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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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정진홍/이화여대 석좌교수
1. 혼란/ 편하지 않은 삶
삶이 편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조용하질 않습니다. 요동
이 멈추지 않고 소용돌이도 가라앉지를 않습니다. 세상이, 몸이, 마음이 그러합니다. 내가,
우리가, 그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생각해보면 실은 그랬던 것 같은데 내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무어라 묘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혼란'이라는 표현이
그래도 가장 어울릴 것 같습니다. 어지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뒤숭숭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좋지 않습니다. 삶은 모름지기 편해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나도 우리도
그들고 어제도 내일도 여기도 저기도 불편해서냐 그게 사람살이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쪼록 이 혼란이 오래 이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이 어려움을 잘 견뎌 그 혼란에 빠져
삶을 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서둘러 잘 다듬어진 세상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기야 인류의 긴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겪는 이러한 혼란을 우리만 겪고 있을 까닭이 없습
니다. 지금 여기의 우리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잇을 것이고 그러한
시대나 문화나 국가나 사회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읽어보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사례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과 견주어 오늘을 판단하고 상대적인 안도를 한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인 관념의 유희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는 혼란은 지극히 직접적
이고 실제적으로 우리가, 또는 내가 겪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하든 덜하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는 혼란의 경험주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임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무리 우리 자신이 그 혼란스러움 안에 있다할지라도 그 혼란을 '바라
볼 수 있는' 거리(距離)를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우리가
겪는 혼란의 실체를 할 수 있는 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이런 혼란이 비롯했는지 그 까
닭도 살피고, 그 혼란이 초래하는 결과도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혼란에 대한 진단이 필요
한 것입니다. 그 진단이 없으면 치유의 방도를 마련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2, 낯선 것의 등장/ 준거의 소실/ 구조의 해체
혼란을 초래하는 우선하는 것은 '낯선 것과의 만남' 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익숙한 것에 머물
러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영역은 이전과 비해 한 없이 넓어졌습니다. 이를테면 낯선
얼굴을 한 사람들, 낯선 언어, 낯선 음식, 낯선 역사, 낯선 의미, 낯선 종교들과 부닥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상화되면서 세상은 역설적으로 무척 좁아졌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 넓은 세계를 한꺼번에 겪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월이 무척 빠르게 흐르면서
온갖 것을 바꿔놓습니다. 그야말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태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변화를 좇은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지 못하면 곧 뒤진 현실에 머물 수밖
에 없는데 그러한 삶은 딱하게 됩니다. 오늘이 낯이 설어 스스로 움츠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낯선 것과의 만남이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것과의 만남입니다. 인식의
한계와 부닥치는 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안
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초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당연히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 아는 것이 힘이어서 그러한 힘을 가지고 세상을 버텨나가는
것이 일상적인 삶인데 그 힘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정황은 암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기존의 삶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갈등이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서적인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허탈해지고 때로는 분노가 일기
도 합니다. 인식의 한계, 그리고 정서적 불안은 불가피하게 혼랄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가르지 않습니다. 당연히 삶 전체가 그렇게 어지러워집니다.
이와 더불어 일어나는 현상이기는 합니다만 달리 또 하나의 혼란의 까닭을 살펴볼 수 있
습니다. 낯선 것과의 만남은 이제까지으 삶을 지탱하던 판단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르다고 판단한 것인데 낯선 문화 안에서는 그것이 옳은 것일 수 있습니다.그리고
그 역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른바 '준거의 소실' 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태를 겪게 됩니
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만 어려워지지 않습니다. 사물을 분류하는 기준도 모호해집니
다. 제각기 경험한 바가 다르고 그것이 기억되고 전승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고 해서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을 그대로 묵인할 수도 없습니다. 당장 갈등이
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을 해소할 힘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어떤 권위가 있어 그 갈등을 해소
해주어야 하는 것인데 누구나 자기 자리의 다름과 상관없이 인정할 그러한 권위가 없기 때
문입니다. 따라서 다름을 다듬을 힘이 사라져 버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혼란은 바로 이
러한 사태를 일컫습니다. 준거의 소실로 인한 권위의 붕괴가 곧 혼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삶은 정태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어디론지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삶이 제 모습을 지니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지향점을 제시해줄 절대
적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이르면 자연히 삶의 얼개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삶은 개체의 실존으로만 이루
어지지 않습니다. 무수한 개체들이 이루는 일정한 구조를 가집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이 결국 삶의 얼개입니다. 그러나 준거의 소실로 인한 권위의 붕괴와 방향의 상실은
그 얼개를 뜯어 더 이상 어떤 틀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존재
자체가 깃들 곳이 없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구조의 해체' 가 우리가
겪는 혼란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태 안에서는 각 개개인들이 제각기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기적인
관계가 개인 상호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삶이 삶일 수 없게 되는데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얼개 안에 머물지 않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애써 만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만나도 실은 그것이
만남이 아닙니다. 만나고 있다고 스스로 확인하는데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단절된 관계를 짐
짓 그렇기 않은 것으로 여기는 기만적인 관계임이 곧 드러납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고, 외로운데도 힘께 있어 든든하다고 의도적으로 스스로 자기를 확신시킵니다.
개인 간의 관계만 이렇기 않습니다. 공동체도, 국가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문화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과거나 미래와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단절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끊어져 있지 않다고 여기는데도 이어진 마디나 그 이어진 것들이 짓는 커다란 얼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절된 상황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단절도 연계
도 확인하기 힘든 삶의 현실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혼란은 이렇게
삶 속에 스며듭니다. 구조의 해체가 낳는 개인의 끝없는 유랑(流浪), 그리고 갖은 모습의 공
동체나 공동체 구조들의 상호 유리(遊離)가 삶을 혼란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3, 무기력/ 자기 절대화/ 유목적 규범과 환각적 실천
그렇다면 그러한 혼란의 결과가 어떻게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지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되풀이 한다면 낯선 것과의 만남에서 비롯하는 인식의 한계와 정서의 불안,
준거의 소실로 말미암은 권위의 붕괴와 방향의 상실, 그리고 구조의 해체가 초래하는 개인
의 유랑과 공동체의 상호유리가 혼란을 낳는 원인이라면 거기에서 귀결되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도 아울러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혼란을 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일 것
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정보의 넘침과 판단의 불능으로 인한 무기력'입니
다. 넘침이란 이미 다룰 수 엇을 정도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의 앎이 그러합
니다. 당연하게 낯섦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지의 고백일 것 같은데도, 또 그것이 사
실인데도, 현실적으로는 그 낯섦 자체가 그대로 파편적인 지식이 됩니다. 그래서 쏟아져 나
오는 앎의 덤이 속에 치이게 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혼란은 그저 단순한 복잡함이
아닙니다. 다름어지지 않은 무지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걸러지지 않은 앎의 소용돌이 안에
머무는 삶의 모습에 대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앎이 잘 다름어지지 않으면 그 앎은 철저하게 삶을 무기력하게 합니다. 선택지가
많을 때 당혹스러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럿이 총체적인 수렴을 통하여 하
나를 구축하거나 아니면 어느 하나를 선택해고 다른 것은, 비록 그것이 상당한 타당성과 의
미를 지닌 것이라고 해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갈등
은 끊임없이 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국적으로 어떤 것도 긍정적으로 승
인하거나 추진할 수 없는 속수무책인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삶은 의외로 강인합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의식이나 정서의 바탕이 된다할지라
도 그 혼란에 치여 자지러질 수 없는 것이 삶입니다. 준거의 소실로 제멋대로 모두 흩어지
는 것이 실상인 것 같아도 바로 그러한 방임을 거스르는 삶에의 동기가 역풍처럼 불기도 합
니다. 어떤 형태로든 동질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경주되고, 피해의식에서 말미암은 것이
수도 있지만, 동유의식을 확보하는 다양한 계기들이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체계적
인 종합을 이루지는 못한다하더라도 생존을 위한 은집을 서로 모색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혼란은 역설적인 구조를 낳습니다. 확장되면서 흩어지는 무력한 개체들의 망이 펼쳐지는 저
간에서 새삼 응집을 의도하는 거센 개체의 지향성들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출현합니다. 방임과 응집의 역설적 구조가 자신의 삶이
직면한 현실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의식하는 주체는 그러한 자의식을 통해 새로운 자기 정체
성을 구축합니다. 서둘러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자기 격률에 따라
이룩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뜻밖에 그러한 태도는 자기를 절대화하는 것으
로 나타납니다. 스스로 권위적이게 되고 타자에 대한 배타와 독선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문화도 역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는 자의식을 가지는 순간, 철저하게 자기 방어적이게됩니다. 그것이 이른바 '공격
의 생리학'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려 합니다. 혼란을 극복하는 길은
그 일 뿐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근본주의의 범람은 삶의 자리가 극도로 혼란스럽다는
것을 반증하는 가장 구체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온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혼란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것 자체가 혼란의 치유이거나 혼란을 질서로 옮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스스로 여
길 뿐입니다. 그것은 실은 환각적인 인식이고, 환각적인 판단이고, 다시 그것은 환가적인 실
천에 이릅니다. 자신의 삶이 온통 환각이나 환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지 못
하는 상황이 실은 혼란한 삶을 사는 가장 전형적인 '혼란스러운 모습' 입니다.
