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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 선생님께서 담낭암으로 투병하시다 소천하셨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지만 한국문단사에서 특기할 만한 두 가지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은 자전적 소설들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 대한 구술증언에 가까운 사실적 보고들을 남기셨습니다. 데뷔작 <나목>이 화가 이중섭과의 개인적 인연을 소재로 쓰여진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많던 싱아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은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두 편 연작은 6.25을 배경으로 한 작가 개인의 가족사이지만 전쟁의 상흔을 살다간 인간군상들에 대한 빼어난 문학적 복원이기도 합니다. 민족내부의 전쟁은 씻을 수 없는 비극이지만 예술적 형상화를 위해서는 흔치않은 원재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는 레드컴플랙스로 인해 한국전쟁을 다룬 주목할 만한 문학작품은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오히려 사회과학자 리영희 선생님이 당신의 자서전 <역정>에서 "전장과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쓰셨던 6.25 체험담이 귀중한 한국전쟁 르포르타주로 간주되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현대사에 대해 박완서 작품이 갖는 기록적, 문학적 가치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재음미될 것입니다.

 

더불어 박완서 문학은 비평계에서도 중요한 쟁점을 제공했습니다. 소위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90년대의 논쟁이었는데요. 남성 비평가들이 박완서 작품의 문체가 수다에 가까운 구어체임을 지적하며 그 문학적 완성도를 문제 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혜정(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의 여성 비평가들은 박완서식 글쓰기의 대중친화성과 담론적 깊이를 옹호하면서 근본적으로 남성중심적인 비평계를 질타했습니다. 굳이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제가 기억하는 바 많은 여성지식인들이 박완서 문체의 중독성을 찬미하면서 박완서 작품의 팬임을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소녀 박완서가 엄마에게 느꼈던 양가감정에 대한 심리묘사는 세대를 초월한 여성 보편의 심리를 포착하면서도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특유의 감칠맛을 자아냅니다. 바로 이 글맛에 저도 박완서 소설의 팬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남성들은 종종 자기최면에 걸려 역사에 패악질을 일삼고 도주합니다. 여성들은 그 상처난 역사 앞에 멈춰 서서 그것을 살만한 것으로 끌어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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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아빠

January 23, 201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심스럽지만 체호프님의 글이 고인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담고 있기에, 짧게 적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데, 고 박경리 선생님과 고 박완서 선생님이, 한겨레를 폄훼하고 조중동을 옹호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국민의 정부 때였던 것 같은데, 종중동에 대한 비판이 높아질 무렵, 두 분이 어느 대담에 나와 한겨레와 조중동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조중동이 나쁘기만 하냐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매우 놀랐고, 두 분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가득찬 『토지』를 쓰신 분이, 한겨레와 조중동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하시다니...

 

혹시 이 짧은 글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만 고인에 대한 평가가 일방적이어서는 안되기에 적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분, 다시 돌아가십니다. 편히 쉬옵소서.     -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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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January 23, 2011

네,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작가 이문열이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홍위병으로 매도한 적이 있고, 이 때문에 미학자 진중권 등을 중심으로 이문열 작품 소각식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이 사태를 두고 작가 박완서는 "작가는 모욕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취지의 칼럼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저를 포함해서 많은 진보적 작가들, 비평가들이 박완서 선생님에 대해 실망하고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박완서 선생님은 6.25 당시 인민군 통치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삶에 체화되지 않은 진보적 이념에 대해 예전부터 불안해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작품 화형식 등의 상황에 대해 분서갱유를 보는 것 같은 섬찟함을 느끼셨겠지요. 6.25세대의 컴플렉스라고 할 수도 있고 군중심리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토지>는 박경리 선생님이 쓰셨는데 그 분께서도 당시 상황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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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아빠

January 23, 2011

제가 읽은 것은, 고 박경리 선생님과 고 박완서 선생님의 대담이었습니다. 다른 참석자도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 대담 가운데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이 아직도 기억닙니다.

 

이문열씨에 대해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기억나네요. 고 박완서 선생님의 칼럼을 읽어야 정확히 알겠지만, 표현의 자유와 작가에 대한 원론적 내용이라면, '작가는 모욕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이문열의 작품과 그 정신에 동의한다는 게 아닙니다.

 

역사관, 세계관, 정치적 성향을 떠나 지식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갖는다는데 동의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역사관과 세계관, 정치적 성향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비평과 비판, 반론, 재반론과 그것을 통한 변화의 터가 있는 것이겠지요.

 

고 박경리 선생님과 고 박완서 선생님의 대담을 읽고 충격받은 것은, 특히 박경리 선생님의 경우, 『토지』를 통해 보여줬던 작가의 내적 세계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엇박자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변혁 과정에서 고난을 겪는 민초들과 그래도 잃지않고 보여지는 역사에 대한 건강함을 갖고 계신 분이, 한겨레와 조중동이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이시는데 놀랐것입니다. 고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도, 구체적인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두 선생님이 개혁적인지,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 그 분들의 정치적 좌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건강한 의식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고 생각했으니, 개인적으론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두 분에 대한 제 생각이 상당히 바뀌었습니다.     -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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