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동네에 혼자 사시는 70대 남자 분이 계시다.

자녀도 일곱이나 두셨고 아내도 있는데 술 떄문인지 큰 집에서 혼자 사신다.

동네에서 약간 왕따인 듯 보이는 것도 술 때문인 것 같다.

깡마른 몸으로 미루어 보아 밥보다도 술을 더 즐겨 드시는 것 같다.

인철씨가 '기봉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고서 그 분 이름이 "기봉" 인 줄 알았다.


 어제는 가을 햇살이 참 좋았다.

오후에 볼 일이 있어 남편과 함께 아랫동네에 가는데

길에서 나락을 말리고 있는 농부 곁에서 말벗을 하고 계신

기봉이 아저씨를 만났다.

남편을 보자 반색을 하며 자신의 집에 가서 커피 한 잔하고 가란다.

오는 길에 들리겠다고 하고 일을 마친 후 기봉이 아저씨 댁에 갔다.

우리가 들어가자

기봉이 아저씨께서는 반가워하며 커피를 타 내오신다.

머그잔도 아닌 날렵한 커피잔에 얌전히 쟁반까지 받쳐들고서,

우리는 가을 햇살이 바삭거리는 뜨락에 서서 커피를 마셨다.

집 안팍이 의외로 단정히 정리되있다.


"열무도 뽑아다 짐치해 드시고,

저 들깨도 다 베어다 지름 짜 묵어~~!!"

사람 좋아보이는 기봉아저씨가 인심을 팍팍 쓰신다.

 남편을 좋아하는 눈치인데

그렇게 된 사연이 있는데 좀 길지만  옮기자면 이렇다.


사연인즉슨,

지난 여름 동네 아주머니의 칠순잔치에 초대를 받아갔는데

남자어른들의 식탁에서 갑자기 고성이 터져나오는 게 아닌가?

" 나가~~!!!!"

 나는 밥을 먹다가 기겁을 해서 수저를 떨어트릴 뻔했다.

생일 잔치상에서 웬  고성???

그런데 다른 분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식사를 계속했다. 

생일을 맞은 아주머니만 음식을 나르며 흔연스럽게 지나칠 뿐.

" 아, 왜 고함을 지른댜~~ 화통을 삶아 묵었나...?"

이런 상황이 별 일이 아닌 듯한 분위기다.


고성을 지르며 가라고 하는 사람은 생일을 맞은 아주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집주인이었고

그 상대는 바로 기봉이 아저씨였다.

 손님을 오라해놓고 집주인이 손님을 향해 소리소리를 지르고 있는 형국이었다.

박근혜, 문재인.. 어쩌구 하는 소리가 오가더니 

금방이라도 상을 들러엎을 것 처럼 집주인의 기세가 험악해졌다.

급기야, " 당장 나가~~~!!!"라는 호통으로 이어졌다.

 " 가라고 하면 못 갈 것 같아?

기어코 기봉아저씨가 씩씩거리며 일어난다.

"아, 나가라니깐~~!!!!"

그 뒷 모습에 대고 집주인은 당장 꺼지라고 소리소리치는데

그 상에서 같이 있던 남편까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기봉이 아저씨를 따라 나가는게 아닌가?

이게 도데체 어찌돌아가는 상황인지...

 어색한 손님으로 왔던 나는 가뜩이나 불편해져서

황망히 수저를 내려놓고 조용히 나오고야 말았다.

기봉이 아저씨를 따라갔던 남편이 몇시간 뒤에 돌아왔다.

쫒겨난 아저씨가 안되보여서 모셔다 드릴겸 따라갔다가

 신세타령까지 듣고 왔다는 것이다.

술 먹는다고 맏아들과 아내가 정신병원(아마도 알콜중독자치료센터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에 넣었다고 원망하더란다.

몇시간을 앉아서 이런저런 한탄을 다 들어주고 온 것이다.


