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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Torah
For Modern Minds> – by Michael Massing –
New York Times, 3월 9일, 2002년
아마도 아브라함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세도 역시. 출애굽 이야기는 가공의 사건으로 해석된다. 여리고성의 무너짐도 마찬가치이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성을 세웠던 다윗왕은 조그만 지역의 지도자에 불과했으나 후세에 민족국가를 정점으로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명성이 과장되었다.
Orthodox파를 제외한 랍비들 사이에서 지난 25년간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수용하는 믿기 힘든 변화가 일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러한 생각들을 일반유대인들에게 알리거나 공개적으로 토론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 최소한 지금까진.
미국내 150만 보수적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United Synagogue of Conservative Judaism은 60여년 만에 새로운 ‘토라와 주석’을 발간하였다. ''Etz Hayim''(히브리어로 생명의 나무 ''Tree of Life'')이라 불리우는 이 책자는 토라를 해석하는데 고고학, 철학, 인류학과 고대 문화사등의 새로운 발견을 고려하게 해준다.
“내가 브루클린에서 자랄 때, 교인들은 그다지 아는게 많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아주 현명하고 역사, 문화, 심리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읽은 사람들이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어린이용 성경에 묶여 있답니나.” 랍비, Harold Kushner의 말이다.
''Etz Hayim,''은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다. 이 책자는 표준적인 히브리 텍스트와 병행하여 영어번역을 실고서 각 페이지마다 주석과 함께 유대적 관례에 관한 비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끝부분에 토라 두루마기와 음식법에서부터 환경과 종말론에 이르는 주제들에 대한 41편의 랍비들과 학자들이 쓴 에세이를 덧붙였다.
이 에세이들은 많은 회중을 놀라게 할 것이 틀림없다. 예를들어 University of Judaism in Los Angeles의 총장이 쓴 “고대 근동의 신화학”이란 에세이는 창세기 이야기가 팔레스타인이 아닌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노아의 이야기도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이야기에서 빌려왔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 교수인 Lee I. Levine의 “'Biblical Archaeology,” 또한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에집트에서의 탈출에 관한 그 어떤 자료도 없다. 그나마 존재하는 몇 안되는 증거들도 에집트에서 기원한 이름들을 사용했다는 것과 같은 간접적인 것들 뿐이다.” 그는 또한 가나안 정복과 정착도 출애굽과 마찬가지로 모호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시기에 여리고는 이미 무너지고 사람이 살지 않은 폐허였다. 더 나아가서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의 시대를 기술하는 성경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전무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보수적 랍비들이 성경이 문자적 사실이 아니라는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랍비 Rabbi Wolpe는 작년 유월절 설교에서 2,200 명의 회중을 앞에 두고 “출애굽이 실제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방식은 아니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시나이 반도를 파헤쳤던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 부족의 그 어떤 흔적도 못찾았다 --- 도자기 파편 하나도.” 이 랍비의 설교에 대한 반응은 분노에서 공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분노를 표시했던 유대인들의 실제 반응은 그 발언의 시기적 민감성과 노골성을 탓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새로운 ''Etz Hayim''이 나오기 전까지, 보수주의 유대인들은 1936년에 발간된 랍비 Joseph Hertz의 토라 주석을 사용해왔다. Hertz가 그 주석을 발간하던 시기는 독일의 웰하우젠 같은 학자들에 의해 히브리 성경의 저자들과 정확성이 강하게 의심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강력한 반유대주의와 “신약”에 대한 “구약”의 열등성을 입증하려는 기독교인들의 노력이 팽배했던 시대에 Hertz는 구약 텍스트의 완전성에 관한 그 어떤 의심도 물리쳐야 했다. “동양(중동)의 모든 역사서들 중 오직 성경의 연대기만이 역사라고 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Hertz의 주장은 1981년까진 잘 유지되었다. 그 해 개혁주의 유대인들의 공식연합인 the Union of American Hebrew Congregations이 자체적인 토라 주석서를 발간한 것이다. 이 주석은 그간의 고고학적, 문서비평적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성경의 정확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이 주석에서 창세기 ‘설화’는 “신화, 전설, 먼 과거로부터의 기억, 기원의 탐구적 노력들이 신학적 개념이란 중심으로 녹아든 혼합물”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출애굽은 ‘역사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부족 설화’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소수 의견”이라고 소개한다.
20년이 지난 후, 소수 의견은 다수 의견이 되었다.
