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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청하는 것은 기도의 분위기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예식이나 장치 혹은 연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본보기를 통해서, 기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우리 주변에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만들어야 한다. 랍비가 예배 출석률에 관심을 갖지 않고 대신 기도에 관심을 가질 때 그 상황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나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랍비가 유대인들의 3천 년 동안의 경험에 응답할 준비를 갖추고 참석하는 예배와 그 달에 나오는 신간서적이나 그날의 뉴스를 읽고 참석하는 예배 사이의 차이는 엄청나다. (173쪽)
기도의 분위기를 만들라는 헤셸의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여러 형태의 기도 이벤트를 만들라는 말이 아니다. 기도하라는 잔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의 책임자가 사람들을 모우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신앙의 본질에 천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만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신앙의 본질은 지난 역사에 담겨 있다. 그게 성서이며, 기도문이고, 신조이다. 오늘의 목사, 설교자들도 이런 대목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오늘의 얄팍한 처세술이나 심리학보다는 기독교 고전을 읽는 게 좋다. 기독교 신앙을 실용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리지 말고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영적인 차원이 무슨 뜻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헤셸의 말을 빌리면 ‘3천 년 동안의 경험에 응답할 준비를 갖추고 참석하는 예배’가 그것이다.
"3천 년 동안의 경험에 응답" 참 좋은 표현이네요.
기독교도 오랜 세월의 경험이 축적된 것이고,
우리의 기도와 예배가 다 기독교 역사와 연결된 거란 말씀이죠?
2천 년 기독교 역사에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과의
'교통'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그 차원에 들어가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기도하고 예배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