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26일 포도원 농부 비유(5)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면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12:6)
어제의 묵상에서 저는 우상숭배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원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떻게 작용되었는지를 보충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를 자칫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선 이런 질문부터 시작해도 좋아요.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복적으로 우상숭배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이 생존에 대한 불안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 살던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농경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통해서 나름으로 풍요의 문명을 일구었습니다.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가나안 문명은 당연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문명의 특징은 현재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의 생존을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이에 비해서 야훼 하나님의 약속은 두 가지 점에서 달랐습니다. 하나는 물질적인 풍요를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구원의 약속이 미래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 만족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런 약속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말이 불편했습니다. 그들은 참 예언자들을 죽이고, 지금 모든 게 잘된다고 사탕발림의 말만 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추종했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들은 바로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급기야 자기 아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에게는 못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말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에 보냈습니다. 어찌 되었을까요?
이 얼마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들인지,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정말 어려운 면모를 지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 두가지가 낯설지 않고, 옳다고 확신하게 되는 건... 어떤 의미일까를 되뇌어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