이러한 강인함을 지니지 못한 삶도 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혼란을 스스로 혼란의 흐름에
맡겨 견디려합니다. 이러한 삶에는 배타나 독선이 없습니다. 권위주의나 근본주의적인 절대
성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예 자의식이라는 것을 스스로 지우려고 합니다. 타자에 대한 의
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자를 의식하는 것은 자기 삶을 일탈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칫 그
것은 타자에 대한 간섭일 수 있는데 그것은 삶의 모습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누구
나 삶은 자기가 영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은
혼란자체를 혼란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혼란이란 삶의 장(場)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서 말미암은 잘못된 언표하고 판단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기의 실
패를 그렇게 기술하는 잘못된 의식의 표출이 낳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혼란의 늪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을 의외로 자주 그리고 많이 만납니다. 이를테면 유목적
(遊牧的)인 삶이 그러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이해하는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질서개념이
없습니다. 혼란은 그것이 그대로 그들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유목적인 규범을 짓습니다. 지
금 여기에서 내가 바라고 필요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이 삶을 위한 모든 것일
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이 빚는 이른바 유목적인 문화는 현실적으로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을 의도하거나 타자를 지우려하지도 않습니다. 필요가 만남을 초래하면
만나고, 더 아무런 필요도 없다면 만남을 잊거나 의도하지 않으면 됩니다.
혼란이 빚는 결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정보의 넘침과 판단의 불능으로
인한 무기력, 방임과 응집의 역설적 구조 안에서의 근본주의적 태도와 그러 인한 환각저 인
식과 판단과 실천, 그것이 귀격하는 자기기만적 삶의 일상화, 그리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예 혼란을 혼란으로 여기기보다 그것을 삶의 본연으로 살려는 유목적인 문화가 다름 아닌
혼란이 범람하는 자리에서 등장하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4, 종교, 그 착각의 실상
문제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물음은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음은 분명하게 전제하는 것이 있습니다. '혼란의 시대'와 '종교'의 대칭적인 구
조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이 물음은 혼란의 시대와 종
교를 별개의 실재로 여기도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종교가 무엇지 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절박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 혼란과 무관한, 아니면 더 적극
적으로 말하면,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고 그 주체인데 그것이 무슨 까
닭인지 잘 되지 않아 안타까운 아쉬움을 가득 담고 있는 그러한 물음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녀온 기억과 인식에 의하면 이는 종교에 대한 마땅한 기대입니다.
우리가 지닌 준거에 의하면 종교는 세상에 대한 엄연함 심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
로 종교의 권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룩함'으로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거룩함은 닿을
수 없는 어떤 신비, 그러나 그것에 닿지 않으면 삶이 무의미해지는 그러한 신비입니다. 종
교는 그 신비의 추체 또는 대행자라는 인식을 누립니다. 아득한 때부터 그래왔습니다. 그러
므로 종교는 거룩하지 않은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고 이끌 책무를 지닙니다. 세상은 그 가르
침을 좇아 자신의 완성을 기해야 합니다. 종교의 지엄함은 이러한 거룩한 절대적인 준거와
그것을 드러내는 마찬가지로 거룩한 권위에 의해 그러한 자신을 지탱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 세상의 삶의 틀을 지탱하는 유일한 실체입니다. 거룩한 실재에 기반
을 둔 존재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얼개 안에서 비로소 개인은
그 실존의 의미를 찾습니다. 공동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삶의 연대(連帶)는 인간과 자연과
역사와 기억까지 아루르는 불변하는 구조인데 그것을 유지하고 지속하게 하는 것도 종교에
서만 가능합니다. 우주적인 의미에서의 창조라는 개념이 이를 설명합니다. 실천적인 자리에
서는 사랑이나 자비를 통해 종교는 이 연대를 책임집니다. 그러한 것을 위한 규범과 가르침
도 종교는 마련합니다. 이를 통해 삶은 정연한 의미와 가치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거룩한 질서에서 벗어나거나 그에 적응하지 못하여 깨지고 갈라진 삶은 이 모든 가르침과
규범의 '진리' 안에서 치유됩니다. 종교는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이 종교라고 익혀왔
습니다.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익숙한 종교의 모습이고 이에 대한 서술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범람하는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익사하지 않
도록 하기 위해 마련한 구명선(救命線)이나 구조대(救助袋)와 같습니다. 종교가 그러한 기능
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앎이 종내 도달할 궁극적인 앎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앎은 절대자로부터 비롯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절대자에 대한 인식이 앎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이무리 앎이 넘쳐도 그것이 솟은 원천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면 어떤 혼란도 일 까닭이 없습니다. 종교는 그러한 자리에 있습니다. 당연히 판단도 흐릴
까닭이 없습니다. 궁긍적인 앎인 진리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종교자체가 이미
진리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삶은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생동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참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은 스스로 절대적입니다. 자신의 인식도 판
단도 실천도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표류하는 삶에 대한 연민
을 품습니다. 환각적인 안개 속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지닙니다. 사랑
해야 하고 자비를 베풀 대상들이 확연합니다. 종교적인 삶의 주체들은 이러한 자의식을 갖
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밖의 사람들'이 지니는 '알 수없는' 반역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종교는 경고와 질책과 때로는 저주조차 발언합니다. 스스로 절재적이고 궁극적이고,
그래서 거룩한 자리에 있는, 또는 스스로 이미 거룩함인 종교는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나 자의식은 때로 나르시시즘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종교는 비록 '저기'와 '그 때'와
'하늘'을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 바라봄과 희구를 경험하고 드러내는 곳은 '여기'이고 '지금'
이며 '이 땅'입니다. 초월과 신성과 신비를 경험하고 그것을 스스로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그
경험 때문에 내가 초월과 신성과 신비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또한 그런 것과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하늘'을 그리거나 기리거나 바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느
자리는 여기 '이 땅'입니다. 종교는 철저하게 '땅의 현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을 바랄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하늘을 바란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하는 사실은 종교가 결코 '밖의 현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종교는 '저기'에 있는
'그 때'부터 비롯한 아득한 '하늘'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우리 삶의
혼란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 이야기에서 종교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종교도 우리가 겪는
혼란의 한복판에 있는 '현상'입니다. 당연히 혼란의 이유에서도, 그 결과에서도 종교는 벗
어나 있지 않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종교라고 하는 것을 드러낼
경험주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기 지금 이 땅의 그 격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
는 존재입니다. 종교도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혼란스럽게 혼란을 겪는 혼란경험의 주체입
니다.
