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소. 신앙 문제에서 솔직하기가 쉽지 않소. 왜 그런지 아시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소. 우선은 교회 분위기요.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 분위기는 그대도 잘 알 것이오. 무조건 믿기만 하라는 강요를 받소.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게 더 근본적인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오. 모르니까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도 모르고, 질문에도 자신이 없소. 삶의 요령을 잘 아는 것과 기독교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오. 자기가 무엇을 알고 말하는지 아닌지, 불안해하면서 자기 검열이 반복되고 있소. 이런 상황에서는 솔직한 대화는 불가능하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트집 잡는 것이 솔직한 대화는 아니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말다툼에 불과하오. 이런 말다툼의 방식으로는 진리를 경험할 수 없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양 극단으로 치우치기가 쉽소. 한쪽으로는 열광적인 믿음으로, 다른 한쪽으로는 공소한 말다툼으로 말이오. 솔직한 대화는 이런 것과 달리 기독교의 실체적 진실에 직면하는 것이오. 진리에 열린 마음이라고 할 수 있소. 그런 준비가 된 사람만 열린 대화에 참여할 수 있소.
내가 다시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그대는 예수님을 영접하신 적이 있소?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어제 묵상에서 주관적 경험의 위험성에 대해서 지적했소.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신앙적 확신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진실을 왜곡하는 함정이기때문이오. 그게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오늘 다시 반복하지 않겠소. 그런 경험이 모두 잘못된 것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하오. 그렇지는 않소. 기독교 신앙에서는 개인의 경험이 중요하오. 그걸 부정하면 기독교의 토대 자체가 허물어지오. 왜냐하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개인을 찾아온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오. 문제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경험이 보편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소. 다시 묻소. 그대는 예수 경험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소? 그냥 ‘어젯밤에 주님이 날 찾아왔다.’는 방식의 설명으로는 곤란하오. 그런 방식의 설명으로는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가 없소. (2010년 12월2일, 목, 찔끔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