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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순 어르신은 중신동에서 나서 자라 

5백미터 정도 떨어진 하신동으로 시집을 와서 평생을 사셨다고 한다.


"요기 앞 신작로로 일본 넘들이 쬐껴가는 거 다 봤다니까~.

나 일곱살 때여.

쫘악 줄을 져서 도맹을 가더라구."

마치 어르신이 일본 넘들을 무찌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얘기하신다.


"시므살 때 시집을 왔어. 우덜 때는 시므살도 어린 게 아녔다니께. 혼기 찬 나이였지.

글케두 시집가기가 싫더라구...

몰러, 왜 그랬능가...

가마도 못 타고 기냥 논두렁길을 걸어서 흰고무신 신고 시집을 오는디

자꾸 뒤돌아보구..., 또 돌아보구... 그럈어. 시집오기 싫어서...

신랑은 한 살 아래, 열아홉 먹었드라구.


아들 딸 낳고 살다가 쉰 둘에, 먼저 갔어. 겨우 맏딸 하나 여웠을 때여..

내가 소를 키워서 나머지 자석들 다 갈쳐서 시집 장가 보냈지.

아이구 말두 마..., 고상한 거 생각하믄..

소 멕일 게 없어 쩍쩍 얼어붙는 그 추운 밤에 쩌어그 남의 논에 꺼정 가서 짚단을 이고 오고 그럈어.

어휴, 왜 그케 그악을 떨었나 싶어, 시방 생각하믄 꿈만 같어, 나 살아온 세월이 말여.

젊었을 땐 일하는 거 이 동네서 나 따라갈 사램 읍다고 헐 정도루다가 일을 재게 해치웠드랬어.


좋았던 때?

좋았던 때도 없었든 거 같네..하두 고상시러워서...

뭐.. 큰 아덜 대학 졸업장 탈 때..., 또 장개 가던 날...., 그때가 질루 좋았지.

메누리 보니까 맴이 좋더라구.

광주에서 시집왔어. 메누리가.

바깥 양반이 기셨으면 을매나 좋았을까.. 싶어 좋으면서도 짠하더라구."


어르신의 자랑은 늘 7남매 자식들이다.

자녀분들이 사년제 대학을, 그것도 명문 대학을 나온 것이 사뭇 자랑거리다.

또랑또랑한 어르신을 닮아 자녀분들도 머리가 좋은가 보다.


"우리 큰 아덜은 쩌어그, 머시냐.., 거시기..호서대핵교 나왔구,

둘째는 고려대핵교 나왔구,

시째는 서울대핵교 나왔어.

우리 큰 딸은 중앙대 나와서 시방 전주에서 약사여~, 약사!

갸가 고등핵교 때 천명도 넘는 학상들 중에서 일등을 하던 애여,

그케 공불 잘해 거지구 중앙대핵교를 시험도 안보고 붙었대니까."


하도 자식 자랑을 하셔서 다른 할머니들이 퉁박을 주실 때도 있지만

오불관언이시다.


"하이고오, 그 총기 좋은 시절에 공불 못허구

다 늙어서 허려니 뭐가 되것어.

이케라두 배워가지구설랑 신문도 멫자 읽고 그랴.

집에 있음 시상이 어치게 돌아가는지 통 몰러.

여그라두 나온께 시상 돌아가는 것두 알고 사람두 보구 그라지..

그랴 매번 이케 열씨미 나오는 겨."


학교 문턱도 못 가보셨다는 최한순 할머니.

꼬부랑 허리로 한 주도 빠짐없이 학교에 나오신다.

사물을 대하는 눈이나 감성이 생생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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