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24일 포도원 농부 비유(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12:3)
예수님의 비유는 거의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합니다. 겨자씨 비유(막 4:30-32) 큰 잔치 비유(마 22:1-10), 잃은 양의 비유(눅 15:1-7),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눅 15:11-32) 등이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직접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는 모두 동일한 개념입니다. 태양을 직접 바라할 수 없듯이 하나님 나라를 직접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또는 그 나라, 그 통치를 집적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직 결정된 그 어떤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주론적 역사가 결정될 그 종말을 포함해서 역사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가 어찌 실증적인 언어로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포도원 농부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불순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인 묘사가 나오고, 누가 들어도 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를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 것과 비교되지요.
어쨌든지 위 구절에서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구타하고 쫓아버렸다고 합니다. 무고한 자를 향한 폭력입니다. 이런 일들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진화되어야 폭력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건은 <사도신경해설>강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미래' 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 그 '미래'를 미리 보여 주신 거구요.
-그렇다면, 성령님을 '우리가 그 하나님의 미래를 볼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
이라고 해도 될까요?하나님의 미래.. 감히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언어로 담아 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