종교도 낯선 것과 부닥치면서 스스로 이제까지 지녔던 인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
을 저리게 실감합니다. 그에서 비롯하는 정서적 불안을 감추지 못합니다. 기존의 판단준거
가 아무리 궁극적이나 절대성의 이름으로 여전히 유지된다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
이고 부적합한 것인지도 모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위가 이전과 비해 상대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는 초라함오 간과하지 못합니다. 종교 스스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모르는 정황
에서 모두가 지향해야 할 길을 밝혀야 한다는 의무는 점점 더 부담스럽다는 것도 매일 종교
글 긴장하게 하는 현실입니다. 이제는 애써 노력해보지만 제도적 권위에 의한 공동체의 규
범을 유지한다는 것이 심각하게 회의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결코 부정하거나 간과하
거나 짐짓 외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종교의 현실이 이를 분명
한 사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실이 자기의
모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종교는 자신이 단연코 혼란에서 예외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
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간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 흐름에 들 수 없는 예외자입니다. 역사 속
에서 늘 그렇게 해왔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설명할 수 없는 신비라고도 발언합
니다. 이를 위한 봉헌은 삶의 지고한 목표이고 보람이고 의미라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잘못
되어가는 세상인데. 다행하게도 종교는 이를 건질 기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증언합니
다.종교는 '여기 안의 저기'이고,'지금 안의 그 때'이며, '이 땅 안의 하늘'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기 때문에 혼란 안에 있는 혼란 아닌 실채, 곧 '카오스 안에 있는 코스
모스'라고 자신을 확인합니다. 자신에게서 이 혼랑은 벗어날 '구원의 빛'이 비치게 될 것
은 자명한 일입니다. 종교은 혼란의 시대에 그렇게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가장 현실
적이고 직접적인 오늘의 자의식입니다. 종교가 이러한 자의식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른바 영
혼의 구원도, 사회의 구원도, 역사의 구원도, 우주의 구원도 의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런데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입니다. 종교도 삶의 현실이라면 삶이 겪는
혼란에서 예외일 수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종교의 현실을 보면 종
교도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안에서 온갖 혼란의 징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는 스스로 그렇지 않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의식
을 설명하고 전달하고 확인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고, 이에서 비롯한 규범적인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그것 자체가 혼란입니다. 이보다 더 혼란스러울 수 없습니다. 자
신과 자신의 현존 간에서 이는 부조화와 괴리는 그대로 혼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종교
가 정확히 그러합니다. 스스로 혼란 자체이면서 자신은 혼란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러한 소용돌이 안에 있다할지라도 자신은 그 혼란에 물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연
꽃의 비유는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비유도 그러합니다. 하
지만 그것은 혼란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맑음과 오염의 경계가 뚜렷하고, 어둠과
빛의 경계 또한 그러한 경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뚜렷한 금 긋기가 가능한
현실을 우리는 혼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연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은 바로 그 경계의 설정이 불가능한 정황을 일컫습니다. 종교와 종교
아닌 것과의 구별이 불가능한 소용돌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종교의 실상이라면 종교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외라
는 자의식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터득하는 일입니다. 혼란 속에서는 혼란으
로 인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혼란의 책임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는 혼란의 피해자도 아닙니다. 혼란의 가해자도 아닙니다. 다만 혼란의 추체, 다시 말하면
혼란자체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승인하고 고백하는 것만이 지금 여기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이 혼란에 대한 책임주체라는 자의식을 거두어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혼란을 심판하겠다든지 구원하겠다든지 하는 자의식을 버리는 일을
서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박하게 지신이 혼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
에게 정직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은 정직을 측정할 준거도 없습니다. 그것이 혼란입니
다. 정직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충고할 규범도 없습니다. 역사를 준거로 하여 자신의 정직을
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혼란 속에 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론에
기대어 내 정직을 실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인식의 부재가 우리가 겪는 혼란의 진정한
속성입니다. 종교적인 진리나 계시나 권위에 의거하여 내 정직을 발언할 수도 없습니다. 그
러한 진리나 계시나 권위가 불투명하거나 가려졋거나 소멸된 것이 혼란의 정황이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여전히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가능한 것은 정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때 정직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겪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그대로 들어
내는 일입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곧이곧대로 밝히는
일입니다. 밖에서 잣대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솔직하면 됩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야 합니다. 짐짓 아는 척한다든지 모르는 것
을 들킬까 두려워 침묵하는 것은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혹스러움도 감추지 말아
야 합니다.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초조함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찾아도 선뜻 내
줄 수 없는 해답을 우리 함께 찾자고 해야 그것이 정직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나는 참 불
안하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
직입니다.
속으로 꿀리는 것이 있는 사람이 의외로 큰소리를 더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
한 모습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 큰소리에 놀라거나 경청하지 않습니다. 열등감이나 피해의
식에서 공격적이게 되거나 남을 되레 왜 그리 못됐고 바르지 못하냐고 윽박지르는 것도 정
직한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워 조용히 가릴 수 알고, 열등
감이나 피해의식이 생기면 그 까닭을 찾아 스스로 이를 메우는 일을 하는 모습을 일컫습니
다. 그것이 부끄러움과 못남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힘이 없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면 그렇다는 것을 밝히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직입니다. 베풀기만 하겟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세상
에 어떤 것도 스스로 자족적이지 못합니다. 혹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안하고 여기는 자의
식은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굴절된 또 다른 지배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배의식이 뜻밖에도 섬김의식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때가 잦습니다. 종교의 현존이 그러합
니다. 그래서 사실은 자신이 결코 그러한 처지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남몰래'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애써 지신의 심판자의 역할을 자임합니다. 거짓은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는데서 그
극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러하다는 것을 정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기만의 부정직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홑겹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자
아를 지니고 적당히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정직
의 모습일지라도 모릅니다.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그래서 어떤 파단의 준거도 없다할지라도 아직 우리는 자신에게 소
박하게 정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닙니다. 개인도 그러하지만 공동체도 그러합니다. 국가
도 문화도 역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양상은 달라도 구조는 다르지 않습니다.
5. 기독교, 오만과 기만의 구조
우리 기독교도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 속에 있습니다. 이 혼란한 사태 속에 있습니다. 그렇
다면 당연히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혼란 속에 있는 모든 실재가 혼란의 책임주체이고
혼란자체이듯이,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종교들이 또한 그러하듯이,기독교도 그러합니
다. 기독교는 오늘 여기의 혼란의 책임주체입니다. 혼란 자체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혼란의 소용돌이 밖에 있어 이 혼란을 수습해야겠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
다면 그것은 감동스러운 태도이기는 하지만 정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가 참으로
혼란 밖에 머물렀다면, 그래도 이 혼란의 원인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면, 그래서 자기와 무
관한 이 혼란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기에게만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치유의 추체
이기 이전에 혼란을 방치한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은 그렇게 하지 못햇습
니다. 혼란을 예방하지 못했습니다. 혼란 속에서 혼란의 주체였습니다.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해도 결과적으로 혼란자체였다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
로 혼란 밖에 자신이 있다는 자의식자체가 옳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기독교는 징벌의 대상이
어야 옳습니다.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가 스스로 이 혼란의 일부였다는 것을 승인하고, 그 혼란의 책임주체
였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기독교는 혼란 속에서 스스로 저지른 과오가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드러내면서 용서를 간구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용서을 받아야 합니다. 이 혼란의 시대에서
기독교는 혼란을 치유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혼란의 시대에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혼란을 향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이 있게 된 상화에 대하여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이 혼란의 시대에 이 시대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가라
고 묻는 '오만'을 용서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용서의 조건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
리는 용서를 빌 수 있을 뿐인데, 그 간구는 우리의 과오를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오의 고백은 관념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가능한 한 조목조목 살펴 아뢰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일
을 이 자리에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저러한 내용들이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함께 이야기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우리의 과오는 내 개인의 실존적인 자리에서
우선 밝혀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공동체와 국가와 문화와 역사의 자리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일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혼란의 시대에서는 과오를 확인하는 일조차 혼란스럽
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종교가 정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
로 어떤 것을 정직하게 과오라고 고백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면하면 그것이 자명하
지 않습니다.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의 잘못이 다른 쪽에서는 옳음일 수
있고, 그 역도 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실은 과
오의 탐색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 우리는 이를 신학과 교회와
신도의 자리를 좇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학이 용서받아야 할
것, 교회가 용서받아야 할 것, 그리고 개개 신도들이 용서받아야 할 것들을 나열해보고 싶
은 것입니다.
신학은 친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것은 물음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물
음도 좋습니다. 어떤 구실로도 물음은 차단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학은 그렇지 않습
니다. 물음을 향해 자기를 열어놓기보다 이미 자신이 마련한 해답을 전하기 위한 물음만을
기르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공동체는, 문화는, 역사는, 신학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
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물음이라든지 아니면 물음도 되지 않는 물음이라고
질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학은 그렇게 있습니다. 자연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이야기하
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새 영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신학적인 반향은 지금 여기에서 제기된 물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기보다 이미 이루어진
응축된 해답을 지금 여기의 물음상황에 맞추어 변용하고 있는 것과 다른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록 진보라든지 보수라든지 하는 신학의 경향성이 논의되도, 이런저런 주제에 따
라서 전혀 다른 여러 신학들이 오늘 우리의 문제들을 충분하게 반영하고 있다고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구조적으로 근본주의의 다양한 표상일 뿐 조금도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
로 오늘 우리의 정황 속에는 다만 근본주의 만 있을 뿐 우리의 고뇌를 안고 씨름해줄 어떤
신학도 실은 없습니다. 그러한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신학에 대한 부당한 기대를 가지는
데서 말미암는 과오라고 판단되는 것이 오늘의 신학적 정황입니다.
