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5월4일, 저녁 8시, 시편 130편

파수꾼의 영성

 

시편 130편은 루터의 찬송시 “Aus tiefer Not schreie ich zu Dir”에 영적 동기가 된 시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접목시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신앙적으로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깊은 곳, 부르짖음, 죄악, 사유, 경외, 기다림, 파수꾼, 아침, 인자하심, 속량 등이 그것이다.

기다림

이 시의 핵심 주제는 기다림이다. 5, 6절에서 이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여기서 파수꾼은 밤을 지키는 자다. 아침이 와야만 자기의 임무를 끝낼 수 있다. 그는 왜 그렇게 강렬하게 기다리는가? 파수꾼에게 밤은 유혹의 기간인 것처럼 시인에게 현재의 삶은 불안의 시간이다.

그는 ‘깊은 곳’에서 부르짖고 있다.(1절) 여기서 깊은 곳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과 비슷한 의미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그런 경험을 하셨다. 궁극적인 생명과의 불일치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다. 공허하고 불안하다. 그것은 정신병자나 자기망상에 빠진 사람이 아닌 한 모두가 감당해야 할 궁극적인 실존이다. 우리의 삶이 그림자와 비슷하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심연’을 경험한다. 그 무엇으로도 심연은 채워지지 않는다.

시편기자는 그 원인을 죄에서 찾는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의 시인들은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죄의 깊이를 뚫어보지 못한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크다는 말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죄인의 괴수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죄를 단순히 부도덕성과 실정법의 위반으로 보면 곤란하다. 그 근원적인 것이다. 인간을 궁극적인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힘을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죄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속량

시편기자가 파수꾼의 심정으로 여호와를, 즉 그의 말씀을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은 구원이 그에게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희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구원은 여호와의 ‘속량’이다. 속량(贖良)은 죄를 씻어준다는 의미의 속죄(贖罪)다.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8절) 이 말은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인간의 노력으로는 속량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성서는 죄 문제를 단순히 행동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수준에서 접근한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죄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이는 곧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죽음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서에서 죄와 죽음은 한 짝이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속량을 받았을까? 이는 생명을 얻었을까, 하는 질문과 똑같다. 대답은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완전한 속량을, 즉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 구원과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다. 마치 파수꾼에게 아침이 약속으로 주어진 것과 비슷하다. 이 약속은 종말론적인 능력이다. 그것이 종말에 우리에게 실현되지만 이미 지금의 삶에 개입되어 있다. 그런 능력을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확장시켜나가는가 하는 게 영성이다. 오늘 시편의 표현을 빌리면 파수꾼의 영성이다. 그에게 아침이 현실이듯이 종말의 생명이 오늘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현실이라는 말이다.