그러나 정통주의(Orthodox) 유대인들은 여전히 토라를 하나님의 신성하고 불변하는 말씀으로 간주한다. 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Stone Edition (1993) 주석은 “토라의 모든 문자들과 단어는 하나님에 의해 모세에게 주어진 것이다”고 선언하고 있다. Orthodox Jew이자 뉴욕대 교수인 Lawrence Schiffman은 ''Etz Hayim''이 너무 앞서 나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경의 정확성에 관한 질문들 대부분을 그저 뒤로 숨겨왔다. 일반 회중들이 그것들을 다시 들추어내진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보수주의 랍비들 사이에서도 의심의 정도와 깊이에 관해선 불편해 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성경텍스트의 기본적인 역사성은 확실하고 또 입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tz Hayim''의 편집에 참여했던 랍비, Susan Grossman의 말이다. 그녀는 엄청난 고고학적 증거가 그녀의 견해와 상반되는 것에 대해 “사건이 없었다는 증거는 없다. 대부분의 증거가 ‘침묵으로부터의 증거’일 뿐이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복잡한 프로젝트에서 불일치하는 점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랍비, Rabbi Kushner는 단 한 군데, 즉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 레위기:18:22” 에서만 공통된 합의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우리 모두가 받아들일만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실패했지요. 어떤 이들은 동성애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 생물학이 그러한 생각은 틀린 것이라고 완전하게 입증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거든요.” 결국, 편집자들은 절충하여 “동성애 관계에 대한 토라의 금지는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우리 보수주의 회당들은 모든 게이와 레즈비안 회중들을 환영해야 한다” 라는 임시적인 문구를 사용하였다.
지난 가을 발행이래 ''Etz Hayim''은 10만부 이상이 팔렸다. ''Etz Hayim''은 미국내 760여 보수주의 회당에서 표준 성경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대 교수인 Mark S. Smith는 Hertz의 주석이 65년 동안 사용된 것을 생각했을 때, 'Etz Hayim'이 앞으로 50여년 정도는 사용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Etz Hayim'의 수명은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의 속도에 달려있을 가능성도 크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유대화 되어 문서로 정착된 것이 성경이다.'라는 말을 다비아 댓글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맞는 말 일수도 있지만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또한 breeze님의 위 글에서 소개된 '창세기 설화는 신화, 전설, 먼 과거로부터의 기억, 기원의 탐구적 노력들이 신학적 개념의 중심으로 녹아든 혼합물이라는 선언'에 대해 자세히 읽어보진 못했지만, 성경을 설화라고 주장할 때에 간과하기 쉬운 위험성에 대하여 저의 생각을 조금만 언급해보겠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 창세기 1장과 비슷한 창조기사가 많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각자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종교의 숫자만큼이나 많았겠지요.
이는 창세기의 저자는 물론 독자들도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를 완료한 이후 창세기2장4절에 창조자의 신명이 최초로 언급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아시다시피 '여호와 하나님'의 히브리어는 '야훼 엘로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해석된 '엘로힘'이라는 말은 그냥 넓은 의미의 '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당시 누구나 자기의 신을 '엘로힘'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이처럼 수 많은 창조자로서의 '엘로힘'이 있지만, 진짜 창조자 엘로힘이 누군지 아느냐? 바로 '야훼 엘로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당시의 창세기 독자들은 창세기1장을 읽(들)으면서 그 내용에 너무도 익숙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2장 4절에 가서 정신이 번쩍 났겠지요? 그 하나님이 바로 '야훼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계시에 있어서의 성령의 감동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야훼'라는 단어를 창세기 저자에게 문자적으로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실 때 다양한 형태로 당신의 '리얼리티'를 보여주신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저자는 그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표현한 것이고요.
그렇기에 고대 근동 당시의 신화가 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화는 그냥 신화가 아니겠지요?
신화란?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경험한 자가 하나님의 실재성을 표현하는 경험적 도구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폄하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바로 자유주의신학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벌거벗기고 직면하여 서 본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의 해체주의적 주장 말입니다.
철장 같은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데도 무덤덤하게 그 말씀을 분석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들은, 저의 가슴에 박힌 말이 있습니다.
" 처음엔 내가 성경을 읽는다. "
" 다음엔 성경이 성경을 읽는다. "
" 그 다음엔 성경이 나를 읽는다. "
마지막 차원이 성경을 읽는자의 진정한 태도라고 배웠습니다.
나의 전제와 경험과 고집과 주장의 숨김이 말씀 앞에 낱낱이 들킴바 되어 허물어지는 차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breeze님 따끈한 소식 감사합니다.
'토라와 주석'이라는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네요.
책의 번역, 출판을 다비아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글은 굳이 안희철님의 글에 답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저의 글에 대한 보충의 필요를 느껴 몇 자 적어보는 것입니다.
저에게 달아주신 꼬리 글을 읽고 가늠하기로는, 이분은 문학비평(또는 자료비평, 편집비평, 더 나아가 역사비평 등등)의 관점에서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이 글을 다른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안희철님께서 언급하신 내용(알파벳 약자)을 부연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일이겠지요.