그런데 근본주의는 그것이 지니는 이념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합성을 지니지 못합
니다. 이념적 단순성으로는 짐작도 하지 못할 복합성을 지닌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근
본주의는 '지고한 지향'이라기보다 '천박한 회피'일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의 실천적 현장에
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 곳에는 근본주의의 내용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부수고 깨트리고 무너트리는 일만 벌어지는데 그것이 창조를 위한 혼돈
이라는 정당성은 실증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학으로부터 비롯한 가학증의 노출 이상의 어
떤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학은 삶과 더불어 있지 않습니다. 삶을 고뇌한다고 하지만 그 모
습을 확힌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단정적인 규범만이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학의 마당에는 신학자나 신학을 동경하는 소수 이외의 누구도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들
은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 합니다. 더 이상 경청할 사람이 남지 않습니다. 청중이 없는 그
텅 빈 공간에 남는 것은 오직 '자족(自足)하는 권위' 뿐입니다. 신학은 그 권위를 즐깁니다.
신학은 거대한 권위의 계보학을 이루면서 자기들의 그 울안에서 자기들의 이야기에 순응하
지 못하는 사람과 공동체와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질책과 연민, 때로는 저주를 자기의 발언
안에 교묘히 담습니다. '그들'과 같을 수 없는 '자기'의 모습에 스스로 감탄합니다. 신학이
친절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오만하고 결과적으로 기만적인 구조
안에서 자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렇가고 하는 것에 대한 정직한 승인을 통해 이 오만과
기만의 구조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사랑은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삶입니다. '어렸을 때의 일을 버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테면
성숙한 사람은 좋하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성숙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
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 어린 본능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아
직 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진술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드
러내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
람은 유치하다고 말합니다. 아직 자라지 못한 '아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만약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결속을 강조한 것일 뿐인데 그러한 사랑만 받고 있으면 아이는
자라지 못합니다.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자아를 지닐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러한 가르침은 유치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
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신이라고 교회가 가르친다면 그것도 사랑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구실로 미움을 기르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르침
은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속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아닌 미
움을 심어주면서 사랑을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치한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어린 아이들은 커다란 것을 가지고 자랑
하곤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것을 부러워합니다. 부러워하다 못해 큰 것을 가지고 자랑하
는 아이들을 욕합니다. 욕심꾸러기에서 나쁜 짓을 했다는 데 이르기까지 구실은 참 많습니
다. 그러면서 자기가 작은 것을 정당화합니다. 욕심이 없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큰 것을 가진 아이들도 작은 것을 가진 아이들을 욕합니다. 게으르
다는 데서 무능력하다는데 이르기까지 구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역시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폅니다. 나는 부지런했고 능력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축복을 받았고 너는 그렇지 못했
다고도 말합니다. 교회에서 이런 투의 이야기들이 발언된다면 그것은 교회가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실증입니다. 유치한 유희에 몰입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해
야 할 교회에서는 이런 어린아이의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지를, 얼마
나 성숙하지 못한지를, 요회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유치한 모습은 힘의 과시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랑은 힘을 자랑하지 않습니
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사랑은 소유를 의도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상호 의존하는 삶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의존은 책임주체 간에 이
루어지는 일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러한 주체 간의 일입니다. 지배와 예속을 책임이나 신
뢰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숙한 삶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
만 너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태도는 실은 힘에 의한 폭행을 사랑이라는 수사(修辭)로 장
식한 것일 뿐 결코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성숙했고, 우리는 이미 유치한 단계를 벗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넉넉하
게 누구나 무엇이나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의식을 지닌다는 것은 경탄스러운 일입니
다. 그러나 그러한 자의식은 필연적으로 독선이나 배타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그러한 속성을 지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낳을 과오는 분명합니다. 개인의 의식을 점유하겠
다는 결단, 공동체의 규범을 관리하겠다는 의도, 문화자체를 자신의 격률에 따라 획일화해
야겠다는 사명감, 그리고 역사 해석의 무류성(無謬性)을 자신만이 전유하고 있다는 자의식
이 초래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살육이였습니다. 이는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 빚는 참상입니다. 우리는 이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오만
과 기만의 구조는 이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도는 돈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문제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 그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러하기 때
문에 공동체도, 문화도, 역사도, 자연도 문제를 지닙니다. 싦은,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문제 아닌 것이, 또 문제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삶을 죄절하게 합니
다. 무의미 안에서 표류하게 합니다.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을 빚습니다. 따라서 해
답을 추구하는 일은 질식할 것 같은 폐쇄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게 묘사한다면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빚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말한다면 믿음은 반드시 출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지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미는 무의미 안에서도 솟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태도이가도 합니다. 그러므
로 믿음은 어떤 문제도 결국 해답에 이르지 않은 문제란 없다는 것을 승인하는 태도와 다르
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독한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삶의 양태를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테로
옮겨 놓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삶의 구체적인 조건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
다. 그러나 믿음이 초래하는 변화란 '삶의 조건'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이를테면 믿음을
지니면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니면 고통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재앙은 신도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고통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재앙이나 고통에서 이제까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신도들로 하여금
발견하도록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신도들은 그 모든 부정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
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문제되는 것이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문제는 있되 그
것이 문제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지닌다는 것이 현실 속에서는 무척 힘든 일입니다. 해답에 조급하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여기'를 벗어나 '저기'에 머물려는 태도는 스스로 강화합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번거로운 일에 눈을 감아버리고 저기의 평온을 누리려 합니다. 초월과
신비에의 몰입은 진정한 믿음의 과정이고, 그 귀결이 '저기에서의 안거(安居)라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자기 봉헌은 맹목적인 자기 포기와 다
르지 않다는 것을 흔히 간과합니다. '저기'에서의 해답은 다시 '여기'의 문제정화으로 되돌
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와 저기가 어우러져 새 누리를 빚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
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저기'에의 몰입만을 의도하는 믿음은 삶의 현실 속에서 반지성적이
고 반인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살피지 못합니다. 결국 피안에의 탈출로 귀결하는 믿음은
자기를 기만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돈독한 믿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와 또 다른 모습을 만
납니다. 온갖 문제를 신에게 호소하여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우리는 뜻밖에 '책임주체가 드
러내는 이른바 순수한 의존'이 아니라 '신을 자신의 희구의 성취를 위해 도구화하려는 불순
한 의지'가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하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효
율적인 투자대상이라는 의식이 신 이해의 실상입니다. 신을 관리하고 경영하려는 이러한 태
도는 믿음이 아니라 편리한 환상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편리한 환상을 믿음이라고 일컫는
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돈돈한 믿음이라고 일컫는 현상이 구조적으로 자신 안에 담도 있
는 오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돈독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범한 이 오만과 기만을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정직하게 스스로 승인하면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은 친절하기에는 너
무 독단적인 근본주의 신학, 사랑하기에는 너무 모자란 유치한 교회, 그리고 돈독한 믿음이
라기에는 너무 경망한 편리한 환상에의 몰입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만과 기만의 구조를
이루며 드러나고 있습니다.
6. <기독교사상> 600호
<기독교사상>이 600호를 맞습니다. 참 오랜 세월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사상>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이 혼란에서 조금도 면죄부를 지니지 못합니다. 만약 추호라도 <기
독교사상>이 스스로 어둠 속에서 의롭게 빛을 비추는 등대의 역할을 해왔다고 발언한다면
그것은 오만이고 기만입니다. <기독교사상>도 용서받아야 할 책임주체입니다.
그러나 한 사물의 긴 지속은 단순하게 연대기(年代記)의 축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
물이 그만큼 스스로 자신을 이어갈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렇다고 하는 사실은 그 사물의 생명이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위한 최적의 조건들을 선택
해왔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그 사물이 가히 부단하게 창조적이었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생명이 창조적인 지속을 이루어 의미를 빚을 수 있
는 길을 단 하나, 끊임없이 죽어 되사는 신비를 점철하는 일을 통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그렇다면 분명히 <기독교사상>도 그러했기에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사상>에게 바랄 것이 있다면 그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곧 끊임없이 이어 살
기를 바라지 말고 죽어 되사는 신비의 반복을 이어 살아 주십사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주체가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경동교회에서 있었던 울간 기독교사상 지령 600호 축하시간에 강연된 내용입니다.
오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복음교회 강좌시간이 바빠서...그만 나갑니다.
