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9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은 해가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는 세상을 내다봅니다. 빛이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되고, 어린 양이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사 60:19-20절에서 이에 관해서 통찰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해의 빛과 영광의 빛은 비교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태양 빛은 물리적 현상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종교적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요한이 이렇게 표현한 까닭은 ‘빛’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태양 빛도 생명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태양 빛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생명의 근원입니다. 문제는 태양 빛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이해되나 하나님의 영광은 멀게 느껴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 경험의 범주 안에 들어있으나 후자는 그 범주를 넘은 겁니다. 이 간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태양 빛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빛은 있으나 없으나 세상을 인식하는 데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촉각과 후각과 청각을 통한 세상 경험입니다. 특히 촉각이 중요하겠지요. 촉각으로 나무와 물과 흙을, 그리고 꽃과 사람과 고양이를 구분해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가 없는 사람은 촉각과 후각만이 아니라 시각이 있어서 세상을 더 풍성하게 경험한다고 보통은 생각합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각에 의존하는 방식의 삶에 길들면 촉각은 무뎌질 수 있습니다. 거꾸로 시각장애인은, 간혹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까지 망가진 장애인들이 있는데, 비장애인이 느끼지 못하는 촉각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시각을 태양 빛이라 하고, 촉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요한의 묵시적 표상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말하듯이 고정관념을 내려놓기가 거의 불가능하기에 이런 말씀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세상의 이치에 길든 사람이 어떻게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고정관념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거나 수준 이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갇힌 세계관’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삶 자체를 직면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