이 때 다양한 비평의 방법들을 활용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문학비평이라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여 안희철님의 관점은 고전문학비평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학비평학가들의 말에 의하면 오경에는 네 가지 문서가 나오는데, 신명神名을 엘로힘(하나님)이라고 쓰는 문서를 ‘엘로히스트’라 하여 약자를 붙여 E문서라 하고, 신명神名을 야훼(여호와)라고 쓰는 문서를 ‘야휘스트’라 하여 약자를 붙여 J문서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전이나 제사와 관련한 문서를 제사장적 문서라 하여 P문서라 하고, 신명기처럼 정교하고 독특한 필체의 문서를 신명기적 문서라 하여 D문서라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문학비평의 결론은, (오경을 예로) 모세가 저자로 알려진 오경은 각각의 다른 저자들이 기록한 것을 편집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창세기 1장과 2장은 다른 문서의 조합일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것을 연결하고 있는 2장4절의 본문에서 은혜를 받고 있는 제가 이상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창세기2장4절의 한글번역은 히브리 본문의 문장과 비교하면 전, 후가 도치되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샘터교회에서 사용하는 개역개정판은 그 순서가 바로 잡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고전적 문학비평은 사실 18C 중반 프랑스의 의사에 의해 우연찮게 제기된 문제였답니다.
이것이 19C 후반 벨하우젠에 의해 체계화되면서 그동안 전통적으로 여겨왔던 모세의 오경저작권설이 서서히 힘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습니다.
왜 동일한 내용(창조기사나 홍수기사 등등)이 반복되는가? 왜 앞뒤의 문맥(출19-20장, 출24-25장 등등)이 끊기는가? 어떻게 모세가 자신의 사후死後를 기록(신명기)할 수 있는가? 등등. 이 밖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1974년 톰슨에 의해, 족장 내러티브들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 흔히 인용되었던 주장들을 다시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문학성에 대해 말할 때 이는 문학의 장르를 말함이 아니라 표현방식을 일컫는 것인데, 이런 문학성의 표준에 있어서 고전문학비평학자들은 그리스(로마)의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로마)의 문학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히브리적인 기록을 비판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문학(표현방식)에 있어서 그리스(로마)적인 것과 히브리적인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고대 히브리인들의 표현방식은 비유적이고 총체적이며 반복적입니다. 심지어 중요한 것을 언급할 때는 시간적 순서도 무시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로마)인들의 표현방식은 직관적이고 분석적이고 단편적입니다.
참고로, 르네상스를 거친 현대서양학문의 뿌리도 그리스(로마)입니다. 서양학문을 그대로 전수 받은 우리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어떤 사실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직관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에 빠져드는 습성을 쉽게 드러내곤 할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배추 한 포기를 바라볼 때 히브리인들은 그것을 전체로 놓고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로마)인들은 일단 조각을 내고 분석하여 연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히브리적 사고로 창세기 1-2장을 관찰해본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중요한 사실인데도 그동안의 비평에서 간과되었었다는 것에 저는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고와 표현의 근본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일관된 전개가 아닌 듯한 본문에 대해 여러 문서가 편집됐다고 결론 내는 것은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굉장한 연구들을 했겠지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사고와 표현방식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 저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히브리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한 때는,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고전 헬라어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해본 말입니다.
영어를 잘 하는 한국 사람이 영어로 자서전을 썼을 때 그 깊이를 제대로 헤아리기 위해 영국으로 영문학을 공부하러 가는 격이지요.
전에 이 부분을 공부하며 들은 얘기를 빌리자면, 1980년 이전에 신학을 하신 분들은 아마도 이런 주장에 낯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 1-3장을 히브리적 표현방식을 따라 묵상했던 것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3장까지의 기사를 길게 펼쳐놓고 보았을 때,
창세기 1장은 창조세계 전체가 그려집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하늘과 땅 모두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 2장은 하늘은 안보이고 땅만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다시 창세기 3장은 넓은 땅은 사라지고 에덴동산만이 클로우즈-업 됩니다.
하늘과 땅에서(1장) → 땅으로(2장) → 다시 에덴동산으로(3장).
마치 하나님이 우주에서 에덴동산을 향해, 엄밀히 말하면 아담을 향해 망원렌즈를 당기는 모습처럼 그려집니다.
이것을 분석적으로 본다면 1장에서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창조됐는데 2장에서는 사람이 가장 먼저 창조됐다고 하면서 다른 두 창조기사의 편집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초점이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본 것입니다. 1장에서는 최고의 환경을 먼저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시는 하나님. 2장에서는 아담을 가장 중심에 놓고 ‘너를 위해 창조한 세상을 한 번 볼래?’ 하며 재연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창세기 3장에 가서, 다시 말해 삶의 터전인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1장 마지막에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왠지 모르게 숨겨진 듯한 긴장의 실체가 비극적으로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1장만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생각 없이 저의 질문에 한 번 답해보시겠습니까?
