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7일 월요일 날씨 맑음


오전.


교회 김장하는 날이다.

아침을 먹고 서둘러 갔는데도 벌써

어르신들은 교육관 방에서 무우채를 썰고 계신다. 

이 분들의 부지런함을 따라갈 도리가 없다.

아직 가을걷이도 다 못하셨다는데 일찌감치 모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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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선 권사님들은 점심준비로, 사모님과 박목사님은 배추씻기에 한창이다.

주일 오후인 어제 절여놓은 배추가 알맞게 숨이 죽어있다.

장화로 갈아신고 배추 씻는 일을 돕는 시늉을 하려는데 벌써 점심식사란다.


김장날 단골 메뉴인

배추 속 쌈과 수육. 거기에 시원하고 구수한 다슬기 된장국까지...

아침 먹은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다슬기 된장국이 시원하다.

장로님들, 교회당 건축공사하시는 인부들까지 다 불러 함께 점심을 먹는다.


점심식사 후, 속 버무리는데 합류했다. 

속 버무르기는 김장의 여러 과정 중에서 기운깨나 써야하는 고 난이도의 작업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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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썰은 무우에 직접 숙성시킨 멸치액젓과 파, 마늘, 생강, 쪽파, 대파, 갓, 청각, 매실액, 새우젓, 고추가루 등을 넣고 

버무린 김장속은 보기만해도 먹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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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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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온 의숙언니와 선희언니와 운장산 자연휴양림과 천황사를 방문했다.

운장산 자연휴양림의 숲 해설가께서 안내하시는 오솔길을 걸으며 가을의 끝자락을 감상했다.

바스락 바스락, 마른 낙엽 밟는 소리가 조용한 숲의 정적을 깨트린다.

 오솔길은 오소리가 다니는 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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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사 앞 은행나무 아래는 은행이 무수하게 떨어져 있다. 억수로 많다.

선희언니가 준비해 온 비닐과 장갑을 건네준다. 은행을 주우란다.

처음 해보는 은행줍기에 혼이 빠지다. 구린내가 난다. 하지만 재밌다. 

얼마나 주웠을까...

선희언니가 제동을 건다. 천황사에 아는 비구승이 있다며 만나고 가잔다.

경내로 들어서니 널찍한 마당에 정갈한 사찰 풍경이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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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에 연시감이 장식으로 놓여있다. 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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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 스님이란 여승이 환한 미소로 우릴 반기며 방으로 안내한다.

눈빛이 아주 맑고 투명한 가을 햇살같은 인상의 비구승이다. 

정갈하고 환한 방이다.

이렇게 사찰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와 본 것도, 스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도 처음이다.



 따뜻한 보이차를 나누며 한 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가 물 흐르듯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신기하다. 개신교인 나와 불교 수도자인 스님 사이에 어떤 벽이나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다니...

우린 네 여인은 오랜 벗처럼  마주앉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보이차도 따뜻했고 우리 사이에 오가는 대화도 다사로왔다. 한 시간 남짓 얘기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왠지 같은 길을 걷는 도반이라는 유대감 같은 걸 지울 수 없었다.

스님은 언제고 놀러오라고 한다. 

12시에 오면 점심 공양을 받을 수 있다고... 절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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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송 목사님을 찾아보기로 한 시간이 늦어졌다.

송 목사님은 의숙언니 덕분에 얼마 전에 알게 된 분인데 

진안에 귀농하신 시인이자 농부며 장애인 목회를 하시는 분이다.

어두워진 시간에 방문한다는 게 결례인 것 같아서 내일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의숙언니가 통화를 하더니 목사님이 괜찮으니 오라고 한단다.  저녁밥은 먹었냐고 물었다나.

아직 못 먹었다고 하니 아직 저녁도 못 먹고 뭐하냐고 했다나.

저녁을 지어주실 기미가 엿보인다. 송 목사님이 지어주시는 밥이라니 다들 구미가 댕기는 눈치.

늦은 시간에 쳐들어갔다. 다행히도 사모님은 일이 있어 출타 중이고 목사님이 갓 지은 밥을 퍼 밥상을 차려주신다.

이번이 두번째다. 목사님이 해준 밥을 먹는 게.