남편으로 부터 전해들은 고성이 터지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삼성병원 조리사로 있다는 아들이 쩍벌어지게 차린 아내의 생일 상을 손님들께 자랑하고 싶었던 집주인 아저씨.

" 이거 말야, 우리 아덜 며느리들이 어제밤 잠도 안자고 준비한겨~!

청와대 가도 이런 밥상은 못 받아볼거여~!!"

라며 으시대는데

기봉이 아저씨께서 눈치도 없이 바른 말을 하신거다.

" 뭐더러 이 더운 날 집에서 상을 채려? 자석들 고생시럽게...

나가서 먹음 될 것을 ~!"

 상차림을 과시하고픈 집주인은 기봉이 아저씨의 계속되는 눈치없음에

 심사가 뒤틀렸는데

 "문재인이 이번에 통일을 못하면  끝나는 겨.."

하는 기봉 아저씨의 뜬금없는

 발언을 꼬투리 삼아 버럭 화를 내신 거란다.

" 아, 박근혜 야그를 여기서 왜 하는겨??!!!"

" 내가 은제 박근혜 야그를 했다고 그려, 문재인이라니께!!"

" 문재인이든 박근혜든 씨끄러워~!! 하지마~!!!"

" 내가 문재인이라고 혔지, 은제 박근...."

" 아 글씨 씨끄럽다니께~! 나가~!!!" 이런 판국이 된 것이다.ㅎㅎㅎ


" 자네가 잘못 했네.

사램을 오라고 해놓고 가라니, 그게 될 말이여...?"

묵묵히 앉아있던 어르신의 한마디 하자

집주인 아들이 변호하더란다.

"아버지께서  몇년 전에 쓰러지신 후 감정조절이 잘 안되신다"고 .


어찌되었거나, 그 사건 이후에 기봉아저씨께서 남편에게 급 호감을 보이셨는데

 며칠 후, 길에서 만난 남편에게 기봉이 아저씨가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빵 터지고야 말았다. 

기봉아저씨 왈,

" 쩌어그, 상담 쪼께 할 시간 있간능가?"

였다니!


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는 열무도 속아내고

금방이라도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들깨도 베어 드렸다.

자신은 거두기 귀찮아서 내버려 둘 거란다.

아무나 걷어가라고 했는데도 바빠서인지 미안해선지 아무도 안가져간단다.

"쭉 펼쳐놓은다음 사나흘 후에 걷어다 털어서 지름 짜 묵어.

을매나 나올런지는 몰러두 그래두 꽤 들었을 겨."

귀가 어두워서인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나중에 들기름을 짜서 나누어 드릴 요량으로

들깨를 베어서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기봉아저씨는 낫질을 하는 우리 옆에서 큰 소리로 얘기를 하신다.

" 사램 사는 게 말여, 다 거기서 거긴겨...

직장을 댕기는 사램이나 농사를 짓나... 마찬가지여,

 밥 서끼 먹는겨, 결국은....

돈이 좀 더 많고 적고 그 차인겨...

근디 돈이 느무 많아도 좋은 게 아녀, 이눔 저눔이 뺏을라고 하지, 나라도 뻇어가더라고...

그저 적당히 먹고 살 정도면 되는겨... 안그려??"


청명한 대기 속에 들깨내음이 고소하다.

안하던 농사일을 하려니 힘이 든다.

기봉 어르신이 미안한 얼굴이다.

" ㅎㅎ 대근해서 니얄 못 인나것네...!"


뻐근한 허리를 펴려고 눈을 드니

마른 가을햇살이  깨를 베는 남편의 등 뒤로 찬란히 부서져 내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환희라고 해야할까, 아님 평화라고 해야 할까...(나는 이럴 때 마땅한 표현을 못찾겠다.)

기쁨, 생명..충일..감사

그 모든 언어를 다 응축한 생의 진수를 한 모금 떠 먹은 기분이었다,



20181021_082442.jpg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