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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학당이 문을 연 것이 작년 9월이니 이달로 6개월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한 학기를 다해가는 것이지요.
수요학당 교장겸 이사장님이신 에레마님께서 수요학당에서 공부한 것으로 게시판에 한 건 좀 올려보자 하셨는데,
감히 신학공부라 칭할만한 그럴듯한 글을 올릴 자신이 없습니다.
음.... 솔직히 말해서, 뭐 그리 신통하겠습니까?
라이센스도 없는 사람들끼리 책 하나 정해놓고 같이 읽어보고 고민해보고 하는 것이 다입니다.
신통치는 않겠지만 스스로도 정말 기특하기는 합니다.
교통시간까지 매 주 수요일 3-4시간을 투자하니까요. 물론 주중에는 개인적으로 해당분량 읽어오고요.
무자격자들끼리 공부했으면서 어울리지 않게 신학적인 문장 흉내내기는 삼가하기로 하고
기름기쭈악 빼고 다른 사람말고 제 얘기 위주로 수요학당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5개월치라 좀 길겠네요.
제가 배워왔던 신앙의 배경이 그동안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었지만
그 배경의 명칭을 이른바 '근본주의'라 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겨우 2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근본주의건 정통이건 이단이건 간에 여하튼!
지금까지 나의 많은 부분을 만들어오고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내가 인생을 다 걸고 있는 듯한,
아니 내 존재를 제대로 걸든지 시간낭비 말고 접든지 해야할,
이 '기독교'란 과연 어떤 성장과정을 지내온 것인지,
어떤 우여곡절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을 가져온 것인지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음... TV에 보면 입양아들이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내 나라는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 한국을 찾아온 마음과 비슷할 겁니다.
담임목사님께서 그런 길을 천천히 갈 수 있게끔 인도하고 계시지만,
수요학당에서 선택한 책 '20세기 신학'은 21세기를 사는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래과 같은 머릿글로써 충분히 빠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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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라는 과도기적 세기에 나타난 각종 신학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빛을 비춰 줄 해석학적 도구로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이중적 진리가 만들어 내는 창조적 긴장'을 해석의 열쇠로 삼아
20세기의 신학사(史)를 쓰려 했던 저작 동기의 적확성이라든지 저술된 결과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성취도를 볼 때
이 작품은 성공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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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 주에 사상 한가지 또는 신학자 한 사람에 대해 대략 20~26 페이지 분량을 같이 읽어왔는데,
계몽주의,
칸트, 헤겔, 슐라이어마흐, 리츨,
칼 바르트, 에밀 부르너, 루돌프 불트만, 라인홀드 니버,
폴 틸리히, 과정신학(떼이야르, 화이트헤드, 존캅),
본회퍼, 세속신학,
몰트만, 판넨베르크,
흑인해방신학(제임스 콘), 라틴아메리카해방신학(구스타보 구티에레즈, 미구에즈 보니노)
까지 읽었습니다.
아직도
여성신학, 칼라너, 한스 큉, 설화신학, 칼 헨리, 버나드 램
이 남았습니다.
정말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고, 속이 답답할 때가 많았지만, 용케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려워서 넘어가기 힘들 때, 이렇게 서로 위로했죠.
'우리,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자고! 칸트만 가지고도 평생공부하는데, 몇장 읽어서 어떻게 다 알겠어?
우리는 일단 정한 텍스트를 꾸준히 읽어보고 힘 닿는데까지만 이해해보는 것으로 의를 두자고...'
그렇게 시작했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점점 더 이해가 되어가더군요.
신학자들이 말하는 방식에 사고하는 방식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이었을까요?
신기한 것은 개인적으로 읽을 때는 안풀리던 것들이
수요학당에서 같이 읽고 생각을 나누는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며 정리가 되곤했습니다.
뭐 텍스트 내용 완전 마스터했다는게 아니라 혼자하면 포기했을 것들이
같이 하는 가운데에 이해도도 높아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되더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끼리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여기서 얘기한 거 가지고 딴데가서 아는 척 하면 안된다. 야매는 금방 들통난다. 아는 듯이 폼만 잡자.'
20세기의 신학자와 신학에 관한 내용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 사람들의 신학들이 정말 다 그럴듯하더군요.
그런 하나하나의 신학이 나오게 된 데에는 치열한 고민과 깊은 사유, 감히 따라갈수 없는 놀라운 영성, 고통스런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영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는 게 없습니다. 그냥 펜 굴리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제가 너무 뻔한 당연한, 그래서 누구나 아는 얘기를 하나요?
그런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과 과정을 보면 너무나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만이 정답 같아요.
그러나 바로 정답같은 각각의 신학들은 또한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처음에 바로 A라는 신학의 배경에서 신앙을 가졌으면 그것에 푹 빠져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했을 것 같아요.
물론 B라는 신학의 배경에서 신앙을 가졌으면 또한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많고요.
저는 이미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근본주의 배경의 신앙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꽤나 오래 걸린 경험 말입니다.
정통(다비아에서 이 말 쓰면 알러지 있는 분들 많죠?)의 흐름을 먼저 아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우리 수요학당 멤버들은 다 동의할거예요.
지류에 먼저 마음이 가서 그것의 설득력 있는 배경과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그것이 가장 그럴듯해보일겁니다.
수요학당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관점에서 20세기 신학의 흐름 가운데 주요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하며 보아왔습니다.
그러던중 불안한 마음이 들었었죠.
이렇게 따라가다보니, 판넨베르크가 영 별로라는 생각이 들면 어쩌나,
제일 낫다고까지는 못해도 영 별로이면 골치아픈데....
이런 생각이요.
우리팀이 담임목사님한테 쇄뇌를 당해서인지,
책 저자가 판넨베르크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아서인지,
지금까지 읽어온 중에 판넨베르크 읽고 의견 나눌 때에가 가장 기분 좋고 개운했습니다. 이건 정말 천만 다행이에요.
아... 쓰다보니 정말 너무 길어졌어요.
졸립기도 하고요.
이사장님께서 '해방신학'에 대해서 그럴듯 하게 쓰라고 했는데 딴 소리만 길게 썼네요.
해방신학 아는 척 했다가 된서리 맞을까봐 두렵기도 하지만, 다음 기회에 텍스트에 충실해서 요약해보겠습니다.
그 동안 수요학당 어찌 돌아가는지 아무 얘기도 없다가 5개월만에 몰아서 주저리 주저리 썼지만,
대충 짐작들이 가시지요?
그렇게 알고 저는 그만 자야겠습니다.
우디님, 반갑습니다.^^
수요학당, 이름부터 서당 비슷하게 학당으로, 혹시 봉숭아학당을 흉내내신 건 아니지요?ㅋㅋㅋ(농담)
대구에서도 리다수(차를 마시며 세상의 이치에 대해 대화한다)라고 공부모임을 시작했어요.
우디님이 쓰신 그런 방식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뭔가 야매로 공부하는 느낌이지만, 야매끼리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알아가는 거라고 할까요?
그나저나 야매는 뭔말인가요? 아마추어의 일본식 발음인강???
하튼, 3-4시간씩 시간을 내셔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 정말 좋습니다.
앞으로도 쭈욱 열공하세요.
대구에서도 열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