대통령의 처신과 일관되게 3자적 태도를 견지하는 대통령의 공허한 말, 그리고 재난 대처 능력에 구멍이 뚫린 정부의 좌충우돌로 인해 유가족은 물론이고 온 국민의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실로 총체적 국난입니다. 안산뿐 아니라 온 나라가 초상집입니다.
당연히 어떤 말을 하기에는 아직도 우리의 아픔이 너무 크고 깊습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해 애태우는 유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을 헤아리면 송구한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송구함을 무릅쓰고 객쩍은 소리 한 마디 하려고 고통과 슬픔의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사회학자도 아니고, 사회 비평가도 아니고,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싸우는 시민운동가도 아닌 한 사람의 국민이요 자식을 둔 애비요 설교하는 목사로서 구체적이지도 전문적이지도 않은 객쩍은 소리 한 마디 하려고 말입니다.
귀화한 러시아인 박노자 교수가 그랬더군요. “이번 일은 거의 ‘전형’에 가깝습니다. 한국형 자본주의 토양에서 부득이하게 일어나게 돼 있는 ‘사회적 대량 타살’의 전형이란 말입니다.”라고. 매우 부끄러웠지만 옳은 지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번 사고에 온 국민이 이처럼 마음 아파하는 것도 사실은 잃지 않아도 될 아이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부실이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을 죽음에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사회의 부실을 열거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단지 이번 사고와 관련해 몇 가지만 생각나는 대로 짚어보겠습니다. 거의 내성화된 안전 불감증, 기본과 과정에 충실하지 않은 성급함, 공공정신의 부족, 직업윤리의 실종, 돈과 성공에 올인하는 사회 분위기, 사람의 가치를 돈에 의해 평가하는 데서 비롯된 생명경시풍조, 대학 입시에 종속된 교육, 각 사람의 주체 역량을 키우지 못한 교육, 그런 교육 환경으로 인한 사고력의 부재, 특히 인문 사고의 부재 등이 퍼뜩 떠오르는군요.
어떤 분들은 이런 것들이 이번 사고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구체적이지 않다고, 지나치게 추상적이라고, 이번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옳습니다. 그리 구체적인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나는 구체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문제는 여러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나는 가장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모든 구체적인 문제는 구체적인지 않은 데서 비롯되니까 말입니다.
자주 발생하는 ‘고독사’(주로 가난한 노인 분들의 아사)를 생각해봅시다. 고독사가 일어난 배경은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식과의 불화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질병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심리적인 고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원인이 다양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OECD국가 중 최악의 ‘산재사’(1년에 약 2천 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음)가 발생하는 것, 같은 패턴의 인재가 계속 재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인 사건의 배경은 제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배경은 거의 위에 나열한 부실들이 대부분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 또한 이런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부실들이 총체적으로 빚어낸 참사입니다. 특히 사람의 생명보다 돈을 더 앞세우는 썩은 정신이 노후한 배를 사용하게 했고, 계약직 선원을 고용하게 했고, 과적하게 했고, 무리한 출발을 하게 했고, 승객들의 생명은 물속에 방치한 채 선원들만 빠져 나오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사람답게 살아가기 힘든 사회, 즉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사회,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사회, 끝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무례사회가 된 것도 위에 나열한 부실들 때문입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치유하는 것만으로는 극복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를 부실하게 만든 근원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또 다른 곳에서 비슷한 재난이 재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 발생 가능한 예고된 재난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에 ‘국가안전처’ 신설이라든지 위기관리 매뉴얼을 재정비하는 처방전을 내놓고 있더군요. 물론 마땅히 취해야 할 조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인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거의 내성화된 안전 불감증, 기본과 과정에 충실하지 않은 성급함, 공공정신의 부족, 직업윤리의 실종, 돈과 성공에 올인하는 사회 분위기, 사람의 가치를 돈에 의해 평가하는 데서 비롯된 생명경시풍조, 대학 입시에 종속된 교육, 각 사람의 주체 역량을 키우지 못한 교육, 그런 교육 환경으로 인한 사고력의 부재, 특히 인문 사고의 부재 등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근본 원인입니다. 한 가지로 줄이면 생명보다 돈을 앞세우는 우리의 썩은 정신과 관행이 원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 국민의 사고방식, 삶의 지향점,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체질을 결정합니다. 때문에 바로 여기서부터 손을 봐야 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요인부터 손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어떤 처방전도 다 미봉책일 뿐입니다. 소중한 국력 낭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험사회, 불신사회, 무례사회로 추락한 우리 사회를 치유하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매우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아젠다(Agenda)를 바꾸고, 우리 삶의 모드(Mode)를 전환하는 것만이 진정한 치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아젠다는 부자 되자는 경제 중심의 ‘잘 살아보세’에서 함께 더불어 살자는 삶 중심의 ‘잘 살아보세’로 바꾸고, 삶의 모드는 성공을 추구하는 것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혁명적인 전환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사회 혁명의 길, 사회 치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내세운 아젠다, 즉 경제 중심의 ‘잘 살아보세’라는 아젠다를 뒤좇아 왔습니다. 물론 1960년대 당시에는 그 아젠다가 필요 적절했으며, 그 아젠다의 힘으로 여기까지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젠다가 결국 지금의 우리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온 국민을 돈의 하수인으로 전락시켰고, 돈 제일주의 · 능력 제일주의 · 성공제일주의로 무장시켰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위험사회 · 불신사회 · 무례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온 나라를 초상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아젠다를 바꿔야 합니다. 부자로 살아보자는 ‘잘 살아보세’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품격 있게 살아보자는 ‘잘 살아보세’로 바꿔야 합니다. 삶의 모드 또한 지금까지는 성공에 맞춰놓고 살았으나, 이제는 행복에 맞춰놓고 살아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인식의 대전환을 해야 합니다.