정진홍/이화여대 석좌교수
1. 혼란/ 편하지 않은 삶
삶이 편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조용하질 않습니다. 요동
이 멈추지 않고 소용돌이도 가라앉지를 않습니다. 세상이, 몸이, 마음이 그러합니다. 내가,
우리가, 그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생각해보면 실은 그랬던 것 같은데 내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무어라 묘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혼란'이라는 표현이
그래도 가장 어울릴 것 같습니다. 어지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뒤숭숭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좋지 않습니다. 삶은 모름지기 편해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나도 우리도
그들고 어제도 내일도 여기도 저기도 불편해서냐 그게 사람살이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쪼록 이 혼란이 오래 이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이 어려움을 잘 견뎌 그 혼란에 빠져
삶을 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서둘러 잘 다듬어진 세상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기야 인류의 긴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겪는 이러한 혼란을 우리만 겪고 있을 까닭이 없습
니다. 지금 여기의 우리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잇을 것이고 그러한
시대나 문화나 국가나 사회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읽어보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사례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과 견주어 오늘을 판단하고 상대적인 안도를 한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인 관념의 유희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는 혼란은 지극히 직접적
이고 실제적으로 우리가, 또는 내가 겪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하든 덜하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는 혼란의 경험주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임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무리 우리 자신이 그 혼란스러움 안에 있다할지라도 그 혼란을 '바라
볼 수 있는' 거리(距離)를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우리가
겪는 혼란의 실체를 할 수 있는 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이런 혼란이 비롯했는지 그 까
닭도 살피고, 그 혼란이 초래하는 결과도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혼란에 대한 진단이 필요
한 것입니다. 그 진단이 없으면 치유의 방도를 마련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2, 낯선 것의 등장/ 준거의 소실/ 구조의 해체
혼란을 초래하는 우선하는 것은 '낯선 것과의 만남' 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익숙한 것에 머물
러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영역은 이전과 비해 한 없이 넓어졌습니다. 이를테면 낯선
얼굴을 한 사람들, 낯선 언어, 낯선 음식, 낯선 역사, 낯선 의미, 낯선 종교들과 부닥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상화되면서 세상은 역설적으로 무척 좁아졌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 넓은 세계를 한꺼번에 겪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월이 무척 빠르게 흐르면서
온갖 것을 바꿔놓습니다. 그야말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태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변화를 좇은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지 못하면 곧 뒤진 현실에 머물 수밖
에 없는데 그러한 삶은 딱하게 됩니다. 오늘이 낯이 설어 스스로 움츠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낯선 것과의 만남이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것과의 만남입니다. 인식의
한계와 부닥치는 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안
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초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당연히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 아는 것이 힘이어서 그러한 힘을 가지고 세상을 버텨나가는
것이 일상적인 삶인데 그 힘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정황은 암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기존의 삶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갈등이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서적인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허탈해지고 때로는 분노가 일기
도 합니다. 인식의 한계, 그리고 정서적 불안은 불가피하게 혼랄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가르지 않습니다. 당연히 삶 전체가 그렇게 어지러워집니다.
이와 더불어 일어나는 현상이기는 합니다만 달리 또 하나의 혼란의 까닭을 살펴볼 수 있
습니다. 낯선 것과의 만남은 이제까지으 삶을 지탱하던 판단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르다고 판단한 것인데 낯선 문화 안에서는 그것이 옳은 것일 수 있습니다.그리고
그 역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른바 '준거의 소실' 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태를 겪게 됩니
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만 어려워지지 않습니다. 사물을 분류하는 기준도 모호해집니
다. 제각기 경험한 바가 다르고 그것이 기억되고 전승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고 해서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을 그대로 묵인할 수도 없습니다. 당장 갈등이
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을 해소할 힘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어떤 권위가 있어 그 갈등을 해소
해주어야 하는 것인데 누구나 자기 자리의 다름과 상관없이 인정할 그러한 권위가 없기 때
문입니다. 따라서 다름을 다듬을 힘이 사라져 버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혼란은 바로 이
러한 사태를 일컫습니다. 준거의 소실로 인한 권위의 붕괴가 곧 혼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삶은 정태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어디론지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삶이 제 모습을 지니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지향점을 제시해줄 절대
적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이르면 자연히 삶의 얼개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삶은 개체의 실존으로만 이루
어지지 않습니다. 무수한 개체들이 이루는 일정한 구조를 가집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이 결국 삶의 얼개입니다. 그러나 준거의 소실로 인한 권위의 붕괴와 방향의 상실은
그 얼개를 뜯어 더 이상 어떤 틀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존재
자체가 깃들 곳이 없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구조의 해체' 가 우리가
겪는 혼란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태 안에서는 각 개개인들이 제각기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기적인
관계가 개인 상호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삶이 삶일 수 없게 되는데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얼개 안에 머물지 않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애써 만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만나도 실은 그것이
만남이 아닙니다. 만나고 있다고 스스로 확인하는데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단절된 관계를 짐
짓 그렇기 않은 것으로 여기는 기만적인 관계임이 곧 드러납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고, 외로운데도 힘께 있어 든든하다고 의도적으로 스스로 자기를 확신시킵니다.
개인 간의 관계만 이렇기 않습니다. 공동체도, 국가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문화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과거나 미래와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단절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끊어져 있지 않다고 여기는데도 이어진 마디나 그 이어진 것들이 짓는 커다란 얼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절된 상황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단절도 연계
도 확인하기 힘든 삶의 현실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혼란은 이렇게
삶 속에 스며듭니다. 구조의 해체가 낳는 개인의 끝없는 유랑(流浪), 그리고 갖은 모습의 공
동체나 공동체 구조들의 상호 유리(遊離)가 삶을 혼란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3, 무기력/ 자기 절대화/ 유목적 규범과 환각적 실천
그렇다면 그러한 혼란의 결과가 어떻게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지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되풀이 한다면 낯선 것과의 만남에서 비롯하는 인식의 한계와 정서의 불안,
준거의 소실로 말미암은 권위의 붕괴와 방향의 상실, 그리고 구조의 해체가 초래하는 개인
의 유랑과 공동체의 상호유리가 혼란을 낳는 원인이라면 거기에서 귀결되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도 아울러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혼란을 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일 것
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정보의 넘침과 판단의 불능으로 인한 무기력'입니
다. 넘침이란 이미 다룰 수 엇을 정도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의 앎이 그러합
니다. 당연하게 낯섦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지의 고백일 것 같은데도, 또 그것이 사
실인데도, 현실적으로는 그 낯섦 자체가 그대로 파편적인 지식이 됩니다. 그래서 쏟아져 나
오는 앎의 덤이 속에 치이게 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혼란은 그저 단순한 복잡함이
아닙니다. 다름어지지 않은 무지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걸러지지 않은 앎의 소용돌이 안에
머무는 삶의 모습에 대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앎이 잘 다름어지지 않으면 그 앎은 철저하게 삶을 무기력하게 합니다. 선택지가
많을 때 당혹스러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럿이 총체적인 수렴을 통하여 하
나를 구축하거나 아니면 어느 하나를 선택해고 다른 것은, 비록 그것이 상당한 타당성과 의
미를 지닌 것이라고 해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갈등
은 끊임없이 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국적으로 어떤 것도 긍정적으로 승
인하거나 추진할 수 없는 속수무책인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삶은 의외로 강인합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의식이나 정서의 바탕이 된다할지라
도 그 혼란에 치여 자지러질 수 없는 것이 삶입니다. 준거의 소실로 제멋대로 모두 흩어지
는 것이 실상인 것 같아도 바로 그러한 방임을 거스르는 삶에의 동기가 역풍처럼 불기도 합
니다. 어떤 형태로든 동질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경주되고, 피해의식에서 말미암은 것이
수도 있지만, 동유의식을 확보하는 다양한 계기들이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체계적
인 종합을 이루지는 못한다하더라도 생존을 위한 은집을 서로 모색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혼란은 역설적인 구조를 낳습니다. 확장되면서 흩어지는 무력한 개체들의 망이 펼쳐지는 저
간에서 새삼 응집을 의도하는 거센 개체의 지향성들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출현합니다. 방임과 응집의 역설적 구조가 자신의 삶이
직면한 현실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의식하는 주체는 그러한 자의식을 통해 새로운 자기 정체
성을 구축합니다. 서둘러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자기 격률에 따라
이룩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뜻밖에 그러한 태도는 자기를 절대화하는 것으
로 나타납니다. 스스로 권위적이게 되고 타자에 대한 배타와 독선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문화도 역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는 자의식을 가지는 순간, 철저하게 자기 방어적이게됩니다. 그것이 이른바 '공격
의 생리학'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려 합니다. 혼란을 극복하는 길은
그 일 뿐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근본주의의 범람은 삶의 자리가 극도로 혼란스럽다는
것을 반증하는 가장 구체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온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혼란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것 자체가 혼란의 치유이거나 혼란을 질서로 옮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스스로 여
길 뿐입니다. 그것은 실은 환각적인 인식이고, 환각적인 판단이고, 다시 그것은 환가적인 실
천에 이릅니다. 자신의 삶이 온통 환각이나 환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지 못
하는 상황이 실은 혼란한 삶을 사는 가장 전형적인 '혼란스러운 모습' 입니다.
