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5일 토요일 눈 온 뒤 맑음.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이제 얼추 끝난 듯 하지만 

지난 주 까지만해도 동네 이집 저집에서 김장들을 해 넣느라 부산했다.

도시에서는 간소해진 김장이 이곳에선 아직도 중요한 연중 행사다.

어렸을 때 보던 김장철 진풍경이 아직도 그대로 연출되고 있다.

대여섯 포기 정도로 김장이 끝나는 도시 규모가 아니다.

보통 100포기 이상이고, 200포기, 많게는 500포기까지 하신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도회지에 사는 자식들에게 몇 박스씩 택배로 보내기 때문이다.

배추밭에서 그 많은 양의 배추를 뽑아서 다듬고 절이는 일부터 김장 속을 만들고

속을 넣어 완성된 김치를 땅 속에 묻기까지의 대 작업이 모두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어느집에서 김장을 한다하면 동네 아낙들이 모여 품앗이를 한다.

일 못하는 나도 몇 번 기웃거렸다.


 현장에서 보는 질펀한 김장판은 단편영화를 찍어도 될 만큼 진풍경이다.

수백포기의 절임배추, 직접 말려 빻아만든 고추가루와 

바닷가에서 잡아올린 새우랑 멸치를그 자리에서 소금쳐 숙성시킨 새우젖과

멸치액젖을 들어붓고 갖은 양념에 매콤짭짤하게 버무린 속을

백수십포기의 배추 갈피마다 일일히 묻힌다.

그 길고 힘든 작업을 힘도 안들이고 척척해낸다. 

걸쌈진 수다들을 쉴 새없이 쏟아내면서 말이다.

그 맛깔스런 남도 사투리를 생생하게 옮길 재간이 없다.


" -이런, 씨부럴~~, 이 썩을 놈의 통은 왜 이케 안 열리는 거여~!

- 아따, 싸게 싸게들 넣드라고잉..해저물것네.

- 워메~ 고칫가루를 겁나게도 드러부샀고마...

- 짐치 속 간 좀 보소, 싱거운지, 짜운지..

- 들 짜운디.., 거시기...쩌어그 액젖 좀 더 부사야 쓰것어,

- 내 입에는 딱 맞구먼 그랴, 느므 짜워도 못쓴당께.

- 으메.. 허리야, 안복순이 짐치해주다 내 몸땡이 작살나것네~깔깔!


이 고장 태생 아니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사투리와 억양...^^

전라도 김치 이상으로 감칠맛 나는 수다들이다.


그러다가 말싸움까지 일어나는 웃지 못할 살벌한 풍경마저도.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고 저러다가 진짜 싸움 나겠다 싶을 즈음이면, 

젊잖게 나오는 소리.

-씨끄럽다, 고만해라.. !

시나브로 말싸움이 평정되고

 고성이 오가던 두 양반은 언제 그랬냐 싶게

수돗가에서 깔깔 거리며 고무장갑을 씻는다.

그리곤 소주 한 잔을 곁들여 시원한 동태국에, 수육에, 보쌈김치를 싸 먹으며

 피로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여기 살면서 감정을 거르지 않고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동네 여인들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런 풍경이 심심찮게 연출되는 게 아닌가.

언젠가 제직회의 중에 성질 난다고 성경책이 날아갈 뻔 한 적도!ㅎㅎ

처음엔 여과없이 내뱉는 그런 모습에 기겁을 했는데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하다.

어쩜 세련된 교양과 체면으로 위장하며 속으로 칼날을 가는 것 보다

이렇게 원색적인 모습이 더 솔직하지 않을까.ㅎㅎ

시원하게 내쏟으면 뒷감정이 남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얘기가 옆으로 샜다.


암튼 김장철의 걸직한 풍경들을 보면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다. 

생명의 찐한 기운이랄까, 살아 꿈틀대는 원초적 삶의 진면목이라고 해야할까.

이런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질기게 이어온 힘으로 인류가 존속되는가 싶다.

이런 생명의 뿌리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이 분들이 가시고 난 2,30년 후에도 이런 김장철 풍경이 펼쳐질런지...


오늘은 옆집 여수댁 할머니네 김장날이었는데

동네 잔치같았다.

멀리사는 큰 딸과 사위 작은 딸과 사위 손녀까지 와서 떠들썩했다.

마당에 솥을 걸고 수육을 삶고

아침부터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모여 백수십 포기의 김장 속을 버무리고

솜씨 좋기로 유명하다는 여수댁 할머니의 점심밥상을 맛있게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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