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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4월6일, 저녁 8시, 시편 127편
헛되도다!
오늘 시편 137편은 완전히 다른 두 주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1,2절로 여호와와 연결이 되지 않은 삶의 허무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3-5절로 가정이 생존의 밑바탕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원래는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지혜의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고 한다.
1절: 시편기자는 여호와와 연결되지 않을 때 헛될 수밖에 없는 사람의 행위를 두 가지로 거론한다. 하나는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다. 집은 사람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다. 오늘 우리의 모든 경제 활동도 집을 세우는 행위이다. 그것 자체로만 놓고 보면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집은 언젠가 때가 되면 허물어진다. 죽을 때 지고 갈 수도 없다. 다른 하나는 성을 지키는 파수꾼의 일이다. 파수꾼이 잘 지켜야 성이 안전하고, 주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오늘도 우리는 자기 재산을 조금도 잃지 않거나 좀더 확보하려고 파수꾼처럼 살아간다. 그 지키려는 것들이 모두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면 허무할 수밖에 없다.
집을 세우는 수고와 성을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시편 127편을 쓰고 읽던 사람들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갔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일상을 상대화할 수는 없다. 수도원의 수사들도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을 무시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도 일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삶에 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염려로 삶을 소진하는 삶이 문제이다. 일상을 치열하게 사는 것과 그것으로 염려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2절: 헛된 일상의 세 번째 항목이 여기서 거론된다. 수고의 떡이 헛되다고 한다. 표현이 재미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면서 ‘수고의 떡’을 먹는다고 한다. 이것은 치열한 삶이라기보다는 매달리는 삶의 모습이다.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의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고 한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돈을 벌기만 한다. 대통령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하게 일한다고 자랑한다. 한국 교회도 세계에서 제일 부지런하다.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수고한다. 시편기자는 그것이 헛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염려의 떡’이기 때문이다. 밤을 지새우면서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을 주신다고 한다. 늦잠을 자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휴식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염려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상은 누구에게만 똑같이 버겁지만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삶의 안식을 경험한다.
3-5절: 이 대목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단은 전혀 다른 성격의 말씀이라고 봐야 한다. 가정이 행복의 기초가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유대교의 국가관이 자리한다. 많은 자식을 둔 가정이 늘어날수록 국가는 튼튼하게 서는 법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국가관, 가족관을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가족을 넘어, 국가를 넘어 온 세상이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로 나가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간접적으로 앞 대목과 연결된다. 집, 재산, 노동을 비롯해서 가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상은 여호와와의 관계에서 참된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어제 시편을 공부하면서
2절에 나오는 독특한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위 강의 안에 나왔듯이 수고의 떡은 염려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부지런하게 돈을 벌면서 결국은 염려를 먹고 산다는 건데요.
그런 삶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염려의 떡만이 아니라 만족의 떡이기도 하다고 말입니다.
자기가 최선을 다 기울여 어떤 일을 성취했을 때
당연히 어떤 만족을 느끼겠지요.
그런 자극 때문에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무언가를 열심히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그게 헛되다는 시편기자의 말을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것말고 대안이 있을까요?
도대체 성서가 말하는 여호와 안에서의 삶이
이런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숙제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손에 잡으려고 애를 쓰는 모든 것이
결국은 다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