이러한 강인함을 지니지 못한 삶도 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혼란을 스스로 혼란의 흐름에
맡겨 견디려합니다. 이러한 삶에는 배타나 독선이 없습니다. 권위주의나 근본주의적인 절대
성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예 자의식이라는 것을 스스로 지우려고 합니다. 타자에 대한 의
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자를 의식하는 것은 자기 삶을 일탈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칫 그
것은 타자에 대한 간섭일 수 있는데 그것은 삶의 모습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누구
나 삶은 자기가 영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은
혼란자체를 혼란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혼란이란 삶의 장(場)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서 말미암은 잘못된 언표하고 판단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기의 실
패를 그렇게 기술하는 잘못된 의식의 표출이 낳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혼란의 늪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을 의외로 자주 그리고 많이 만납니다. 이를테면 유목적
(遊牧的)인 삶이 그러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이해하는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질서개념이
없습니다. 혼란은 그것이 그대로 그들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유목적인 규범을 짓습니다. 지
금 여기에서 내가 바라고 필요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이 삶을 위한 모든 것일
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이 빚는 이른바 유목적인 문화는 현실적으로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을 의도하거나 타자를 지우려하지도 않습니다. 필요가 만남을 초래하면
만나고, 더 아무런 필요도 없다면 만남을 잊거나 의도하지 않으면 됩니다.
혼란이 빚는 결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정보의 넘침과 판단의 불능으로
인한 무기력, 방임과 응집의 역설적 구조 안에서의 근본주의적 태도와 그러 인한 환각저 인
식과 판단과 실천, 그것이 귀격하는 자기기만적 삶의 일상화, 그리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예 혼란을 혼란으로 여기기보다 그것을 삶의 본연으로 살려는 유목적인 문화가 다름 아닌
혼란이 범람하는 자리에서 등장하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4, 종교, 그 착각의 실상
문제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물음은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음은 분명하게 전제하는 것이 있습니다. '혼란의 시대'와 '종교'의 대칭적인 구
조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이 물음은 혼란의 시대와 종
교를 별개의 실재로 여기도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종교가 무엇지 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절박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 혼란과 무관한, 아니면 더 적극
적으로 말하면,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고 그 주체인데 그것이 무슨 까
닭인지 잘 되지 않아 안타까운 아쉬움을 가득 담고 있는 그러한 물음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녀온 기억과 인식에 의하면 이는 종교에 대한 마땅한 기대입니다.
우리가 지닌 준거에 의하면 종교는 세상에 대한 엄연함 심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
로 종교의 권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룩함'으로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거룩함은 닿을
수 없는 어떤 신비, 그러나 그것에 닿지 않으면 삶이 무의미해지는 그러한 신비입니다. 종
교는 그 신비의 추체 또는 대행자라는 인식을 누립니다. 아득한 때부터 그래왔습니다. 그러
므로 종교는 거룩하지 않은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고 이끌 책무를 지닙니다. 세상은 그 가르
침을 좇아 자신의 완성을 기해야 합니다. 종교의 지엄함은 이러한 거룩한 절대적인 준거와
그것을 드러내는 마찬가지로 거룩한 권위에 의해 그러한 자신을 지탱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 세상의 삶의 틀을 지탱하는 유일한 실체입니다. 거룩한 실재에 기반
을 둔 존재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얼개 안에서 비로소 개인은
그 실존의 의미를 찾습니다. 공동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삶의 연대(連帶)는 인간과 자연과
역사와 기억까지 아루르는 불변하는 구조인데 그것을 유지하고 지속하게 하는 것도 종교에
서만 가능합니다. 우주적인 의미에서의 창조라는 개념이 이를 설명합니다. 실천적인 자리에
서는 사랑이나 자비를 통해 종교는 이 연대를 책임집니다. 그러한 것을 위한 규범과 가르침
도 종교는 마련합니다. 이를 통해 삶은 정연한 의미와 가치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거룩한 질서에서 벗어나거나 그에 적응하지 못하여 깨지고 갈라진 삶은 이 모든 가르침과
규범의 '진리' 안에서 치유됩니다. 종교는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이 종교라고 익혀왔
습니다.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익숙한 종교의 모습이고 이에 대한 서술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범람하는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익사하지 않
도록 하기 위해 마련한 구명선(救命線)이나 구조대(救助袋)와 같습니다. 종교가 그러한 기능
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앎이 종내 도달할 궁극적인 앎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앎은 절대자로부터 비롯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절대자에 대한 인식이 앎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이무리 앎이 넘쳐도 그것이 솟은 원천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면 어떤 혼란도 일 까닭이 없습니다. 종교는 그러한 자리에 있습니다. 당연히 판단도 흐릴
까닭이 없습니다. 궁긍적인 앎인 진리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종교자체가 이미
진리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삶은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생동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참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은 스스로 절대적입니다. 자신의 인식도 판
단도 실천도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표류하는 삶에 대한 연민
을 품습니다. 환각적인 안개 속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지닙니다. 사랑
해야 하고 자비를 베풀 대상들이 확연합니다. 종교적인 삶의 주체들은 이러한 자의식을 갖
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밖의 사람들'이 지니는 '알 수없는' 반역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종교는 경고와 질책과 때로는 저주조차 발언합니다. 스스로 절재적이고 궁극적이고,
그래서 거룩한 자리에 있는, 또는 스스로 이미 거룩함인 종교는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나 자의식은 때로 나르시시즘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종교는 비록 '저기'와 '그 때'와
'하늘'을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 바라봄과 희구를 경험하고 드러내는 곳은 '여기'이고 '지금'
이며 '이 땅'입니다. 초월과 신성과 신비를 경험하고 그것을 스스로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그
경험 때문에 내가 초월과 신성과 신비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또한 그런 것과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하늘'을 그리거나 기리거나 바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느
자리는 여기 '이 땅'입니다. 종교는 철저하게 '땅의 현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을 바랄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하늘을 바란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하는 사실은 종교가 결코 '밖의 현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종교는 '저기'에 있는
'그 때'부터 비롯한 아득한 '하늘'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우리 삶의
혼란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 이야기에서 종교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종교도 우리가 겪는
혼란의 한복판에 있는 '현상'입니다. 당연히 혼란의 이유에서도, 그 결과에서도 종교는 벗
어나 있지 않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종교라고 하는 것을 드러낼
경험주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기 지금 이 땅의 그 격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
는 존재입니다. 종교도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혼란스럽게 혼란을 겪는 혼란경험의 주체입
니다.
