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18일
베드로의 울음(9)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제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14:72)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미 앞에서 예고하신 것입니다.(막 14:30)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무게를 지녔습니다. 구약 말씀이 복음서에서 그대로 성취되듯이 예수님의 말씀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독일의 교회당 첨탑에는 닭 모형이 달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늘 십자가만 보던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광경입니다. 닭이 새벽을 깨우는 동물이듯이 교회가 새벽을 깨운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닭이 베드로의 배교 행위를 각성시켰다는 의미일까요?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 중의 하나가 울음입니다. 도살장 앞의 소가 눈물을 흘린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생리적이고 반사적인 작용입니다. 사람은 눈물 없이 울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울음은 단순히 슬픔이라는 감정의 산물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물은 오히려 인격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사람만이 인격적으로 판단하고 반응하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울음이 가능하다고 봐야합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의 울음은 참회를 가리킵니다. 참회는 인격적인 작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격에는 두 가지 성격이 따릅니다. 하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두 인격체 사이의 소통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비열한 것인가를 판단했으며, 예수님과의 참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참회에 감정적인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감정적인 요소는 인격적인 요소를 따라오는 것이지 선행하거나 병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충실할 때 그것을 풍요롭게 하는 감정적인 관계도 충실해지겠지요.
저는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을 대할 때마다
많은 위안을 받습니다.
참 인간다운 연약함의 상징인 것 같아요.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고 따라다녔지만
그는 나름으로 그 분을 알게 되었을 것인데
마지막에는 이런 '부인'이라는 형식으로 배신을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마다
이런 '부인'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반석같은 믿음의 고백 이 후에
이 상황에서 '부인'의 연약한 행위를 한 것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영도하고
가나안 땅 목전에서 '실수'를 한 후에
입성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무덤조차도 아는 이가 없는 상태가 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대의 인간들에게는 우연한 다행인 것 같아요.
모세도 베드로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이 아니라는....
인격적인 관계에 충실하신 분들이 잘 하는 것이 분위기 메이커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어딜가나 인정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타인이 아닌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반응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베드로의 인격적인 결함은 자신 중심적인 생명 보존을 위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겠지요..
어제 블랙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마지막 대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을 가르치는 분들이
이 땅의 스승"이라는 고백이 저를 뭉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늘 처음 리플인데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앞으로 부족한 생각과 신학적 도전을 시도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