갓 방아찧은 햅쌀로 압력솥에 지은 밥,  된장국,. 김치 정도의  단촐한 밥상이

이렇게 맛있어 본 적이 근래에는 물론 기억에도 별로 없다.

여기 올 때 마다 배가 고팠기도 했지만 올 때마다 고맙게도 식사여부를 묻고 흔쾌히 밥을 지어주신다.

밥 짓기를 즐기시는 목사님이다.

특별한 반찬없이 갓 지은 밥과 즉석에서 보글보글 끓인 뚝배기 된장국을 주 메뉴로 내놓으신다. 

그런데 그 밥이 어떤 진수성찬 보다도 맛있다는 게 한 치의 꾸밈없는 내 소견이다.

밥맛도 밥맛이려니와

남자가 해주는 밥상을 받아 먹어 본 적이 없는 세 여자들은

이 윤이 자르르 흐르는 뜨거운 밥과 된장국만으로도 감동의 도가니인데

은은한 음악까지 틀어주시는 센스까지...! 오감충만, 감동의 쓰나미다.

오늘은 도라지무침 묵은지, 생김치, 구운김. 깻잎장아치, 된장국이 전부였다..

그런데 여기서 압권은 밥이다.

질지도 되지도 않은 알맞게 촉촉한 뜨거운 밥. 밥알이 하나하나 살아있으면서도 부드럽다. 

한 알 한 알 씹히는 식감이란~! 정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다.

이렇게 맛있는 밥은 그 어디서도 먹어본 적이 없다. 비법을 물었더니 자세히 알려준다.

듣고보니 비법이란 다름 아닌 정성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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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감칠맛의 묵은지는 왜 또 그렇게 착착 입에 감기는지...

염치불구하고 사나흘 굶은 사람들처럼 허겁지겁 폭풍흡입을 해대다가 아차!! 인증샷!  

뒤늦게 찍었다.

태풍이 쓸고 간 밥상 그대로다. 


부른 배를 두드리고 뜨뜻한 구들장에 엉덩이를 지지니 다들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목사님이 군불을 때 줄테니 자고 가란다. 내일 아침은 양식으로 해준다고.

빵과 커피란 말에 선희언니 입이 귀에 걸린다. 아, 평소에 먹기 어려운 빵을 먹을 수 있다니~! 

아이처럼 좋아하는 선희언니의 천진한 표정에 다들 박장대소했다. 

다섯마리가 넘는 개 떄문에 절대 외박이 불가한 언니가 개밥 포기를 선포할 만큼 빵의 위력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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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목사님은 손님방으로 지어진 별채에 군불을 지피고 나서 우릴 부른다. 불구경하라고.

활활 타는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불을 쬐었다. 이런 아궁이불을 쬐어 보는 게 얼마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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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별빛이 반짝 반짝, 아궁이엔 장작불이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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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뜻하게 올라오는 구들장의 온기를 느끼며 송목사님이 손수 농사지은 복분자로 담근 술을 음미하며

송목사님이 읽어주시는 시 감상을 했다.

십여년 전에 초등학생이던 딸이 함께 펴낸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다.


생각하는 사람 2

                  

생각하는 사람

조각 앞에서

생각 안하는 사람들이

돌처럼 서서

구경합니다.


이슬


'이슬마저 물드는 계절이구나!'

감동하자

가을이 톡 사라진다.



딸 하원이의 시.


코피

  

코 파고 

또 파서 

코가 찢어져서 

피가 나온다.

아파 죽겠는데


속은 시원하다.



팔다리


나는 TV에서 

전쟁으로

팔과 다리가 짤린 

아이들을 보았다.


괜히 미안했다.

내 팔다리는 멀쩡해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참 특별한 날이다.

여스님이 따라 주신 보이차에,

남자 목사님이 해준 맛있는 밥상에,

복분자 술에 뜨뜻한 구들방까지...!

우린 뜨거운 방바닥에 몸을 지지며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 세 여전사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날인가보다며 깔깔거렸다.
이런 환대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받을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신기하다.
정성을 내어 주는 이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일 거다.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마음이 통하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감동적인 시간들이 훨씬 많다는 게 
정말이지 감사하고 감사하다.


긴 하루였다.
일기도 길어졌다. 줄여 쓴다고 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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