종교도 낯선 것과 부닥치면서 스스로 이제까지 지녔던 인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
을 저리게 실감합니다. 그에서 비롯하는 정서적 불안을 감추지 못합니다. 기존의 판단준거
가 아무리 궁극적이나 절대성의 이름으로 여전히 유지된다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
이고 부적합한 것인지도 모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위가 이전과 비해 상대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는 초라함오 간과하지 못합니다. 종교 스스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모르는 정황
에서 모두가 지향해야 할 길을 밝혀야 한다는 의무는 점점 더 부담스럽다는 것도 매일 종교
글 긴장하게 하는 현실입니다. 이제는 애써 노력해보지만 제도적 권위에 의한 공동체의 규
범을 유지한다는 것이 심각하게 회의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결코 부정하거나 간과하
거나 짐짓 외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종교의 현실이 이를 분명
한 사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실이 자기의
모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종교는 자신이 단연코 혼란에서 예외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
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간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 흐름에 들 수 없는 예외자입니다. 역사 속
에서 늘 그렇게 해왔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설명할 수 없는 신비라고도 발언합
니다. 이를 위한 봉헌은 삶의 지고한 목표이고 보람이고 의미라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잘못
되어가는 세상인데. 다행하게도 종교는 이를 건질 기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증언합니
다.종교는 '여기 안의 저기'이고,'지금 안의 그 때'이며, '이 땅 안의 하늘'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기 때문에 혼란 안에 있는 혼란 아닌 실채, 곧 '카오스 안에 있는 코스
모스'라고 자신을 확인합니다. 자신에게서 이 혼랑은 벗어날 '구원의 빛'이 비치게 될 것
은 자명한 일입니다. 종교은 혼란의 시대에 그렇게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가장 현실
적이고 직접적인 오늘의 자의식입니다. 종교가 이러한 자의식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른바 영
혼의 구원도, 사회의 구원도, 역사의 구원도, 우주의 구원도 의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런데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입니다. 종교도 삶의 현실이라면 삶이 겪는
혼란에서 예외일 수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종교의 현실을 보면 종
교도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안에서 온갖 혼란의 징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는 스스로 그렇지 않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의식
을 설명하고 전달하고 확인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고, 이에서 비롯한 규범적인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그것 자체가 혼란입니다. 이보다 더 혼란스러울 수 없습니다. 자
신과 자신의 현존 간에서 이는 부조화와 괴리는 그대로 혼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종교
가 정확히 그러합니다. 스스로 혼란 자체이면서 자신은 혼란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러한 소용돌이 안에 있다할지라도 자신은 그 혼란에 물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연
꽃의 비유는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비유도 그러합니다. 하
지만 그것은 혼란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맑음과 오염의 경계가 뚜렷하고, 어둠과
빛의 경계 또한 그러한 경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뚜렷한 금 긋기가 가능한
현실을 우리는 혼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연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은 바로 그 경계의 설정이 불가능한 정황을 일컫습니다. 종교와 종교
아닌 것과의 구별이 불가능한 소용돌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종교의 실상이라면 종교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외라
는 자의식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터득하는 일입니다. 혼란 속에서는 혼란으
로 인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혼란의 책임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는 혼란의 피해자도 아닙니다. 혼란의 가해자도 아닙니다. 다만 혼란의 추체, 다시 말하면
혼란자체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승인하고 고백하는 것만이 지금 여기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이 혼란에 대한 책임주체라는 자의식을 거두어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혼란을 심판하겠다든지 구원하겠다든지 하는 자의식을 버리는 일을
서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박하게 지신이 혼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
에게 정직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은 정직을 측정할 준거도 없습니다. 그것이 혼란입니
다. 정직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충고할 규범도 없습니다. 역사를 준거로 하여 자신의 정직을
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혼란 속에 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론에
기대어 내 정직을 실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인식의 부재가 우리가 겪는 혼란의 진정한
속성입니다. 종교적인 진리나 계시나 권위에 의거하여 내 정직을 발언할 수도 없습니다. 그
러한 진리나 계시나 권위가 불투명하거나 가려졋거나 소멸된 것이 혼란의 정황이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여전히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가능한 것은 정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때 정직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겪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그대로 들어
내는 일입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곧이곧대로 밝히는
일입니다. 밖에서 잣대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솔직하면 됩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야 합니다. 짐짓 아는 척한다든지 모르는 것
을 들킬까 두려워 침묵하는 것은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혹스러움도 감추지 말아
야 합니다.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초조함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찾아도 선뜻 내
줄 수 없는 해답을 우리 함께 찾자고 해야 그것이 정직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나는 참 불
안하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
직입니다.
속으로 꿀리는 것이 있는 사람이 의외로 큰소리를 더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
한 모습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 큰소리에 놀라거나 경청하지 않습니다. 열등감이나 피해의
식에서 공격적이게 되거나 남을 되레 왜 그리 못됐고 바르지 못하냐고 윽박지르는 것도 정
직한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워 조용히 가릴 수 알고, 열등
감이나 피해의식이 생기면 그 까닭을 찾아 스스로 이를 메우는 일을 하는 모습을 일컫습니
다. 그것이 부끄러움과 못남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힘이 없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면 그렇다는 것을 밝히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직입니다. 베풀기만 하겟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세상
에 어떤 것도 스스로 자족적이지 못합니다. 혹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안하고 여기는 자의
식은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굴절된 또 다른 지배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배의식이 뜻밖에도 섬김의식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때가 잦습니다. 종교의 현존이 그러합
니다. 그래서 사실은 자신이 결코 그러한 처지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남몰래'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애써 지신의 심판자의 역할을 자임합니다. 거짓은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는데서 그
극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러하다는 것을 정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기만의 부정직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홑겹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자
아를 지니고 적당히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정직
의 모습일지라도 모릅니다.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그래서 어떤 파단의 준거도 없다할지라도 아직 우리는 자신에게 소
박하게 정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닙니다. 개인도 그러하지만 공동체도 그러합니다. 국가
도 문화도 역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양상은 달라도 구조는 다르지 않습니다.
5. 기독교, 오만과 기만의 구조
우리 기독교도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 속에 있습니다. 이 혼란한 사태 속에 있습니다. 그렇
다면 당연히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혼란 속에 있는 모든 실재가 혼란의 책임주체이고
혼란자체이듯이,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종교들이 또한 그러하듯이,기독교도 그러합니
다. 기독교는 오늘 여기의 혼란의 책임주체입니다. 혼란 자체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혼란의 소용돌이 밖에 있어 이 혼란을 수습해야겠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
다면 그것은 감동스러운 태도이기는 하지만 정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가 참으로
혼란 밖에 머물렀다면, 그래도 이 혼란의 원인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면, 그래서 자기와 무
관한 이 혼란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기에게만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치유의 추체
이기 이전에 혼란을 방치한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은 그렇게 하지 못햇습
니다. 혼란을 예방하지 못했습니다. 혼란 속에서 혼란의 주체였습니다.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해도 결과적으로 혼란자체였다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
로 혼란 밖에 자신이 있다는 자의식자체가 옳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기독교는 징벌의 대상이
어야 옳습니다.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가 스스로 이 혼란의 일부였다는 것을 승인하고, 그 혼란의 책임주체
였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기독교는 혼란 속에서 스스로 저지른 과오가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드러내면서 용서를 간구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용서을 받아야 합니다. 이 혼란의 시대에서
기독교는 혼란을 치유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혼란의 시대에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혼란을 향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이 있게 된 상화에 대하여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이 혼란의 시대에 이 시대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가라
고 묻는 '오만'을 용서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용서의 조건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
리는 용서를 빌 수 있을 뿐인데, 그 간구는 우리의 과오를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오의 고백은 관념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가능한 한 조목조목 살펴 아뢰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일
을 이 자리에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저러한 내용들이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함께 이야기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우리의 과오는 내 개인의 실존적인 자리에서
우선 밝혀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공동체와 국가와 문화와 역사의 자리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일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혼란의 시대에서는 과오를 확인하는 일조차 혼란스럽
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종교가 정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
로 어떤 것을 정직하게 과오라고 고백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면하면 그것이 자명하
지 않습니다.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의 잘못이 다른 쪽에서는 옳음일 수
있고, 그 역도 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실은 과
오의 탐색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 우리는 이를 신학과 교회와
신도의 자리를 좇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학이 용서받아야 할
것, 교회가 용서받아야 할 것, 그리고 개개 신도들이 용서받아야 할 것들을 나열해보고 싶
은 것입니다.
신학은 친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것은 물음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물
음도 좋습니다. 어떤 구실로도 물음은 차단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학은 그렇지 않습
니다. 물음을 향해 자기를 열어놓기보다 이미 자신이 마련한 해답을 전하기 위한 물음만을
기르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공동체는, 문화는, 역사는, 신학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
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물음이라든지 아니면 물음도 되지 않는 물음이라고
질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학은 그렇게 있습니다. 자연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이야기하
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새 영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신학적인 반향은 지금 여기에서 제기된 물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기보다 이미 이루어진
응축된 해답을 지금 여기의 물음상황에 맞추어 변용하고 있는 것과 다른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록 진보라든지 보수라든지 하는 신학의 경향성이 논의되도, 이런저런 주제에 따
라서 전혀 다른 여러 신학들이 오늘 우리의 문제들을 충분하게 반영하고 있다고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구조적으로 근본주의의 다양한 표상일 뿐 조금도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
로 오늘 우리의 정황 속에는 다만 근본주의 만 있을 뿐 우리의 고뇌를 안고 씨름해줄 어떤
신학도 실은 없습니다. 그러한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신학에 대한 부당한 기대를 가지는
데서 말미암는 과오라고 판단되는 것이 오늘의 신학적 정황입니다.
