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하는데 보라가 왁왁 시끄럽다.
부엌
창으로 내다보니 우동댁 어르신이 우리집으로 올라오신다.
허던 일을 멈추고 마당으로 나갔다.
“하이고, 늙긴 늙었나벼... “
우동댁
어르신이 아랫 마당에 떨썩 주저앉으시며 가쁜 숨을 내쉰다.
마른
솔잎 하나가 까맣게 염색한 파마머리에 얹혀있다.
겨우내 농사일을 안해서인지 피부에 한결 윤기가 돈다.
겨울 한철을 지났을 이 무렵이 이곳 할머니들의 얼굴이 가장 이쁠 때다.
햇볕에 그을렸던 거친 피부가 고와지기 때문이다.
곧 햇볕의 무한
세례를 받게 되지만 말이다.
한숨을 돌리신 우동댁 어르신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두부 한 모를 건네주신다.
가지런히 다듬은 대파와 함께.
“어머나.., 웬 두부를..? 직접
하셨나봐요.”
“응, 지난 설에 못 온 작은 딸이 왔는데 먹고 잡다 캐서 쬐께 했어.
더울 때 아자씨 잡솨 보시라고….”
아픈 남편에게 주고 싶어 숨차게 올라오신 우동댁의 마음처럼 두부는 보드랍고 따뜻했다.
들어오셔서 차 한잔 하고 가시라 해도 마다하시곤 여느 때처럼 잰 걸음으로 내려가신다.
우동댁.
우리동네에서 태어나 우리동네로 시집왔다고 해서 불려지는 호칭이란다.
이 분은 내게 늘 뭔가를 주고 싶어하신다.
철이 바뀔 때마다 다양하게도 받아먹는다.
호박도 따주시고 오이도 가져다 주시고 삶아 먹어 보라고 햇밤도 주시는가 하면
무우를
포대로 담아 주시기도 한다.
“농사 없는 사람은 이런 것두 다 사 먹어야잖우…” 하시며 아낌없이
퍼준다..
남편이 수술을 받은 직후에 동네분들이 생각지도 못한 금일봉 봉투를 가져와 나를 적잖이 당황시켰는데
우동댁은 적어서
미안해하며 내 손에 봉투를 한사코 쥐어주셨다. “아자씨 우유라도 사 드리라”며.
봉투 속에는 이만원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 이만원이 이십만원보다도 더 크게 여겨졌고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우동댁 할머니는 언젠가 내게 물으셨다. “뭐할라꼬 이 촌구석에 왔냐” 고.
“여기가 좋아서요” 라고 대답하자
“ 아, 대처가 좋지 여그가 뭐시 좋냐”며 이해불가의 표정이셨다.
할머니가 평생 살아보지 못했다는 대처, 그 환상의 도시에서 탈출한 나는 그저 웃음을 지을 수 밖에.
두부는 약간 가무스름했고 구수했다.
필시 지난 해 논두렁의 땅을 골라 심으시던 그 콩일 게다.
그 콩을 불려서 아궁이 불을 지펴 삶고 갈아 만든 두부.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두부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대파를 송송 썰어 넣은 양념장을 끼얹어 갓 만든 따뜻한 손두부를 먹었다.
짭잘한 양념장과 어울린 두부는 순하고 깊었다.
이게 바로 ‘대처’에 없는 ‘촌구석’ 맛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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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다>원고 나눕니다.
전교생 기숙사생활하는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시청각실에 마련한 예배실에
주일마다 오셔서 설교하시던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은퇴하신지 20년 가까이 되셨습니다.
사업하는 아들이 마련한 전원주택에 두분이 계셨습니다.
아들 내외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집주위를 돌보고 있더군요.
미나리 부침개를 전채로 하고
청국장 순두부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목사님 아들이자 제 친구가
미나리를 한 단 사주었습니다.
오늘 아침 아내와 미나리무침에 보리밥 비벼 먹었습니다.
미나리 내음과 함께
아 여기가 한국이구나
느낌이 진하게 왔습니다.
시골 사람들의 살아가는 풍경이 눈에 선하네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웃겨 님이 행복하게 사는 이유는
사람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깊어서인가 봅니다.
음력 1월17일, 오늘밤 달도 정말 눈 부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