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절은 팔복의 총괄이다. 이것을 포함해서 구복(九福)이라고 해도 되지만, 앞의 여덟 개 문장이 삼인칭 단수로 되어 있는 반면에 이 항목의 인칭대명사만 이인칭 복수로 되어 있어서 분리해서 보는 게 좋다. 아홉 번 째 복이 팔복의 결론인 셈이다. 본문을 그대로 읽어보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여기서 ‘나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주목하라. 팔복에 열거된 내용들이 일반 윤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휴머니즘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믿음이 핵심이다. 복음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이 되라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는 자가 되라고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팔복 중심은 기독론이다. 예수와의 관계에서 세상을 보라는 뜻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당했다. 십자가에 달린 자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사실은 세계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당시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진술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표적은 종교의 토대이고 지혜는 철학의 토대였다. 오늘날로 바꾸면 표적은 ‘대박’이고 지혜는 ‘경쟁력’이다. 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부정한다.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한 이를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팔복의 삶은 십자가의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청된 삶이다. 그냥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팔복이 무미건조하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으로 살다가 당하게 되는 가난, 애통, 목마름, 박해 등등의 운명도 복이다.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하늘에서 상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희망하는 제자의 영성에서 살고 있을까?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알고도 또다시 하는 것을 '정신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정신병자 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할 때 마다 깜짝 놀랄때가 많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을 두고 '혼난다'라고 옛 어른들이 표현하시더군요.
혼이 나가서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보고 들어와서 정신 차린다 뭐 이쯤의 표현인것으로
제 상식에는 기억되어 있습니다.
언제는 아니었겠냐마는,
요즘같은 때 바짝 정신 차리지 않고서는 정신병자 되기 쉽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갑니다.
씁쓸하면서도 감사할 일입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