그런데 근본주의는 그것이 지니는 이념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합성을 지니지 못합
니다. 이념적 단순성으로는 짐작도 하지 못할 복합성을 지닌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근
본주의는 '지고한 지향'이라기보다 '천박한 회피'일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의 실천적 현장에
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 곳에는 근본주의의 내용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부수고 깨트리고 무너트리는 일만 벌어지는데 그것이 창조를 위한 혼돈
이라는 정당성은 실증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학으로부터 비롯한 가학증의 노출 이상의 어
떤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학은 삶과 더불어 있지 않습니다. 삶을 고뇌한다고 하지만 그 모
습을 확힌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단정적인 규범만이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학의 마당에는 신학자나 신학을 동경하는 소수 이외의 누구도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들
은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 합니다. 더 이상 경청할 사람이 남지 않습니다. 청중이 없는 그
텅 빈 공간에 남는 것은 오직 '자족(自足)하는 권위' 뿐입니다. 신학은 그 권위를 즐깁니다.
신학은 거대한 권위의 계보학을 이루면서 자기들의 그 울안에서 자기들의 이야기에 순응하
지 못하는 사람과 공동체와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질책과 연민, 때로는 저주를 자기의 발언
안에 교묘히 담습니다. '그들'과 같을 수 없는 '자기'의 모습에 스스로 감탄합니다. 신학이
친절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오만하고 결과적으로 기만적인 구조
안에서 자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렇가고 하는 것에 대한 정직한 승인을 통해 이 오만과
기만의 구조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사랑은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삶입니다. '어렸을 때의 일을 버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테면
성숙한 사람은 좋하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성숙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
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 어린 본능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아
직 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진술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드
러내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
람은 유치하다고 말합니다. 아직 자라지 못한 '아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만약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결속을 강조한 것일 뿐인데 그러한 사랑만 받고 있으면 아이는
자라지 못합니다.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자아를 지닐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러한 가르침은 유치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
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신이라고 교회가 가르친다면 그것도 사랑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구실로 미움을 기르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르침
은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속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아닌 미
움을 심어주면서 사랑을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치한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어린 아이들은 커다란 것을 가지고 자랑
하곤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것을 부러워합니다. 부러워하다 못해 큰 것을 가지고 자랑하
는 아이들을 욕합니다. 욕심꾸러기에서 나쁜 짓을 했다는 데 이르기까지 구실은 참 많습니
다. 그러면서 자기가 작은 것을 정당화합니다. 욕심이 없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큰 것을 가진 아이들도 작은 것을 가진 아이들을 욕합니다. 게으르
다는 데서 무능력하다는데 이르기까지 구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역시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폅니다. 나는 부지런했고 능력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축복을 받았고 너는 그렇지 못했
다고도 말합니다. 교회에서 이런 투의 이야기들이 발언된다면 그것은 교회가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실증입니다. 유치한 유희에 몰입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해
야 할 교회에서는 이런 어린아이의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지를, 얼마
나 성숙하지 못한지를, 요회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유치한 모습은 힘의 과시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랑은 힘을 자랑하지 않습니
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사랑은 소유를 의도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상호 의존하는 삶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의존은 책임주체 간에 이
루어지는 일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러한 주체 간의 일입니다. 지배와 예속을 책임이나 신
뢰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숙한 삶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
만 너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태도는 실은 힘에 의한 폭행을 사랑이라는 수사(修辭)로 장
식한 것일 뿐 결코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성숙했고, 우리는 이미 유치한 단계를 벗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넉넉하
게 누구나 무엇이나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의식을 지닌다는 것은 경탄스러운 일입니
다. 그러나 그러한 자의식은 필연적으로 독선이나 배타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그러한 속성을 지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낳을 과오는 분명합니다. 개인의 의식을 점유하겠
다는 결단, 공동체의 규범을 관리하겠다는 의도, 문화자체를 자신의 격률에 따라 획일화해
야겠다는 사명감, 그리고 역사 해석의 무류성(無謬性)을 자신만이 전유하고 있다는 자의식
이 초래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살육이였습니다. 이는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 빚는 참상입니다. 우리는 이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오만
과 기만의 구조는 이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도는 돈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문제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 그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러하기 때
문에 공동체도, 문화도, 역사도, 자연도 문제를 지닙니다. 싦은,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문제 아닌 것이, 또 문제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삶을 죄절하게 합니
다. 무의미 안에서 표류하게 합니다.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을 빚습니다. 따라서 해
답을 추구하는 일은 질식할 것 같은 폐쇄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게 묘사한다면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빚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말한다면 믿음은 반드시 출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지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미는 무의미 안에서도 솟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태도이가도 합니다. 그러므
로 믿음은 어떤 문제도 결국 해답에 이르지 않은 문제란 없다는 것을 승인하는 태도와 다르
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독한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삶의 양태를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테로
옮겨 놓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삶의 구체적인 조건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
다. 그러나 믿음이 초래하는 변화란 '삶의 조건'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이를테면 믿음을
지니면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니면 고통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재앙은 신도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고통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재앙이나 고통에서 이제까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신도들로 하여금
발견하도록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신도들은 그 모든 부정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
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문제되는 것이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문제는 있되 그
것이 문제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지닌다는 것이 현실 속에서는 무척 힘든 일입니다. 해답에 조급하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여기'를 벗어나 '저기'에 머물려는 태도는 스스로 강화합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번거로운 일에 눈을 감아버리고 저기의 평온을 누리려 합니다. 초월과
신비에의 몰입은 진정한 믿음의 과정이고, 그 귀결이 '저기에서의 안거(安居)라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자기 봉헌은 맹목적인 자기 포기와 다
르지 않다는 것을 흔히 간과합니다. '저기'에서의 해답은 다시 '여기'의 문제정화으로 되돌
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와 저기가 어우러져 새 누리를 빚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
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저기'에의 몰입만을 의도하는 믿음은 삶의 현실 속에서 반지성적이
고 반인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살피지 못합니다. 결국 피안에의 탈출로 귀결하는 믿음은
자기를 기만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돈독한 믿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와 또 다른 모습을 만
납니다. 온갖 문제를 신에게 호소하여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우리는 뜻밖에 '책임주체가 드
러내는 이른바 순수한 의존'이 아니라 '신을 자신의 희구의 성취를 위해 도구화하려는 불순
한 의지'가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하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효
율적인 투자대상이라는 의식이 신 이해의 실상입니다. 신을 관리하고 경영하려는 이러한 태
도는 믿음이 아니라 편리한 환상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편리한 환상을 믿음이라고 일컫는
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돈돈한 믿음이라고 일컫는 현상이 구조적으로 자신 안에 담도 있
는 오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돈독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범한 이 오만과 기만을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정직하게 스스로 승인하면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은 친절하기에는 너
무 독단적인 근본주의 신학, 사랑하기에는 너무 모자란 유치한 교회, 그리고 돈독한 믿음이
라기에는 너무 경망한 편리한 환상에의 몰입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만과 기만의 구조를
이루며 드러나고 있습니다.
6. <기독교사상> 600호
<기독교사상>이 600호를 맞습니다. 참 오랜 세월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사상>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이 혼란에서 조금도 면죄부를 지니지 못합니다. 만약 추호라도 <기
독교사상>이 스스로 어둠 속에서 의롭게 빛을 비추는 등대의 역할을 해왔다고 발언한다면
그것은 오만이고 기만입니다. <기독교사상>도 용서받아야 할 책임주체입니다.
그러나 한 사물의 긴 지속은 단순하게 연대기(年代記)의 축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
물이 그만큼 스스로 자신을 이어갈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렇다고 하는 사실은 그 사물의 생명이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위한 최적의 조건들을 선택
해왔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그 사물이 가히 부단하게 창조적이었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생명이 창조적인 지속을 이루어 의미를 빚을 수 있
는 길을 단 하나, 끊임없이 죽어 되사는 신비를 점철하는 일을 통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그렇다면 분명히 <기독교사상>도 그러했기에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사상>에게 바랄 것이 있다면 그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곧 끊임없이 이어 살
기를 바라지 말고 죽어 되사는 신비의 반복을 이어 살아 주십사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주체가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경동교회에서 있었던 울간 기독교사상 지령 600호 축하시간에 강연된 내용입니다.
오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복음교회 강좌시간이 바빠서...그만 나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일단 프린트해서 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