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하신지요? 질문이 있습니다.
ㄱ.
지난 번 <신학 공부> 강의 때에, 어떠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들이는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이 배타적인 권능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생명을 완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사실을 믿습니다.
ㄴ.
그런데 예수님은 다가온 하나님의 통치로 초대하셨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며 사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 설교에서 목사님께서는 "지금 죽어 있으면 부활 생명도 없다."라고 말씀하셨고, “지금 우리에게 생명이 있어야만 죽음 이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비슷한 취지에서 판넨베르크도 『사도신경 해설』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증했다... 즉 인간의 구원과 멸망은 하나님의 미래에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따라서 예수에게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156쪽)”이라고 썼습니다.
이 두 사실(조건 없는 구원, 현재의 삶이 전제된 구원)의 긴장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며 살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떻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어제의 설교 <몸의 부활>로 인하여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떠돌던, 그러나 알고 싶은 갈망이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주장하는 생명에 길들여진 만성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을 경험하도록 좋은 스승이 되어 주시니 늘 고맙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답변을 읽고 나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명쾌한 명제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관계된 것에 대하여 정합적으로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다. 판넨베르크의 지적처럼 불가시적 현실성에 대한 가식적인 표식에 기초한 잠정적인 판단 없이는 신뢰가 가능하지는 않지만(『사도신경 해설』 1장), 신앙의 대상에 대하여 완전하게 안다고 할 수 없으며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약 신앙의 대상이 논리적으로 명증하게 논증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결코 하나님일 수는 없다. 신앙은 잠정적인 판단을 통하여 진리의 일면을 경험하면서 아직은 명쾌하지 않고 흐릿한 부분까지 신뢰하는 것일 테다. 바울도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흐릿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신앙에 진정성이 있다는 증거에요.
짚은 대로 두 가지 명제는 모순됩니다.
그런 모순이 기독교 교리에 많이 있어요.
하나님이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명제와
세상에 악이 실재한다는 명제는 모순됩니다.
요즘 내가 수요일에 공부를 시작한 욥기의 주제도 역시
그런 모순에 기초하고 있어요.
그런 모순을 억지로 해결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가능한 데까지 설명을 해야겠지만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큰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일종의 비밀인데,
아마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겠지요.
소극적으로 그 모순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고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