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2일
바라바 이야기(3)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15:8)
어제의 묵상에서 폭력의 문제를 짧게 말씀드렸지만, 논지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폭력에 늘 따라다니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를 풀고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개혁이 혁명보다 힘들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혁명을 어딘가 비이성적인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혁명은 기존의 가치와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선거를 통해서도 혁명은 가능합니다. 이런 혁명을 반대할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 누구를 위한 혁명인지, 혁명을 위한 폭력, 또는 강압적인 힘이 용납될만한 수준인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개혁도 혁명은 혁명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종교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것이었으니까요. 종교개혁에는 크게 봐서 두 가지 세력이 충돌했습니다. 한쪽은 비폭력적인 혁명이라면 다른 한쪽은 폭력적인 혁명이었습니다. 전자는 루터가, 후자는 뮌처가 대표입니다.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이 두 사람은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루터는 농민들의 폭력이 결국은 농민들이 원하는 농지개혁도 이끌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폭력은 성서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뮌처는 그것만이 참된 개혁을 위해서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뮌처는 실패했고, 루터는 성공했습니다. 물론 뭔처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나오고 있긴 합니다. 바라바는 뮌처의 입장에 선 인물입니다.
저는 복음서 기자가 민란이라고 묘사한 혁명 투쟁을 평가할만한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단순히 성서와 신학적인 관점으로만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고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전적인 변화라는 점에서 혁명보다 더 극단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인간적인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겠지만, 결국 우리의 모든 노력을 넘어서는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우리가 이 세상을 인간적인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겠지만, 결국 우리의 모든 노력을 넘어서는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 진리임 ^^
구글 들어가보니, 오늘이 간디선생님' 생신이랍니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말씀에 비추어 거꾸로 되새겨 봅니다.
왜 예수님은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는지, 왜 사도들은 힘없이 순교해가야만 했는지,
어떻게 우리는 이 고단한 매일매일 삶속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는지 .. 그것이 가능한지 ...
이유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완전한 자유의 순간이고, 신이 내려주신 최상의 조건이며, 일상이 바로 신의 둥지'여서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폭력, 비폭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유혈혁명이든, 무혈혁명이든 ....
즐거운 한가위 되세욤 ^^*
국정 공휴일로서 델리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은 날입니다.
간디 자얀띠라고 하지요.
간디의 정신을 '간디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도는 서서히 그것을 우상화시켜 나갑니다.
인도무력화 실태를 보여주는 글 한편 링크합니다.
혁명! 그것은 결국 인위적인 방법이지요...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을 통해서 일어나긴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겨봅니다.
정목사님, 환하고 둥그런 보름달처럼, 기쁘고 넉넉한 추석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