넷째 날에 무엇을 창조했나요?
한 참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총체적인 기록을 분석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일 것입니다.
상상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창조세계를 그려보십시오.
첫째 날에 빛을 만들었습니다. 둘째 날에 빛에 드러난 궁창을 하늘과 바다로 나눴습니다. 셋째 날에 땅을 만들었습니다. 빛과 하늘과 바다와 땅이라는 틀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 세 날 앞에 거울을 반사 해보십시오.
첫째 날 앞에 넷째 날이 보이겠지요? 그렇다면 넷째 날에 무엇을 만들었겠습니까? 빛의 실체인 태양, 달, 별을 만들겠지요. 둘째 날 앞에 보이는 다섯째 날에는 무엇을 만들었겠습니까? 하늘과 바다의 내용물인 새와 물고기를 만들겠지요. 셋째 날 앞에 보이는 여섯째 날에는 무엇을 만들었겠습니까? 육지의 내용물인 짐승과 인간을 만들겠지요.
이건 분석적 방법보다는 총체적으로 바라볼 때 이를 수 있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이 저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했고 절대적이었으며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앞에서 이 일을 하신 분이 바로 ‘야훼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지요.
저의 관점이 다른 관점에 대해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비췄다면 본의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성경 전체를 성령하나님이 저작하신 한 권의 책으로 보기위하여 노력할 뿐입니다. 신약과 구약을, 율법과 복음을, 행위와 믿음을 어떻게 하면 같은 원리에서 균형을 잡을 것인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계시의 기록이라고 볼 때, 저는 저자가 하나님을 인식한 만큼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저자에게 나타내심 만큼의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가 먼저냐 믿음이 먼저냐 라는 질문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경험을 했다한들 태평양 바닷물 중에 물 한 방울 만큼도 아니겠지요.
그렇기에 사실 이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하여 무척 망설였습니다.
그런 줄 알기에 주의 자비에 기댑니다.
인용 문구에 ‘각주’를 달지를 못했습니다. 해서, 제가 오경을 공부할 때 교재 또는 참고로 사용했던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시내산 언약과 모압언약
-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 구약산책
- 오경의 모세저작권 (이상, 송제근)
- 모세의 율법 (까젤 前카톨릭 파리대학원장)
- 바울신학개요 (톰 홀랜드)
- IVP성경주석 (고든 웬함 오경편)
- 호크마 주석 (강병도)
제게는 그게 그냥 도구일 뿐인데
저를 그리로 몰아넣으시면 좀 곤란한데요...
그 연장 다 닳고 망가지면 전 그냥 버릴껀데...
그게 제겐 핵심이 아니거든요?
일일이 내용에 대해 답변드릴 수는 없고 몇가지 튀는 것만 말씀드릴께요.
언급하신 문학비평의 목적은 편집됐다, 저자가 여럿이다 이런 것만은 아닌 것 아시지요?
난도질만 했다면 "구약학"이나 "문헌학"에 머물렀겠죠.
성서 연구 분야도 하나의 "신학" 분과입니다.
신학적 해석작업이라 이겁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해석해주신 창세기 1장 이야기는
그런 관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해석이 아니라
일반 비평학 측면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아니 오히려 더 심도깊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 해석입니다.
거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말이죠.
그게 왜 본인이나 혹은 읽으신 책들의 방법론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결론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의아하네요.
히브리적 사고구조, 총합을 넘어 통전적인 사고 유형, 좋지요.
그걸 가지고 합리적인 비평 툴이 나와야 하는데
거기서 성령 하나님의 성경 저작이라니...
사실과 고백을 혼돈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걸 이어주는 다리로써 말씀하신 통전적 이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요.
음...제가 봤을 땐 박승수님은 이런 비평학적 관점에 "대한" 글만 읽으시고
실제로 그런 관점에서 성서해석을 시도해보신 적은 없으신 듯 하네요.
쓰신 글을 읽어보니 공부 많이 하셨네요.
이왕 공부하신 김에 더 폭넓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하셨으면 합니다.
소개하신 책은 본인의 글에 대한 인용 차원이셨겠지만
미안한 말씀이지만, 신학교에서는 대부분 피해야할 책들로 이뤄져 있군요.
그럼.
저도 토론 참여는 못해도 제대로 구경하려면 책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인터파크해외배송(DHL)으로 방금전 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책이 꽤 두꺼워서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그리고 배송료가 좀 아까워서 "볼프하르트판넨베르크신학연구" 책을 함께 주문했는데요,
헐~ 그 책 대신 도올 김용옥이 쓴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라는 책이 왔네요. -_-;;;
한국에서 그렇게 자주 주문할때도 한번도 이런일이 없었는데요. 황당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