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K1 | https://youtu.be/ZkUcnTxYWl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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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를 시작했습니다.
4월15일 저녁 7시30분에
대구샘터교회 예배 처소인 '공간울림'에서 모였습니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18명이나 모였습니다.
42장까지 가려면 인내심이 좀 필요합니다.
첫 강의를 녹음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제가 깜빡하고 엠피쓰리 녹음기를 빠뜨렸습니다.
급하게 집사람의 스마트폰으로 녹음했습니다.
그 파일을 컴퓨터로 옮겨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연결 짹이 없어서
며칠 후에 집사람이 구입해 왔지만 그것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의 도움을 받아서 이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파일은 두 개를 하나로 결합한 것이라서
중간에 약간 잡음이 들어갔을지 모릅니다.
욥기 공부(1), 2015년 4월15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1장
욥기는 신구약을 통틀어서 문학적인 성격이 가장 강한 성경이다. 말하자면 욥기는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에 의해서 꾸며진 것이다. 근동의 여러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다. 이교적인 분위기도 없지 않다. 예컨대 천상회의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욥을 두고 협상을 벌이는 장면이 그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구약성서기자들은 주변 여러 나라의 종교, 철학, 문학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말이 된다.
욥기는 욥이라는 인물의 운명을 통해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밝혀보려는 고대 이스라엘의 문헌이다. 욥에 얽힌 서사는 간단하다. 아들 일곱에 딸 셋을 둔 다복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재산도 넉넉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을 잃는다. 재산과 자식을 잃고(1장에서는 4번에 걸쳐 일어남), 악성 피부병(이 사건은 2장에 나온다.)에 걸린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징벌을 받았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앙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아들 일곱에 딸 셋을 얻었고 재산도 갑절이나 얻게 되어 장수를 누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욥기 전체가 42장인데 이런 서사를 다루는 대목은 1,2,42장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신학적 논쟁이다. 이 논쟁은 주로 그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그리고 소발과 벌인 것(3-27장)이다.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알려진 엘리후의 논박도(32-37장) 나온다. 이들의 논쟁이 끝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이 뒤를 잇는다(38-41장).
이 신학 논쟁의 주제는 ‘무고한 이들의 고난’에 대한 것이다. 과연 무고한 이들이 고난을 당할 수 있느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등등의 논쟁이 이어진다. 여기서 세 가지 입장이 개진된다.
1) 세 명의 친구들: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을 대표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정의에 근거해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신다. 벌은 죄의 결과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욥은 분명히 죄를 지었다. 그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복을 내리실 것이다.
2) 엘리후: 그의 입장은 고난의 이유가 사람을 연단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신약에도 이런 입장들이 종종 나온다. 엘리후의 이런 입장에 따르면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욥은 큰 잘못을 행한 것이다.
3) 욥: 그는 저주의 운명에 떨어진 장본인이다. 고난의 이유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고난을 죄의 결과로 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고난의 이유를 모른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들일 뿐이다.
이들의 논란이 결론 없이 끝난 뒤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을 보인다. 1) 세상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고난의 의미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2) 세 부류의 사람 중에서 욥의 태도가 최선이다.
음, 죄송할 거 없습니다.
지금 신학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과연 하신가, 하는 주제로
괜찮은 신학 아티클을 쓸 수 있겠지요.
아마 그런 글을 쓴 사람들이
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겁니다.
우리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을 보면
하나님을 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요한일서의 주장도 마찬가지겠지요.
심판의 하나님을 무조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주장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장은 옳습니다.
왜 옳은지에 대한 근거를 찾는 게 신학이고,
더 나가서 설교가 되겠지요.
여러가지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데,
그중에 핵심은 기독론적인 근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와 운명이 선하다면
하나님도 선하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이 사랑이라면
하나님도 사랑이지요.
어쨌든지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선악개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흔히 목사님들께서 많이 하는 설교 말씀 중에
유대인들의 광야 40년 등등을 연단의 시간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 욥의 견해에서 볼 때 좀 받아들이기 힘든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지요?
목사님, 욥기를 배우기전 고난을 대하는 저의 생각은
세친구와 엘리후의 의견과 같이
죄에 대한 징벌과 하나님의 연단으로 여겼어요.
고난을 받는것만 해도 힘든데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나 되짚어야 하는것이
더 힘든일이지요.
신기하게도 그 오랜 옛날 사람들의 사고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는 사실이 무섭고도 놀랍습니다.
다행하게도 이제는 어떤 고난이라도
고난의 이유는 몰라도
거대한 자연과 우주와 나타난것과 보이지 않는것을
창조하시고 완성하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됨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란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것은 운명론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운명론, 예정론, 섭리론 등등은
비슷하기도 하고 구별되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더 큰 힘이 자기의 삶을 끌어간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운명론은 삶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 한다면
예정론(섭리론)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 할 수 있어요.
재난을 당할 때 운명론은 '어쩔 수 없지.'라고 여기지만
예정론은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야.'라고 합니다.
욥 이야기는 이런 관점들을 뛰어넘는 시각입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운명론도 아니고, 예정론도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입니다.
목사님...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과연 선하신건가요? 아니면 선하셔야만 하는 것인가요?
하지만 선하다는 기준 또한 각각의 인간들이 만들어 낸 모호한 기준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선하시다' 명제 또한 우리의 기준에 하나님을 담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이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 목사님... 제가 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그런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첫 걸음을 떼는 것도 만만치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