물론 누구나 압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값진 것은 생명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값진 것은 삶이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아마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상식에 충실한 사람, 일상에서 생명과 삶에 천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돈과 성공에 골몰했습니다. 돈과 성공을 거머쥐기 위해 생명과 삶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국가의 정책 또한 사람이, 사람의 생명이 최우선이었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많았고, 사람의 생명보다 더 큰 대의가 그리도 많았습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의 생명은 너무 쉽게 공권력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사실은 국민의 생명이 국가보다 더 위에 있어야 하는데, 국가가 가난한 백성의 생명과 삶을 최대한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하는데, 툭하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돈과 성공에서 생명과 삶이 나오지 않는데, 삶은 오직 생명의 고유한 살림살이이고, 생명이 그 무엇에도 짓밟히거나 왜곡되거나 침해받지 않고 생명을 향유하는 것이 곧 삶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머리와 입으로는 생명과 삶이 가장 중요하고 값지다고 인정하고 떠들면서 말이죠. 심각한 모순이었습니다.
바로 이 모순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내적인 모순을 극복해야만 이 사회의 모순도 극복됩니다. 생명과 삶이 가장 중요하고 값지다는 지극한 상식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상식이 우리 사회의 아젠다가 되고, 삶의 모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돈 제일주의 · 능력 제일주의 · 성공제일주의에서 생명제일주의로 탈바꿈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위험사회 · 불신사회 · 무례사회에서 사람다운 삶이 어우러지는 사회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참담한 일이 재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치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자고로 사람이 살만한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요?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사회,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존중하는 사회 아니겠습니까? 이보다 더 나은 사회란 사실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촉구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온 국민에게 촉구합니다. 우리 사회의 아젠다와 정부의 아젠다를 바꿔주십시오. 경제 중심의 ‘잘 살아보세’가 아닌 품격 있는 삶 중심의 ‘잘 살아보세’로. ‘안전한 국가’나 ‘경제대국’이 아닌 ‘생명을 보듬고 북돋는 국가’로. 삶의 모드 또한 성공에서 행복으로 전환해주십시오. 이것만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근원적인 혁명의 길, 진정한 치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국민의 마음속에 생명을 최고로 중시하는 ‘생명제일사상’을 이식하는 것만이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으로 회생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북이 하나 되는 진정한 통일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를 했나요? 사실은 지극히 소박한 이야기였습니다. 누구나 아는 상식을 되뇌었을 뿐입니다. 단지 다들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눈앞의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객쩍은 소리인 줄 알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도 송구한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많은 아이들이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에 갇혀 있고, 너무도 찬란한 아들과 딸 그리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죄스러울 뿐입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참사에 함께 슬퍼하는 모든 분들에게도 송구한 마음을 전합니다.
말씀샘교회 목사
어느 목회자의 고백 / 행복을 살다 / 신앙의 마스터클래스 / 외 저자
예, 목사님,
이번 참사의 근본을 돌아보게 하는 좋을 글, 잘 읽었습니다.
삶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텐데,
지금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거와 같아서
그게 까마득하게 보입니다.
더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건지...
목사님 안녕하세요?
고마운 마음으로 올려주신 글 읽었습니다.
이 참극이 참극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계속 직시하고 질문하고 반성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보기좋은 모래성만
쌓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분명히 이
모래성이 쓰러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평안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