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2022년 12월 14일 오전 10시 44분에 만 91년 2개월 동안의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고

그렇게도 원하고 원하셨던 하나님 품으로!


어머니는 일산 근방 호스피스 병원에서 임종하셨는데

그 순간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다. 

돌아가시기 전 날 밤과 다음날 아침까지의 몇 시간이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마지막이다.

이미 의식이 없어지신 엄마는 밤 동안 호흡이 매우 힘들어 보였다.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가래를 제거한 후

아침까지 비교적 평온한 호흡이 유지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수간호사가 들어와서 맥이 잡히지 않고, 임종 직전의 호흡이라고 해도 

한 두 시간 뒤 엄마가 운명하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수간호사가 다녀 가고 곧 이어 의사가 다녀간 후 

전문 요양사 두 분이  욕창 방지를 위해 엄마의 몸을 뒤척여 놓고는 돌아갔다.

엄마의 목을 반듯하게 하려고 받쳐 드는데 머리가 맥없이 축 처졌다. 이상한 낌새가 감지됬다.

병실에 다시 고요한 평온이 흘렀다.

엄마의 거친 숨소리 외엔.

병실을 지키는 나와 엄마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엄마의 호흡이 이상하다고 여겨진 순간,

몸을 일으켜 엄마를 주시했다. 

엄마의 숨이 약하게 잦아드는가 싶더니 얼굴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나는 황급히 간호사실로 뛰어갔고

간호사와 내가 들어왔을 때 엄마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한 번 내쉬는가 싶더니 곧 호흡이 멎었다.

순식간이었다..!. 믿을 수 없으리 만큼 짧은 찰라에 엄마의 육신은 이 세상을 벗어났다. 

흐느끼는 내 등을 쓸어 주는 누군가의 손길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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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엄마의 몸에 달려있던 줄이 제거되고 

하얗고 깨끗한  시트가 덮인 엄마의 가슴 위에 작은 꽃다발이 놓여졌다.

잠든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가족들이 모여 들었고 엄마를 둘러싸고 찬송을 불렀다. 

나 죽으면 울지 말고 찬송을 불러 달라시던 뜻대로. 작은 흐느낌이 이어졌다...

모두들 예상했고 죽음이 엄마에게는 더 없는 구원임을 모두가 알고 기도했던 일이었지만

 별리의 슬픔은 별개였다.

나는 시트 속으로 손을 넣어 엄마의 몸을 만졌다.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한 시간 쯤 지나 따뜻하던 몸이 점점 식어가고 손가락이 굳어간다고 느껴질 즈음 엄마의 몸은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어머니의 장례는 조용하면서도 작은 축제같이 진행됬다.

발인 전 문상객이 뜸한 시간에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우리 자손들은 가족만의 예배를 드렸다. 

평소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찬송을 부르고 

어머니를, 할머니를 기억하는 일화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올해 설날 어머니께서 세배를 받으시며 하신 덕담을 영상으로 보았다.

달리 유언은 못하셨지만 어머니의 당부를 나는 명확히 안다. 그건 딱 두 가지.

첫째, 하나님을 잊지 마라.

둘째, 동기 간에 우애하며 살아라. 였다.


우리는 이런 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보내주신 것을 깊이 감사드렸고

어머니께서 살다가신 믿음의 삶을 받들어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이런 모습을 엄마가 보신다면 참 흐믓하셨을 거라고 여겨진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형제애와 결속감을 느꼈다.

어머니가 우리를 사랑으로 묶어주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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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있던 엄마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3주 전 쯤 일반병원 입원실에서 였다.

코로나로 가족 면회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간호사 눈을 피해 짧은 도둑 면회를 한 그날.

엄마는 놀라우리 만큼 맑게 정화 된 얼굴이었다. 

"엄마! 나 왔어~" 나는 엄마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엄마는 너무 투명해서 마치 영혼까지 들려다 보일 듯한 맑디 맑은 눈으로 나를 보시더니 아기처럼 빵끗! 웃으셨다.

그런 엄마의 웃음이 너무 생소하고 사랑스러워서 엄마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 엄마 내가 누구야?"

" 우리 딸이지~! " 약간 장난스런 말투와 표정이셨다.

나는 엄마가 나와 언니를 혼돈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다시 물었다.

" 엄마 딸 누구?"

" 우리 둘째 딸, 김.혜.란.이지~!" 아주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다시 엄마의 볼을 비벼 댔다.

" 엄마 집에 가고 싶지?"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조금만 기다려..."  

1분도 채 안되는 짧은 면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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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입원하시기 전 마지막 3주 동안 어머니를 우리 진안 집에 모셨다.

곧 부서질 듯한 검불 같이 가벼운 엄마를 우리 집에 모셨을 때 만해도 

겨울을 지나고 따뜻한 봄 쯤에나 돌아가시려니 했었다.

생각처럼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함께 한 그 시간은 내게 무척 위로를 준다.


그 때 어머니와 나눈 대화 한 대목이다.

엄마-나 죽으면 너 여기서 혼자 어떻게 사냐?

나는 이젠 내 보호를 받으시는 가랑잎 같은 엄마가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게 너무 재밌었다.

나- 이 서방하고 살면 되지..

엄마- 이 서방 죽으면 너 혼자 외로워서 어떻게 사냐?

나- 엄마 걱정 마. 외로워야 하나님과 가까와지지.

엄마- 그렇지...(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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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생으로  해방과 육이오. 산업화를 겪으며 온 몸으로 그 시대를 살아 내신 분.

보수적인 충청도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셨는데 더 배우지 못한 것을 못내 한스러워 하셨다 

산문 소설 읽기, 동요 가곡 부르기, 그림책 색칠하기를 좋아하셨던 어머니.. 

 시골교회 사모로 평생을 사시느라 호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분.

그러나 나는 엄마가 참 잘 살고 가셨다고 생각한다.

성실과 진심을 다하셨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농촌에 청년들이 다 떠나 주일학교 교사가 없자 어머니는 몸소 주일학교 반사를 하셨다.

그 때 매주 교재를 성실히 준비하시던 일, 성경 말씀을 스폰지처럼 받아들이는 몇몇 아이들을 

그렇게나 기특해 하시던 일.

마을에서 가난하고 대접 받지 못하는 이들은 교회에서도 대우 받지 못하는 법인데 

 그런 이들에게 마음을 더 기울이시던 모습. 

 어느 날 한 거지가 사택에 들어와 구걸을 하는데

그날 따라 밥도 없고 돈도 없고 해서 그냥 돌려 보낸 것을 얘기하셨다.

따뜻한 밥을 못 먹여 돌려 보낸 것이 두고 두고 마음에 걸리신다며.

어머니의 일생을 보며 나는 신앙을 배웠다.

이보다 더 값진 유산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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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옆에  한 줌의 재로 된 어머니의 유골함을 안치하고 돌아와 나는 죽음 같은 잠을 잤다.

일어나니 사는 게 종이 위의 소설 같다. 어머니의 장례 기간 내내 그러했다.

어떤 게 실제인지...?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무디어진 느낌이다.

아직 실감은 나지 않지만  큰 나무가 뿌리 채 뽑혀 나간 듯, 가슴에 깊은 구덩이가 패인 것 같다.

아아... 이제는 엄마라고 부를 존재가,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을 만질 수 있는 엄마가 안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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